8화 네 입으로 먹여줘2021.12.28.
기사단장이 요한에게 리베르탄 공작의 편지를 전했다. 편지의 내용은 기사단장이 보고한 그대로였다. [블란쳇 공작, 시집간 내 딸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주시오. 그것만 해준다면 블란쳇 공작이 원하는 대로 리베르탄 공작가의 죄를 모두 시인하겠소.] 편지를 읽은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기사단장은 에리히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제 생각보다 더 리베르탄 공작이 자기 딸을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하긴. 어차피 거기서 풀려날 방법은 없을 테니 아끼던 딸의 얼굴 한 번 더 보고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경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리베르탄 공작이 아무리 딸을 아낀다고 자포자기할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잠시 인상을 쓰던 에리히가 안경을 고쳐 쓰며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마…… 진짜 목적을 감춰두려는 게 아닐지 싶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생각이 맞을 거다.”
요한은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다.
“정말 딸을 아낀다 해도, 그런 조건을 걸기는 쉽지 않지. 어떤 노림수가 있지 않고는.”
똑똑. 바깥에서 집무실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천천히 문틈이 벌어지며 그 사이로 한 여자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 제가 들어가면 방해가 될까요?”
“부인?”
갑작스러운 에스텔의 등장에 모두가 당황했다. 특히 방금 전까지 에스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졌다. 요한은 능숙하게 웃는 얼굴로 에스텔에게 물었다.
“부인이 내 집무실에는 무슨 일이야?”
“그동안 한 번도 공작님께서 일하시는 집무실에는 가봤던 적이 없어서요.”
에스텔은 차와 찻잔을 담은 트레이를 들고 있었다. 가냘픈 팔은 그 트레이를 금방 떨어뜨릴 것처럼 흔들렸다. 기사단장이 ‘제게 주십시오’ 하며 들고 있던 트레이를 받아 들어 요한의 책상 위에 놓았다. 에스텔이 한결 편해진 미소로 요한을 생긋 바라보았다.
“사실 만찬회에 참석하지 않게 된 만큼 별거 아니더라도 공작님께 뭐라도 하고 싶었어요.”
요한이 살짝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권태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지 말라고 해서 서운하지는 않았어?”
“솔직히 서운하지 않으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전 상관없어요.”
그윽한 차 향이 퍼지는 가운데 에스텔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긋 웃었다.
“공작님께서는 저보다 더 블란쳇 공작가의 가신들에 대해 잘 알고 계시잖아요. 공작님께서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셨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믿어줘서 고마워.”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걸요.”
그렇게 말한 에스텔이 요한을 보다가 힐끔 주변의 두 사람을 보면서 물었다.
“두 분은 공작님과 함께 일하시는 가신분인가요?”
“아, 마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기사단장인-”
막 에스텔을 처음 보게 된 기사단장이 인사하려던 차였다.
“부인이 알 필요 없는 놈이야.”
요한이 묘하게 불쾌하다는 느낌이 드는 목소리로 기사단장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기사단장이 검지로 자기를 가리키며 어리둥절해 했다.
“제가 말입니까?”
“내 부인이 널 알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그렇게까지 이유를 물으신다면야 그럴 것까지는 없지만…….”
기사단장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뒷목을 긁적이곤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마님. 알 필요 없는 놈이라고 합니다.”
“네. 만나서 반가워요.”
에스텔은 힐끔 기사단장과 에리히의 눈치를 본 뒤 요한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바쁘신 것 같으니 전 이만 갈게요. 회의 잘 나누세요.”
요한은 막 나가려는 에스텔을 붙잡았다.
“부인.”
그는 어리둥절한 에스텔을 보며 입술 끝을 부드럽게 당겨 웃었다.
“이대로 놓고만 가면 어떻게 해.”
“그러면요?”
“원래 난 차 같은 건 입에 잘 대지 않는데.”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유혹적으로 번뜩였다.
“그러니까 여기. 저번처럼 내 입에 직접 먹여줘야 내가 먹지.”
그 말을 듣자마자 에스텔의 두 볼이 발긋하게 물들었다. 에스텔이 뒷걸음질 치려 하자, 손을 꼭 잡아서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재밌네.’
에스텔의 반응이 격해질수록 요한은 기분이 더 좋아졌다.
“어서 해줘. 부부 사이에 서로 먹여주는 게 흠은 아니잖아.”
요한이 에스텔의 두 손을 붙잡은 채 손등에 입을 맞췄다. 손등에 닿았던 입술이 느긋하게 손 끝에 도착했다. 그가 유혹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손으로 먹여주기 싫으면, 난 입으로 먹여줘도 좋은데. 어느 쪽으로 해 줄래?”
“둘 다 안 할 거예요!”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만큼 볼을 새빨갛게 물들인 에스텔이 요한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백금발을 팔랑거리며 도망치는 에스텔을 지켜보던 요한이 청량한 웃음을 터뜨렸다. 기사단장이 에리히에게 물었다.
“제가 잠시 꿈나라로 떠났다가 온 것은 아니겠지요?”
에리히는 기사단장의 질문을 듣지 않은 척 무시했다. 그러자 기사단장은 에스텔이 나간 문을 보며 팔짱을 낀 채 휘파람을 불었다.
“두 분 사이가 정말 좋아 보이십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원래 금실 좋은 부부로 알 것 같습니다.”
“그만큼 주인님의 계획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거겠지요.”
에리히는 기사단장의 말을 적당히 정리한 채 요한에게 말했다.
“밖에서 저희가 하던 얘기를 들었을까요?”
“제가 보니까 마님께서는 큰 생각 없어 보이시던데요? 순수하게 주인님만 쳐다보고 계시던데…….”
“경.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리베르탄에서 온 여자입니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단 얘깁니다.”
에리히가 한숨을 쉬며 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주인님. 역시 예정대로 오늘 만찬에 부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면 오늘 어디까지 들었는지 확인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에리히.”
요한이 선득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에리히를 불렀다.
“언제부터 네가 내 결정에 의문을 제기했지?”
“실언했습니다.”
에리히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원래 요한은 본인이 내린 결정을 잘 바꾸지 않는다. 이미 한 번 번복한 결정이니, 바꾸지 않을 것이다.
“오늘 만찬은 주인님 혼자서 가시는 것으로 전해두겠습니다.”
기사단장이 에리히의 말이 끝나자 끼어들었다.
“그러면 리베르탄 공작의 요구를 들어주실 생각이십니까?”
잠시 리베르탄의 편지를 보던 요한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조소를 띠었다.
*** 바깥으로 나간 나는 혼란에 잠겼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날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순간적으로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얼굴이 떠오르며 어이없어졌다.
‘도대체 왜지?’
솔직히 진심으로 궁금한 건 아니었다. 굳이 그 이유를 캐봐야 그리 좋은 이유는 아닐 것 같았다. 반역죄로 몰락하면서 나 같은 애의 손을 빌릴 정도로 힘들어진 정도겠지.
‘문제는 나야.’
사랑받는 입양아라는 이미지는 유지되겠지만,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더 강하게 나서면서 전보다 미움받게 생겼다.
‘이번에 가신들과의 만찬에 부르지 않은 것도 이것과 관련된 걸까?’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작에서 나오지 않은 사건이라 대비하기 무척 어려울 것 같았다. 그때 오늘 다과를 추천해 준 베티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왔다.
“마님. 주인님의 반응은 어떠셨어요. 설마 불편해하시던가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어.”
“그렇지만 다과는 그대로 놓고 오신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지.”
“그럼 반기신 모양이에요.”
에스텔의 빈손을 본 베티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베티에게 다시 한번 더 물었다.
“아주 반긴 거라고?”
“그럼요. 주인님이 사전에 허락받지 않은 출입을 얼마나 싫어하시는데요. 심지어 마님께서는 차도 들고 가셨잖아요.”
“……달리 말하면 베티 너는 공작님께서 엄청 싫어할 수도 있는 일을 권한 거구나.”
내 지적에 베티는 다급해진 목소리로 변명했다.
“저야 당연히 잘 될 줄 알고 한 거죠. 중요한 건 마님께서 가지고 온 차도 그대로 두고 올 수 있게 하셨고, 간식도 달라고 하셨다면서요. 그거면 정말 좋아하신 거예요!”
베티가 본인이 직접 들어갔다 온 사람처럼 두 손을 주먹 쥐며 흥분했다. 어쩐지 나는 자신의 허술함을 감추기 위함이 아닌가 싶었지만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베티와 실제로 어떤지 토론을 해봐야 큰 의미는 없었다.
“내가 부인이라서 너무 무안하지 않게 해줬던 거 아닐까.”
“……주인님이요?”
베티의 눈은 마치 내가 아는 요한과 자신이 아는 요한이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불신으로 가득했다.
“마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어쩔 수는 없지만…… 주인님께서 자기 공간에 남을 들이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편이셔서요.”
아무튼 가신들과의 저녁 만찬에 가지 않게 돼서 내 시간이 붕 뜨게 되었다. 그래서 저번에 에리히 때문에 제대로 가지 못했던 서재를 방문하려고 했다. 그런데 가신들이 손님으로 오는 날이어서인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베티에게 열쇠에 대해서 물어봐야 하나?’
원래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내 성향이 아니었지만, 자물쇠로 잠글 정도로 저택이 정신없을 때 흑마법에 대한 책을 찾아서 읽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베티와 헤어진 장소로 돌아갔다. 그러자 저택 인근의 정원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에……스텔.
보통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들으면 섬뜩하겠지만, 별로 무섭게 들리지는 않고 오히려 따듯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누구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았는데.’
그래서 일부러 소리가 난 정원을 향해서 걸어갔다. 블란쳇 공작가는 요한의 어머니이신 전 공작 부인이 돌보는 장미 정원을 제외한 모든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놓았다. 특히 저택 뒤쪽으로는 숲처럼 느껴지게끔 울창한 나무들을 심어놓았는데, 그게 또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역시 아무것도 없어.’
일부러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저한테 말 거신 거 아니었어요?’ 하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여름철 특유의 쨍한 여름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이제 곧 여름 축제가 시작될 때인가.’
여름은 제국에서 가장 많은 행사가 벌어지는 기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름 축제가 끝난 뒤에도 짧은 기간을 두고 여러 행사가 겹쳐져 있어서 유독 더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원을 나오자마자 저택 안으로 들어오던 에리히와 요한, 그리고 이번 만찬을 위해서 방문한 듯한 가신 한 명과 마주쳤다.
“부인이 여기는 왜…….”
처음 요한은 곧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지만, 나를 바로 인사시켜 주었다.
“여기는 내 부인 에스텔 블란쳇이다.”
“안녕하십니까, 블란쳇 공작 부인.”
가신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나는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렉시어스 폴만?”
그때 검은 천 초상화에서 봤던 남자였다.
‘검은 천 초상화에는 블란쳇 공작가에 충성을 바치고 돌아가신 분들만 있는 게 아니었나?’
그런데 어떻게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그 남자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마님, 그게 무슨 소리신지요. 렉시어스 폴만 경의 이름이 갑자기 왜 나오는지…….”
“아, 제가 잠시 착각했나 봐요.”
검은 천 초상화는 원래 기괴하게 그리는 초상화라서, 그냥 닮은 사람을 내가 착각했던 것 같다.
‘말만 안 했으면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놀란 바람에 이름을 불러버린 게 문제였다. 요한의 날카로운 시선이 남자를 향했다. 어쩐지 분위기가 더욱 어색해졌다. 내가 망친 분위기를 최대한 풀기 위해서 남자의 모습을 살폈다.
‘이럴 때는 칭찬이 답이다.’
그때 남자의 가슴팍에 매단 자수정 브로치가 햇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였다. 자수정뿐만 아니라 다이아몬드까지 근처에 박혀서 아주 화려했다.
‘보통 남성용으로 나오는 브로치들과는 디자인이 다른 것 같은데.’
그런데도 할 정도의 브로치라면 이 사람이 아주 아끼는 브로치인 게 틀림없었다.
“자수정 브로치가 아주 예쁘네요. 차림과 브로치가 아주 잘 어울려요.”
“……예?”
가신이 희게 질린 얼굴로 반문했다. 내가 원했던 반응과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었다.
‘큰 사연이 있는 브로치였나 봐.’
그래서 내가 언급하자마자 놀란 게 틀림없었다. 그때 에리히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다. 때맞춰 요한이 손을 들어 에리히의 말을 막았다. 요한이 내 남색 눈동자를 직시하며 물었다.
“가스피어 자작의 브로치가 화려하긴 하지. 부인은 저런 브로치가 마음에 들어?”
“공작님께서 주신다면 어떤 브로치든 다 기쁠 거예요. 하지만 저 브로치가 제 취향일 것 같지는 않네요.”
어린 시절부터 겪은 교훈이 있다면, 잘 모르는 상황에서는 평온한 척하는 게 가장 무난한 선택지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웃었다.
“그러면 전 이만 가볼게요. 제가 참석하지는 못하겠지만, 좋은 시간 되길 바라요.”
인사를 마친 뒤 최대한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자, 마음이 놓여서인지 겨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게 뭐라고 또 긴장이 되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만찬회에서 참석하지 않게 막았던 요한의 판단은 정확했던 모양이다. *** 에스텔이 자리를 떠난 뒤. 요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가스피어 자작을 돌아보았다.
“내 부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자수정 브로치라니요. 주인님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 아무런 브로치도 차고 있지 않습니다.”
자작의 품에는 브로치가 달려 있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내 부인이 널 보고 렉시어스 폴만의 이름을 부른 이유는?”
가스피어 자작은 렉시어스 폴만 경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유독 의미심장했던 이유는, 충신이었던 렉시어스 폴만 경이 살해당했던 당시 자수정 브로치 사건에 대해서 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란쳇 공작가가 반역죄로 잡히게 되면서 자동으로 사라지게 된 사건이기도 했다.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마님께서 저를 음해하시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래 봐야 리베르탄에서 온 여자가 아닙니까! 분명 블란쳇 공작가에 분란을 일으키려…….”
가스피어 자작이 창백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에리히는 숙련된 손길로 그를 붙잡았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확인해 보면 알 일이지.”
요한의 무심한 입가 위로 건조한 웃음이 픽 흘러나왔다.
“내 부인이 망언을 했든, 네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였든.”
“…….”
“만일 내 부인이 허튼소리를 지껄였다면 진심을 다해 배상하도록 하겠다.”
*** 가스피어 자작은 지하실에 끌려가자마자 제 죄를 시인했다. 당시 수도의 한 고아원 비리 사건을 알아서 처리해 주는 대신 자수정 브로치를 뇌물로 받았고, 그게 잘못하여 덜미를 잡히자 렉시어스 폴만 경을 살해했던 것이다. 그 후 운 좋게 블란쳇 공작가가 멸문하게 되면서 상황을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요한은 가스피어 자작의 품에서 나온 자수정 브로치를 바라보았다.
‘가스피어 자작은 자수정 브로치를 숨긴 마법에 대해 묻자마자 피를 토하며 죽었다.’
마법에 정통한 요한조차 눈치채지 못한 마법이었다. 요한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자수정 브로치에 대해 얘기하던 에스텔을 떠올렸다.
‘도대체 부인은 그걸 어떻게 안 거지?’
갑작스러운 리베르탄의 제안, 그리고 목적과 방법을 파악할 수 없는 부인의 행동. 그리고 의도치 않게 해결된 과거의 사건까지. 확인해 볼 필요가 생겼다. *** 베티를 찾았을 무렵에는 이미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가신들과 만찬을 가질 필요가 없던 나는 혼자서 저녁을 먹었다. 솔직히 방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즐거운 저녁이었다. 디저트는 두 번이나 더 먹기도 했다. 하지만 저녁이 끝나갈 때쯤 슬슬 현실적인 문제가 고민되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를 모르겠으니 현상 파악이 우선이다.
‘일단 내일 집무실에 찾아가서 요한의 반응을 확인해 보고…….’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자, 방에서 요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인. 저녁은 잘 먹었어?”
가운만 입고 있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