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왜 침대 위에 이 남자가2021.12.10.
손목이 붙잡힌 몸이 움츠러들었다. 요한의 진득한 시선이 내 눈과 코, 입을 느릿하게 와닿았다가 이윽고 다시 눈으로 돌아왔다. 딱딱하게 긴장한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예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닦지 마.”
“네……?”
“지금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요한이 천천히 다리를 굽혀 앉아 있던 나와 시선을 맞췄다.
“몸에 안 맞는 음식이라도 있었어?”
불현듯 느껴지는 현실감에 긴장이 풀렸다.
‘아, 여기는 리베르탄이 아니구나.’
리베르탄에서의 강압적인 교육 때문에 잠시 이성을 잃었던 모양이다. 이래서 몸에 밴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그제야 머릿속에 차가운 이성이 돌아왔다.
‘하긴. 이 남자가 리베르탄처럼 말할 리가 없는데.’
요한이 리베르탄 공작 부부와 달리 굉장히 이해심 많은 사람이어서는 아니었다. 그는 내게 복수하기 위해서 나를 유혹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윽박지르듯 화를 낼 리는 없지 않은가.
“첫날부터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미안해요.”
잠시 말을 고르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피곤할 때면, 몇몇 음식이 몸에 안 맞고는 하거든요. 하필 오늘이 그런 날이었나 봐요.”
“평소에도 자주 그래?”
“자주 이렇지는 않고,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 같아요.”
길쭉한 남자의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다가 가볍게 귓가를 스쳤다. 닿은 듯 헷갈리게 하는 은근한 접촉이 묘한 열감을 자아냈다.
‘왜 그렇게 속았는지 알겠는걸.’
요한의 태도만 보면, 가지고 놀다가 버릴 가짜 부인을 대하는 태도 같지 않았다. 그가 얼굴을 가까이하자, 몸이 바싹 긴장되었다. 요한이 나른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니까 음식에는 문제가 없다?”
“네. 오히려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는걸요.”
지금 나는 무엇을 해도 조심해야 하는 상태였다.
‘아무 잘못도 안 한 공작저 요리사에게 피해가 가게 하기도 그런데.’
솔직히 결혼하러 오자마자 저택 사용인에게 피해 끼친 공작 부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블란쳇 공작가엔 나를 싫어할 이유만 가득한 사람들뿐인데.
‘적당히 넘어갈 좋은 방법이 없을까.’
나는 배시시 웃으며 옆에 있던 다른 포크로 먹고 있던 엘레온 열매 케이크를 살짝 잘라 요한에게 내밀었다.
“한번 먹어보세요. 정말 맛있어요.”
묘하게 형언할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던 요한은 천천히 입을 벌려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괜찮네.”
“그쵸, 맛있죠.”
내가 만든 케이크도 아닌데 뿌듯해져서 활짝 웃어버렸다. *** 저녁 식사를 마친 에스텔이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 어쩐지 그녀는 그에게 케이크를 먹인 것 자체로 무척 기쁜 것 같았다.
“그러면 이제 돌아갈게요.”
막 문까지 걸어갔던 에스텔은 분홍색 리본을 휘날리며 쪼르르 그의 앞으로 돌아왔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망설이던 에스텔이 흰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말했다.
“오늘 저녁 식사 좋았어요. 다음에도 같이 저녁 먹어요.”
요한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떠나던 에스텔의 얼굴을 계속 생각했다. 잠깐 에스텔이 남기고 간 케이크를 보던 요한이 남은 케이크의 생크림을 살짝 찍어 핥았다. 더도 덜도 말고 달콤한 생크림 맛이다.
‘이 맛이 아닌데.’
그 짧은 사이에 맛이 달라졌을 리도 없건만, 에스텔이 줬을 때완 다르게 느껴졌다.
‘착각이겠지.’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죄, 죄송해요. 제가…….’
하얗게 겁에 질린 얼굴, 미약한 두려움이 서려 있던 목소리. 급히 흰 손수건으로 드레스에 묻은 생크림을 닦던 손은 언뜻 절박함마저도 느껴졌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거지?’
솔직히 그 케이크를 먹을 때부터 이상했다. 리베르탄 공작가의 가족들이 모두 즐겨 먹었다는 엘레온 열매 케이크. 분명 첩자들은 입양아인 에스텔 역시도 그 케이크를 즐겨 먹어 항상 가족 식사에 나오던 것이라 했다. 이번 저녁에 그 케이크가 디저트로 나온 것도 그래서였다.
‘즐겨 먹던 케이크가 있으면 마음이 편해질 테니.’
그러나 막상 그 케이크를 받은 에스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반응은 집에서 자주 먹던 디저트를 보는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게 사랑받은 딸이 할 법한 반응인가?’
특히 몸이 좋지 않다고 말했을 때는 더 그랬다. 일반적인 귀족 영애라면 음식을 내온 책임자에게 사과를 받았을 거다.
‘네. 오히려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는걸요.’
하지만 에스텔은 공작가의 요리사나 누군가에게 사과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칭찬하고 잘 넘어가려고 애썼다.
‘이해가 안 돼.’
집무실에 앉아 다시 한번 첩자들의 보고를 읽어보던 요한은 에리히에게 물었다.
“에리히. 이 정보들은 정말 사실이겠지?”
“리베르탄에 투입된 첩자들의 보고서군요.”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에스텔을 워낙 아껴서 웬만큼 신뢰를 쌓지 않은 사용인이 아니면 아예 접근하지도 못하게 함.]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급격히 큰돈을 몰래 쓴 이유는 에스텔 리베르탄 때문인 것으로 추정.] [매년 에스텔의 1년 품위 유지비가 리베르탄 공작 부인보다 더 큰 것을 확인.] [단란한 가족 식사를 위해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언제나 에스텔이 가장 좋아하는 엘레온 열매 케이크를 나눠 먹음.]
“예. 모두 몇 번이고 확인을 거친 사실입니다.”
원래 리베르탄 공작가는 부유한 공작가였다. 비옥한 토지에 언제나 큰 이윤을 내주는 보석 광산들까지. 그런 리베르탄 공작가가 갑자기 무너지게 된 것은 비단 요한의 함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부유하던 리베르탄 공작가의 자금이 완전히 메말라 있었다. 그리고 그 출처는 신전의 과도한 기부금 때문이었다. 블란쳇 공작가에게 말도 안 되는 누명을 뒤집어씌울 때 신전의 힘이 컸기에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에리히는 안경을 고쳐 쓰며 요한에게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을 품으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내 부인의 행동이 이상해서.”
“이상하다니요?”
“아무래도 엘레온 열매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 같다.”
엘레온 열매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특히 증상 자체도 일반적인 알레르기 증상과 달랐다. 처음에는 갑자기 힘이 빠진 듯 보이다가 나중에 열이 올라 아프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은 가벼운 열병이라고 오해하기 쉬운 병이다. 요한이 엘레온 열매 알레르기에 대해서 알았던 이유도, 어린 시절 그의 유모가 엘레온 알레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본인이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건가?’
어쩌면 그의 부인으로 최선을 다하겠답시고 과한 의욕으로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일반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그때 에리히가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그렇다면 본인이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케이크를 다 먹었단 겁니까?”
“아마도.”
“그것참 멍청한 수작이군요.”
에리히는 당장 눈앞에 에스텔이 있는 것처럼 비웃었다.
“설마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자기를 불쌍하게 봐줄 것이라 생각한 걸까요?”
요한은 우아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그 목적은 파악할 수 없다.”
“아무래도 블란쳇 공작가에서 평소 본인이 엘레온 열매를 즐겨 먹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니 알레르기 있어도 좋아하며 먹던 열매를 가지고…….”
그 말을 들은 요한의 입매가 설핏 굳었다. 하지만 요한 본인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변화였다. 그래서 에리히는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피가 이어져 있지 않아도 리베르탄은 리베르탄인가 봅니다. 그런 수로 뭐가 달라질 것이라고 믿다니.”
“그만.”
에리히의 청회색 눈동자가 놀란 듯 요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요한은언제나 그렇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논리 없이 추측하는 것만큼 위험한 행동은 없다.”
“…….”
“어쨌거나 첩자들의 보고와 어긋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수작을 부렸든 부리지 않았든.”
“……그렇기야 합니다.”
타당한 지적에 에리히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말도 안 되는 흠잡기였다.’
에리히는 종종 리베르탄과 엮이기만 하면 이성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했다. 상대가 증오스러운 리베르탄의 딸이라 생각해서 과하게 얘기한 것 같았다.
‘역시 주인님.’
세상에 에리히보다 더 리베르탄을 증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요한 블란쳇일 것이다. 그런데도 요한은 증오스러운 리베르탄의 딸을 앞에 두고도 사감을 섞지 않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새삼 요한의 대단함을 실감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거짓 반역죄로 완전히 몰락했던 공작가를 다시 재건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었다.
“리베르탄 공작가가 반역죄로 처리되기 전, 첩자들에게 연락해서 사실 확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좌관인 에리히마저 떠나자 요한의 집무실은 어둑한 적막에 휩싸였다. 일할 때 한 치의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책상은 무척 깔끔했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책상이 조금 더 크게 느껴졌다.
‘한번 먹어보세요. 정말 맛있어요.’
그 순진한 목소리가 과거 잃어버렸던 가족들과의 몽글몽글한 추억이 겹쳐졌다. 요한의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요한은 보고서 위에 있는 에스텔의 초상화를 보았다. 초상화 속 그녀는 요한을 바라보듯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에스텔 리베르탄이라.”
길쭉한 손가락이 미소 짓고 있는 여자의 입가를 건드렸다. 불확실 요소가 많다면, 직접 하나씩 제거하면 그만이다. 솔직한 반응이 나올 때까지 흔들어버리면 된다.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많으니까. *** 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편하게 누웠다.
‘이 방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솔직히 내가 받은 방은 그리 좋은 방은 아니었다. 가구 같은 게 별로라기보다는, 가구와 커튼이 온통 검은색이라 사람을 좀 으스스하게 만드는 분위기 같은 게 있었다.
‘그래도 내 공간이 있어서 너무 좋다.’
리베르탄에서는 내 방이라는 게 아예 없었다. 귀족 영애로 입양되었던 만큼 개인 방은 있었지만, 그건 내 방이 아니었다. 애초에 혼자서 잘 수 있는 방도 아니고, 근처에 감시하는 것처럼 사용인들이 항상 붙어 있었다.
‘내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가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트집 잡기도 해서 제대로 못 잤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혼자만 남은 이 고요함이 휴식처럼 느껴졌다.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던 나는 베개를 끌어안았다.
‘오늘 나 잘한 거겠지?’
특별히 점수를 따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크게 실수한 것 같지는 않았다. 포크를 떨어뜨려서 실수하긴 했지만 적당히 잘 수습했다.
‘앞으로 이렇게 조금씩 더 노력하자.’
내 상황만 보면 여전히 답이 없지만, 리베르탄 공작가에서보다는 나아서 마음은 더 편했다. 똑똑.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티?”
하지만 내 방으로 들어온 것은 요한이었다. 원작에서 웬만한 일이 아니면 거의 찾아오지 않던 남자. 애초에 직접 나서서 하는 건 흑막인 요한의 취향이 아니기도 했고.
‘도대체 무슨 일로 온 거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몸을 일으켜 세워 그를 바라보았다. 요한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갑자기 와서 불편해?”
단추 윗단이 살짝 풀려 있는 가벼운 차림새가 그의 권태로운 분위기를 더 잘 살려주었다. 그의 눈빛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괜찮아요.”
하지만 조금 놀란 게 아니라 아주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아무래도 괜찮은 척하기보다는 당황한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그런데 공작님께서 제 방에는 어쩐 일이세요?”
“부인이 온 첫날이니까.”
요한은 무척 걱정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불편한 일은 없었어?”
“네. 다 괜찮았어요.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고맙긴. 남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실제로는 혼인 신고조차 하지 않은 사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금방 넘어갈 만큼 다정한 목소리였다. 다가온 요한이 침대에 걸터앉아 달콤하게 웃었다. 냉미남이 웃을 때마다 부드러워지는 그 간극에 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요한이 침대에 몸을 느긋하게 기댔다. 나도 모르게 놀라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제 침대에는 왜…….”
“갑자기라니?”
요한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부부는 같은 방을 쓰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기는 하지만 여긴 제 방이라고 들어서요.”
“맞아, 부인 방이지.”
요한이 나를 보며 픽 웃었다.
“부인의 방을 함께 쓰면 안 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잖아?”
요한의 등장으로 침실엔 포근함 대신 긴장감이 가득했다. 내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머리에 열감이 오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