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부인은 내 거잖아2021.12.24.
반역죄는 제국에서 가장 무거운 죄다. 이미 황제의 승인을 받은 이상 모든 일은 수월하게 처리되었다. 리베르탄 공작가는 전부 비참하게 황궁 기사들에게 끌려갔다. 황궁 감옥에 갇히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리베르탄 공작은 추하게 매달렸다.
“고위 귀족을 이렇게 갑자기 끌고 가는 법은 없네!”
하지만 이미 본인들이 저지른 전과가 있기에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요한은 아수라장이 된 리베르탄 공작가 위로 참혹했던 블란쳇 공작가의 멸망을 덧대어 보았다. 그날은 갑자기 벌어졌다. 아침에 황궁으로 갔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이 바쁜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고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미안하구나. 아버지께서 지금 큰일에 휘말리신 것 같아.’
블란쳇 공작가는 명예로운 가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공작가로서 권세가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잘 교류하던 귀족 가문들도 은밀히 퍼지기 시작한 괴이한 소문에 휘말려 그들을 외면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네 아버지와 함께 돌아올게. 그동안 릴리를 부탁해.’
결국 어머니는 가문의 기사단장과 함께 황실로 떠났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황실 기사들이었다. 리베르탄 공작가를 필두로 한 황실 기사들은 블란쳇 공작가의 고귀한 유산을 완전히 짓밟고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고, 남은 이들은 감옥으로 끌고 갔다.
‘도련님! 도망가십시오!’
집사장은 요한을 도주시키려 했지만, 요한은 울고 있는 누이를 돌보느라 도망치지 못했다. 차라리 그때 도망쳤어야 했다. 그때 도망쳐서 미래를 예정했다면, 상황은 더 쉽게 풀렸을지 모른다. 어차피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요한이 감옥에 같이 끌려갔다고 해서 바뀔 일은 아무것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요한은 울면서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는 누이를 저버리지 못했다. 누이를 매정하게 내치지 못했던 죄로 요한은 고문으로 엉망이 된 부모님을 봐야 했다. 웃으며 떠났던 아버지는 이미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태였고, 참혹한 몰골이 된 어머니는 어린 그를 끌어안으며 그를 위로하려 했다.
‘괜찮아, 요한. 엄마는 괜찮아.’
그 뒤로는 감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옥이었다. 요한이 사랑한 모든 이가 리베르탄의 손에 의해 고문당하고, 종래에는 화형당했다. 마지막으로 화형대에 끌려가던 것은 누이였다. 동생인 저보다 철이 없고 배움이 느려 늘 어리게만 느껴지던 누이였다. 누이는 빛을 잃어버린 얼굴로,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듯 소리쳤다.
‘아무것도 보지 말고, 아무것도 들으면 안 돼. 다 모르는 척해. 무조건 모르는 척해. 너는 이 자리에 없다고만 생각해. 알았지?’
그때 누이는 요한이 알던 마냥 어리숙한 소녀가 아니었다.
‘힘들어도 꼭 그렇게 해. 약속하는 거야.’
혼자 멀쩡한 요한을 원망할 법한데도 릴리는 그를 지키고자 했다. 차라리 억울하더라도 요한 역시 그때 가족과 함께 죽었으면 나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혼자만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무력하게 가족의 고통을 지켜보던 순간을 견딜 수 없었으므로. 하지만 우습게도 블란쳇 공작을 억울하게 끌어내린 그 제국의 법. 그 어처구니없는 제국의 법이 아무리 중죄라 한들 공작가의 마지막 혈족을 죽거나 영구적인 손상을 입히지는 못하게 했다. 대신 리베르탄 공작은 법의 빈틈을 이용해 모든 처벌을 요한이 목격하게 했다.
‘지옥은 이제부터란다.’
‘네가 언제까지 그 고매한 블란쳇 공작가 행세를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꾸나.’
누이는 요한이 모든 것을 잊고 살길 바랐으나, 요한은 그러지 못했다. 요한은 가족들의 지옥을 외면하는 대신 절대 잊지 못하게 두 눈에 박아 모든 것을 기억했다. 가족들이 고통에 잠겨 지르던 비명까지 억지로 되새기며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평생 잊지 못하도록,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어떻게든 갚을 수 있도록. 리베르탄의 멸망은 그랬던 어린 시절의 그가 손꼽아 기다리던 순간이다. 하지만 막상 그 복수를 마친 그가 느낀 감정은 결코 통쾌함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기대했던 것치고, 요한의 상처는 여전히 생생하기만 했다. 리베르탄의 피 웅덩이를 밟은 그의 눈 위로 순진하기만 한 그 여자가 떠올랐다.
‘공작님.’
모든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리베르탄은 반란죄로 잡혀갔고, 이제 그 여자를 가지고 놀다가 제 가족들이 당했던 것처럼 똑같이 해주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한은 그 여자가 고통에 찬 얼굴을 보는 게 그리 즐거울 것 같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 늦은 시간, 무작정 여자의 방을 찾아갔던 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품에 여자를 조롱하기 위한 화려한 조화 꽃다발을 가져갔던 것 역시 반쯤은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 여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실 이렇게 노골적인 조롱은 요한이 좋아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는 조금 더 우아하고, 교묘한 방식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는 충동적으로 행동했다. 다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조화 꽃다발을 든 여자는 남색 눈동자로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찬찬히 꽃을 살피던 여자가 환하게 웃었다.
“진짜 예뻐요.”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사교계에서 조화는, 특히 꽃술만 보석으로 만든 꽃은 고급스러운 모욕이다. 가짜라는 의미. 붉은 장미이기까지 하다면, 겉만 화려한 가짜라는 의미다.
‘설마 그 의미를 모르는 건가?’
그래도 요한은 이 여자가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대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뒀다. 모른다면 원래 계획대로 여자를 유혹하는 셈이고, 여자가 그 의미를 알아차린다면 실수로 가져온 척하면서 위로해 줄 셈이었다. 하지만 에스텔은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네, 이건 공작님께서 처음 주신 선물이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 의미를 전혀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꽃술을 확인하던 손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던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혹시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는지 요한에게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거 칭찬이죠?”
노골적인 모욕에도 그녀는 정말 기쁜 듯 웃었다.
“그러면 저도 기뻐요.”
붉은 장미를 귓가에 꽂은 여자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떤 식으로든 제가 당신이 바라는 걸 채워줬다면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어쩌면 뭔가를 알아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는 이 여자가, 요한은 왠지 모르게 안타까워졌다.
‘이 여자는 복수 대상이다.’
리베르탄의 딸인 여자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에 대한 배신이었다. 반짝이는 남색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에스텔이 갑자기 방에서 쿠키 뭉치를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갑작스럽게 나온 쿠키에 그는 당황했다.
“별건 아니지만, 쿠키라도 조금 드실래요?”
“쿠키?”
“오랫동안 계획한 일 하나를 끝냈다면서요.”
에스텔은 무슨 일인지 짐작도 못 하는 주제에 그를 축하해 주었다.
“축하드려요, 앞으로 공작님께서 하시는 일이 모두 잘되길 기도할게요.”
왜 이 여자는 이렇게 순진할까.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그에게 어쩌면 이렇게 의심 하나 하지 않을까. 그런 주제에 왜 사랑받고 자란 딸 같지도 않아 보일까.
“부인.”
요한은 충동적으로 설탕을 바른 듯 하얗게 빛나는 에스텔의 뺨에 손을 뻗었다. 보드라운 감촉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에스텔은 그의 손길이 마음에 든다는 것처럼 유순하게 뺨을 비비며 눈웃음쳤다.
‘이건…….’
누이가 가끔 잘못한 게 있을 때마다 가족들에게 하던 습관이었다. 그 사실을 느끼자마자 혐오감이 올라와야 하는데, 우습게도 전혀 거북하지 않았다. 그저 말랑말랑한 여자의 뺨이 기분 좋다는 사실이 기분 나빴다.
‘내가 이토록 나약했나?’
에스텔이 순진할수록 그의 계획은 더 완벽해질 텐데. 요한은 에스텔의 사랑스러움을 느낄수록 복수 계획에 묘한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되는데. 쿠키를 받아먹은 요한이 에스텔을 보며 사르르 눈웃음 지었다.
“하나 더 먹여줘.”
“하, 하나 더?”
“난 원래 하나 가지고는 만족 못 해.”
에스텔은 순진하게 남색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쿠키 봉지를 들고 고민하는 그 모습은 적을 앞에 둔 토끼처럼 긴장되어 있었다.
‘아마 부끄러워서 그런 거겠지?’
그녀는 매번 제 속마음을 언제나 훤히 드러낸다.
“얼른.”
요한은 제 입술을 두드리며 부탁했다. 그의 붉은 입술을 바라본 여자가 두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입안에 다시 쿠키를 조심스럽게 넣어주었다. 요한이 에스텔의 손끝까지 먹는 척하며 장난쳤다.
“부인이 준 거라 맛있네.”
에스텔은 손가락이 스치듯 그의 혀에 닿자 크게 당황하며 제 손을 숨겼다. 숨겨버린 여자의 손을 붉은 눈동자로 응시하며 씩 웃었다.
“부인의 손이 닿아서 그런가?”
“제 손은 먹는 게 아닌데요.”
“왜 안 되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에스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인간을 먹는 건 안 되니까요?”
“부인은 내 거잖아. 내 걸 먹는다는 게 문제인가?”
“아무리 그래도 사회 통념상…….”
순진한 여자의 응시에 요한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여자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알았어. 부인이 원할 때까지는 얌전히 있을게.”
나직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여주자, 에스텔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그런 여자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요한 블란쳇. 네 죽은 가족들을 생각해.’
이 고민은 이 여자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단지, 처음 구상했던 것과 달리 의심스러운 부분이 생겨서. 가족들에 대한 복수를 보다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대신 내일 저녁, 블란쳇 공작가에서 가신들과 만찬이 있어.”
“굉장히 중요한 자리가 되겠네요.”
에스텔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부인으로서 꼭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아니. 그 반대.”
요한이 흔들리는 에스텔의 남색 눈동자를 보며 자상하게 입을 열었다.
“부인은 그 자리에 오지 마.”
*** 솔직히 요한의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왜 나한테 오지 말라는 거지?’
나한테 그 저녁 만찬에 꼭 가야 할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그 저녁 만찬은 여태 있었던 일과 달리 원작에서 나왔던 사건이었다.
‘내가 빠지면 안 될 텐데.’
리베르탄이 반역죄로 몰락하게 된 뒤 블란쳇 공작가를 도왔던 가신들을 모아 가볍게 축하한다는 빌미로 나를 초대해 모욕해 주는 사건. 사람들의 냉대로 의기소침해진 나는 요한에게 더 의존적이게 된다.
“어째서요?”
나는 그의 말에 무척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제가 참석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아직 리베르탄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부인이 참석하기에는 힘들 것 같아서.”
요한이 서늘한 눈매를 휘며 나른하게 웃었다.
“물론 혼자서 부인을 독점하고 싶어서 그렇기도 하고.”
그가 천천히 내 손을 붙잡았다. 붙잡은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춘 요한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사람을 묘하게 숨 막히게 하는 압박감이 있었다.
“내 부인은 나만 봐도 상관없잖아.”
*** 다음 날 아침, 에리히는 요한의 부름에 따라 집무실에 도착했다. 요한은 보석함을 열어 보석을 살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여자가 좋아할 법한 장신구용 보석들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주인님께서는 여자 장신구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물론 요한이 여자의 선물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원래 요한은 언제나 목적에 맞는 물건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목적에 필요 없는 물건을 보는 일 같은 건 없단 의미였다.
‘최근에는 여자 장신구를 볼 일이 없는데.’
특히 요한은 여자 장신구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에리히가 요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여자에게 선물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여자?”
“……그 가짜 말입니다.”
보석함 속 여자 장신구를 잠깐 들여다본 요한이 보석함을 덮었다.
“아니. 부인한테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깔끔한 움직임. 그러나 에리히의 눈에는 요한의 미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확실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요한의 태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다시 보석함에 시선을 둔 요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너를 부른 건, 부인이 만찬회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
에리히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 여자가 참석하고 싶지 않다고 한 겁니까? 명색이 스스로를 공작 부인이라고 알고 있는 여자가 어찌…….”
가신들과의 만찬은 안주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거절하다니. 에리히는 그 여자의 무식함이 황당했다.
“아니. 내가 참석하지 말라고 한 거다.”
“주인님께서 말입니까?”
“그래. 아직 리베르탄에서 온 지 얼마 안 돼 불안정한 여자다.”
딱 잘라서 얘기했던 요한이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적대적인 가신들을 만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러시군요.”
분명 더 완벽한 계획을 위한 지시다. 완벽주의자인 요한이라면 충분히 할 법한 명령이었다. 하지만 에리히는 그 말이 이렇게 들렸다.
‘그 여자가 괜히 가신들에게 상처받을까 봐 아예 만나지 않게 하려고 한다.’
불현듯 에리히의 머릿속에 서재에서 만난 에스텔의 얼굴이 떠올랐다. 햇살이 비치는 공기 속으로 금방이라도 녹아서 사라질 것만 같던 청초한 여자.
‘설마 주인님께서 그 여자 때문에…….’
하지만 에스텔의 등장 이후 묘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맞았다. 그때 요한의 집무실이 급히 열리며 안으로 블란쳇 기사단장이 등장했다.
“주인님. 황실 옥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일이지?”
“리베르탄 공작이 진실을 토로하겠다고 합니다. 대신 조건을 하나 걸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에리히가 눈살을 찌푸렸다.
‘감히 조건을?’
손깍지를 낀 기사단장을 보던 요한이 느긋하게 입매를 틀어 올렸다.
“그 조건이 뭐지?”
“마지막으로 에스텔 양을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