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왜 아픈 걸 숨기지?2021.12.14.
요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긴 하죠.”
“부인은 나한테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지 않았어?”
요한은 눈썹을 슬며시 내리며 서운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직한 목소리에서는 왠지 상처받은 것 같은 느낌도 났다.
“이렇게 티 나게 밀어내면 좀 섭섭한데.”
누가 들으면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줄 알 것 같다.
‘내가 언제 밀어냈어!’
뭔가 내 안에서 억울한 부분이 생기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요한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따질 만한 말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그런 의미로 한 건 아닌데.’
요한의 잘생긴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팔만 뻗으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거리다.
“괜히 사람 기대시켜 놓고, 발을 빼는 거야?”
“…….”
“아주 못됐네.”
졸지에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팜므파탈이라도 되어버린 기분이다. 정작 나를 유혹해서 버리려는 사람은 본인이면서!
“무슨 소리예요. 발 뺀 적 없는데요.”
“그러면 내 말에 인정을 못 하시겠다?”
“조금 억울한 부분이 있다는 거죠.”
“그러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거야?”
그때 입술 끝을 부드럽게 당겨 웃은 요한이 단단한 손가락으로 내 앞머리를 뒤로 정리해 주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건…….”
내 어색한 대답에 그가 사르르 눈웃음 지으며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해 왔다. 붉은빛이 도는 모양 좋은 입술 역시 천천히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그러자 그가 청량한 웃음소리를 내며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콩 부딪쳤다.
“이제 좀 긴장이 풀리지?”
“……네?”
“일부러 장난 좀 쳐봤어.”
요한은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큰 손으로 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괜히 부담감 때문에 계속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면 안 되는데 맥이 탁 풀려서 그의 말 한마디마다 휘둘려서 긴장하던 게 허탈해졌다. 그러다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다 흑막의 노림수야.’
하지만 자꾸 경계심이 흐물흐물해졌다. 눈꼬리를 접으며 웃음을 터뜨린 요한의 얼굴이, 방금까지 능숙하게 나를 다루던 어른 남자보다는 장난스러운 소년처럼 보여서였다.
“그게 뭐예요.”
“나랑 하는 대화는 벌써 편해진 것 같은데.”
“원래부터 대화하는 건 그리 힘들지 않았는데요.”
“그러면 내가 괜한 장난을 친 걸로 하지 뭐.”
능글맞은 요한의 말을 듣고 있는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흑막을 의식하다가 열감이 오른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방금 전 엘레온 열매를 먹은 부작용이 지금 올라오려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요한의 앞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큰일 나.’
상대는 똑똑한 흑막이다. 사소한 단서로도 내가 리베르탄에서 사랑받지 못한 딸이라는 사실을 추론해 낼지도 모른다.
‘바로 죽을 수도 있어.’
내가 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복수 대상으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리베르탄이 사랑하던 딸에게 처절한 죽음을 주어 더 큰 고통을 안겨줄 생각이니까. 그러니 반대로 사랑받지 못한 나는 계속 살려둘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나는 도망치기 전까지 더 밉보이면 안 되는 상황이야.’
최소한 아무것도 못 할 정도로 내 행동반경이 줄어드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내 아픈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더 경멸했다.
‘아무리 친딸 대신이라지만 리베르탄 공작님께서는 왜 이런 걸 저택에 계속 놔두고 계신 걸까요? 솔직히 손만 많이 가고 공작가에 피해만 끼치는걸요.’
‘리베르탄 공작님의 동정을 사기 위해서 일부러 더 아픈 척하는 거겠죠.’
원래도 나를 증오하던 흑막이라면, 아프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못 하게 더 철저히 감금시킬지도 몰랐다.
“네네, 못된 부인인 저는 이만 자야겠어요.”
조금 어색할지라도 요한을 방 밖으로 보내려 애썼다. 다행히 요한은 순순히 내 손에 움직여 주었다.
“원래 이렇게 일찍 자?”
“평소에 자는 것보다 더 늦게 자는 건데요?”
“내 장난 때문에 기분 상해서 그러는 건 아니고?”
문 앞에 선 요한의 질문에 깔끔하게 대답해 주었다.
“전혀요.”
“그런 거면 됐어.”
더 심하게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금 있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비틀거릴 것 같다. 막 돌아서려는 내 얼굴을 요한이 붙잡았다. 순간 나는 그가 머리에 오른 열기를 눈치챌까 겁났다.
“잘 자, 부인.”
하지만 그는 느른히 웃으며 내 앞머리를 쓸어준 뒤 떠났다. *** 요한은 떠나지 않고 방문에 등을 대고 섰다. 에스텔을 흔들어보려고 찾아온 건데, 반대로 의문만 더 커졌다.
‘열이 있었지.’
일부러 앞머리를 쓸어주며 이마를 대보자, 확실한 열감이 느껴졌다.
‘엘레온 열매 알레르기가 올라온 거겠지.’
그것 때문에 갑자기 방 밖으로 그를 내보내려 한 것일 테고. 요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태연하게 자신을 내보내던 에스텔을 떠올렸다. 일부러 머리에 열이 오른 것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열이 오른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알레르기 증상을 감추려는 이유가 뭐지?’
요한 자신의 동정을 사기 위해서라면, 실수로 들킨 척했어야 했다.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에스텔의 태도에 요한이 미간을 좁혔다. 잠깐 기다리고 있자, 쓰러져 잠든 여자의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중간중간 힘겨워하는 신음이 들리는 것을 보아 무작정 고통을 견뎌보려는 것 같았다. 요한은 소리 없이 방문을 열었다. 다시 들어간 방 안은 요한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에스텔은 이불이 자신을 보호해 줄 무언가라도 되는 양 끙끙 붙잡고 있었다. 요한은 식은땀이 흐르는 여자의 이마에 제 큰 손을 얹었다.
‘의사를 불러 달라고 하면 될 텐데.’
그는 주머니에서 에스텔을 위해서 가져온 엘레온 알레르기 약을 꺼냈다. 솔직하게 알레르기 사실을 털어놓았으면 점수를 따기 위해서 챙겨온 것이다.
‘끝까지 숨겨서 이렇게 쓰게 됐지만.’
요한은 에스텔의 입가에 물약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바로 약효가 돌기 시작하는지 흐트러졌던 에스텔의 호흡이 점점 진정되기 시작했다. 불현듯 이상한 사실을 깨달은 요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제 손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부터 지금까지. 증오스러운 리베르탄의 딸과 접촉했음에도 혐오스러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운 감촉이 기분 좋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 평소와 다르게 몸이 무척 개운했다. 오랜만에 몸이 개운한 느낌에 기지개를 켰다.
‘자는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가?’
원래 엘레온 열매를 먹으면 최소한 낮까지는 무척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 상태는 어제 엘레온 열매가 아니라 무슨 보약이라도 먹은 것 같았다.
‘아니면 엘레온 열매 알레르기가 좀 나아진 걸 수도 있고.’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병이 완화되는 일도 있지 않은가. 일어나자마자 검은 커튼을 쳐서 오전의 햇살을 만끽하는 도중, 베티가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잘 주무셨습니까?”
“응. 침실이 아주 좋아서 잘 잤어.”
침대가 좋다는 내 말에 베티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아무래도 이 어두컴컴한 침실이 좋다는 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 그러시군요. 마님의 수준에 맞는 방을 준비해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무척 다행이에요.”
“내 수준이라니.”
이 침대, 보기와 다르게 알레르기 증상도 완화될 만큼 아주 좋은 침대란다.
‘침대 때문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처음 자게 된 침대가 몸에 잘 맞는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좋은 침대에서 잔 건 처음인걸.”
원작에서 블란쳇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충성심 높은 사람들뿐이었다. 그래서 모두 합심하여 나를 곤경에 몰아넣고는 했다.
‘블란쳇 공작가를 칭찬해 주는 게 좋겠지?’
자고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칭찬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게 마련이니까.
“내가 이렇게 좋은 가문에 안주인으로 있어도 되는지 걱정될 정도로.”
“……걱정 마세요, 마님. 마님께서는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봐줘서 고마워.”
진심을 담아 활짝 웃었는데, 베티가 스치듯 슬픈 표정을 지은 것 같았다.
‘내가 잘못 봤나?’
다시 본 베티는 방금 전보다 더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긴. 블란쳇 공작가를 칭찬했는데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
“어제 미처 목욕물을 준비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미리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하신 뒤 목욕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안 그래도 조금 찝찝하던 차였다.
“좋아. 오늘 아침 메뉴는 어떤 건지 물어봐도 돼?”
*** 요한은 아침부터 바쁜 일이 있어서 나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간단히 준비된 아침을 혼자서 먹었다. 요한이 없어서인지 전보다 더 편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체리 파이 너무 맛있었다.’
다행히 오늘은 엘레온 열매 디저트가 안 나와서 더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아침부터 디저트를 먹는 건 다소 과한 식사지만, 그래도 나온 음식을 거절하는 건 요리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차를 마신 뒤 목욕하기 위해 베티의 안내를 따라 별관의 복도를 걸었다. 중앙 복도의 벽에는 검은 천이 덮여 있었다. 액자를 덮어둔 것 같았다. 지나가던 베티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 웃는 얼굴로 물었다.
“검은 초상화들이 신기하신가요?”
“검은 초상화들?”
“예. 블란쳇 공작가에서는 잊어서는 안 되는 이들의 초상화를 걸어두어 오래 기억하는 전통이 있거든요. 블란쳇만의 전통이라 낯서실 만해요.”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처음 듣는 얘기가 아니었다.
‘원작에서 내가 이 검은 천 뒤의 초상화를 보고 겁에 질렸지?’
검은 천 초상화는 잊어서는 안 되는 이들이라고 할 만큼 블란쳇에서 오랫동안 충성했던 가신들의 초상화였다. 특이한 부분이 있다면, 일반적인 초상화와 달리 아주 무섭고 기괴하게 그려놓는다는 점이다.
‘죽어서도 블란쳇을 지키고자 했던 가신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라던가.’
아무튼 중요한 건 원작에서 내가 이 초상화를 보고 겁에 질리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는 거다.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온 입양 딸이 블란쳇 공작가의 가신들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줘서였다.
‘알았다면 그렇게 안 놀라지 않을까?’
마침 베티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검은 천 뒤의 초상화가 궁금하신가요?”
“내가 봐도 되는 걸까?”
“당연하지요. 마님께서는 블란쳇 공작 부인이시잖아요.”
베티가 검은 천을 확 치워주었다.
‘그렇게까지 놀랄 만한 건 아닌데?’
이미 알고 봐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적당히 개성파 그림으로 봐줄 만한 초상화였다. 베티는 다른 초상화들도 보여주었다. 그중 초상화 아래에 적힌 이름 하나가 무척 낯익었다.
‘렉시어스 폴만?’
왜 그렇게 낯이 익은지 모르겠다. 소설에서 읽었었나? 그때 베티의 조심스러운 질문이 들려왔다. 기다렸던 질문이다.
“마님 눈에는 이 초상화들이 무섭지 않으세요?”
“블란쳇 공작가에서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분들인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별로 무섭지가 않네.”
“…….”
“그저 감사한 마음이 들 뿐이야.”
나는 생긋 웃으며 초상화를 봤을 때부터 준비했던 말을 마쳤다.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고 있던 베티가 기쁜 듯 웃었다.
“마님께서는 참 다정한 분이시네요. 공작가의 다른 분들께서 들으면 무척 기뻐하시겠어요.”
“좋게 말해줘서 고마워.”
어쩐지 처음 만날 때와는 베티의 반응이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
‘좋은 모습 보인 게 효과가 있었으려나?’
물론 그래 봐야 베티가 요한의 첩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사용인을 아끼는 공작 부인인 척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도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어.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도, 뭔가를 잘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거든.”
“…….”
“그러니 베티도 언제든 나를 모시고 싶지 않으면 얘기해. 충분히 이해하니까.”
그러다 모시는 사용인이 사라지면 도주하기 편할지도 모른다. 베티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아꼈다.
‘뭐라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긴 하지.’
욕실은 복도에서 돌아 도착한 방 근처에 있었다. 별관이라지만 욕실이 따로 있을 정도로 아주 큰 곳다웠다.
“여기가 바로 마님께서 쓰실 욕실입니다.”
욕실은 내 생각보다 훨씬 호사스러웠다. 목욕물은 따끈따끈 데워져서 바로 씻기만 해도 될 것 같다.
“그러면 시중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옷을 벗어주시겠어요?”
베티가 익숙한 듯 손을 내밀었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리베르탄에서도 혼자 씻었던 나는 이 상황이 조금 어색했다. 물론 감추고 싶은 게 있기도 했지만.
“혼자 씻으면 안 될까?”
“……목욕 시중 없이요?”
베티의 갈색 눈동자에 의문스러움이 가득했다.
“마님. 혹시 제가 불편하신 거라면 다른 하녀를…….”
“그런 건 아니야. 그저…… 부끄러워서 그래.”
“그래도 블란쳇 공작가의 마님이신데 목욕 시중을 안 할 수는 없어요.”
베티는 아주 완강해 보였다. 저번에 옷 갈아입을 때는 괜찮아 보이더니.
‘설마 요한이 목욕하면서 날 감시하라고 했나?’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다. 억지로 피하다가 더 큰 의심을 사면 안 되니까.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목욕 시중을 받도록 할게.”
결국 나는 베티의 시중을 받아 옷을 벗었다. 내 옷을 받아 들던 베티가 헛숨을 삼키며, 드레스를 떨어뜨렸다.
“마님. 이건…….”
그녀의 시선이 내 몸에 있는 흉터에 꽂혀 있었다.
‘이래서 숨기고 싶었는데.’
이건 내 아주 오래된 흉터였다. 아마 사정을 모른다면 보고 꽤 놀랄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