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어떤 여자였습니까?2021.12.07.
원작에서 베티는 내가 흑막의 함정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조연이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내 모든 게 흑막의 귀에 들어간다는 거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어.’
사생활이 노출될 걸 두려워했다간 흑막의 신뢰를 살 수 없다. 오히려 의심만 더 부추기게 될 거다.
‘게다가 베티가 특별히 나쁜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이 들어왔어도 같았을 거다. 내 주변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은 요한처럼 리베르탄에 큰 원한을 가진 사람들뿐이니까.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 썼다간 피곤해서 죽을 거야.’
불현듯 상처가 있는 베티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다 다친 거지?’
내 시선이 닿자마자 베티는 손을 뒤로 숨겼다.
“제 불찰로 다친 상처입니다.”
“그래도 아팠겠다.”
“괜찮습니다. 마님을 모시는 일에는 문제없습니다.”
아플 것 같은데. 하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데 내가 더 나서기도 그랬다.
“그러면 일이 끝나면 꼭 치료하러 가.”
“예, 알겠습니다.”
“약속하는 거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인 베티가 입을 열었다.
“갈아입으실 옷을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제야 급하게 구색을 맞추느라 입고 있던 웨딩드레스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부탁할게.”
베티는 금세 저택에서 입고 생활하기에 편한 드레스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블란쳇에서 준비해 본 의상들입니다. 마님의 안목에 찰지는 모르겠으나, 불편하신 부분이 있다면 앞으로 반영하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충분히 마음에 드는걸.”
“그러면 다음에 의상 디자이너가 올 때까지 비슷한 디자인으로 준비하겠습니다.”
흑막이 처음으로 보낸 하녀답게 태도가 무척 예의 바르고 정중했다. 어디 교본에 실어도 될 정도로 모범적이었다.
“그러면 옷 시중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아.”
자연스럽게 다가서는 베티의 손짓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입는 건 혼자서 하고 싶은데.”
“예?”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시중을 받는 게 어색해서.”
베티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 고민하던 베티는 ‘알겠습니다. 다 갈아입으시면 저를 불러주세요’ 하며 정중하게 물러섰다. 나는 베티가 완전히 문을 닫는 것을 보고서야 옷을 갈아입었다.
‘계속 혼자 갈아입을 수는 없겠지만.’
벌써부터 불편할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옷을 갈아입은 나는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정돈했다. 창밖을 보니 슬슬 저녁때가 되었다.
‘원작에서는 한동안 혼자 있었지?’
리베르탄 공작가가 반역죄로 몰락할 때까지는 남편과 거의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행동해야 해.’
원래 사람은 계속 얼굴을 보다 보면 정이 좀 들게 마련이다. 까딱 잘못하면 원한을 더 키울 수도 있지만.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의외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밖에서 문을 두드린 베티가 말했다.
“마님. 주인님께서 곧 있을 저녁 만찬에 마님과 함께 식사하고 싶으시다고 하십니다.”
*** 블란쳇 공작의 집무실. 요한은 무심한 시선으로 책상 위에 올려놓은 리베르탄 공작가의 백합 문양을 바라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머릿속에 그 여자가 맴돌았다. 은은한 불빛 아래서 연분홍색이 비쳐 달콤하게 물들던 백금발, 리베르탄과는 뭔가 다른 남색 눈동자, 그를 보며 사르르 미소 짓던 눈웃음.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결혼한 만큼 최선을 다하겠어요.’
이상하게도 그는 그 말도 안 되는 순수함이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리베르탄에서 사랑받고 자라서 그런 것일 텐데.’
노력만 하면 좋은 부부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 그 멍청한 소리가 제법 귀엽게 들려서일까.
‘눈도 무슨 토끼처럼 떠서는.’
꽉 쥐면 부러질 것처럼 연약하고 가냘픈 여자를 떠올리던 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할수록 묘하게 거슬리는 감각이 들었다.
“주인님. 이제 끝났습니다.”
보좌관 에리히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조만간 리베르탄 공작가는 완전히 몰락할 겁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억지로 씌웠던 반역죄를 그대로 돌려받은 채로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요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단언했다.
“기쁜 마음은 이해하지만, 방심은 화를 부르게 마련이다. 일이 끝날 때까지는 신중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에리히는 백합 문양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그 여자가 블란쳇 공작가에 들어왔겠군요.”
에스텔 리베르탄. 온갖 악소문을 달고 있는 리베르탄 공작가의 입양아. 리베르탄 공작가에 큰 원한을 가지고 있는 에리히는 아주 당연하게도 그 여자를 싫어했다.
‘괜히 그런 소문이 났을 리는 없으니까.’
아무리 소문이라 한들 정말 아무것도 없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두 번이나 약혼자에게 파혼을 당했다거나, 사용인들에게 함부로 대한다는 소문 같은 일들은 더욱 그러했다.
“주인님께서 보시기엔 어떤 여자였습니까?”
다시 한번 제 부인을 떠올린 요한이 픽 웃었다.
“가벼운 유흥거리 정도는 되겠더군.”
“그 정도 쓸모는 있어서 다행입니다. 계획에는 차질이 없겠어요.”
그때 베티가 에스텔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요한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주인님. 마님께 저녁 식사 소식을 전하고 왔어요.”
“그래, 잘했다.”
요한은 다리를 꼰 채 우아한 자세로 베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인의 시선을 느낀 베티가 바짝 긴장했다.
‘무서워.’
베티는 꽤 오랜 시간 요한을 지켜봐 온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베티는 점점 제 주인이 두려워졌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는 악마였으니까. 피와 죽음에 익숙한 베티조차도 언뜻 드러나는 그의 잔혹성에 흠칫 놀라고는 했다.
‘마님께서는 어쩌다 리베르탄에 입양되셔서…….’
베티는 자신도 모르게 방금 만나고 온 에스텔을 동정했다. 요한의 눈에 띈 이상 그녀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요한이 숨 막히도록 고요하고 서늘한 눈빛으로 베티를 바라보았다.
“내 부인을 만나고 온 소감이 어떤가?”
“새로 오신 마님께선…… 좋은 분이셨어요.”
망설이던 베티의 머릿속에 에스텔의 상냥한 미소가 떠올랐다. 솔직히 처음 에스텔을 본 순간, 베티는 에스텔을 둘러싼 수많은 악소문에도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파양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정말 아름다운 분이셨지.’
은은한 미소를 지으실 때마다 나풀거리던 길고 흰 속눈썹은 동화 속 요정처럼 신비롭고 몽환적이었다.
“악녀라던 소문과 다르게 처음 보는 저한테 무척 다정하게 대해주셨습니다.”
별것도 아닌 제 상처를 바라보던 그 눈빛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자신의 수발을 드는 아랫사람이다. 의외로 많은 귀부인이 보잘것없는 하녀에게 제 저열한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에스텔의 하녀로 임명되기 전까지 여러 귀족가에 첩자로 투입되었던 베티였기에 그 걱정이 보다 크게 다가왔다.
“빚 대신에 팔려왔으니 자중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에리히가 코웃음을 쳤다.
“얼마 못 가서 제 본색을 드러낼 겁니다.”
요한의 한쪽 입꼬리가 조소가 올라왔다.
“수상한 점은 없었나?”
“수상한 점까지는 아니지만…….”
웬만하면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던 베티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옷을 혼자 갈아입고 싶어 하셨습니다.”
요한은 미세하게 턱 끝을 들어 올리며 대답을 종용했다.
“블란쳇 공작가에 처음 왔던 데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시중받는 게 불편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뭔가를 숨기는 것 같지는 않았나?”
“예. 애초에 뭔가를 숨길 수 있는 드레스가 아니었습니다. 갈아입으신 뒤에도 확인했고요.”
많은 귀족을 돌보고 오던 베티의 눈은 신뢰할 만했다. 요한이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사소한 것 하나 빼놓지 않고 주시하도록.”
보고를 마친 베티는 주인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펼친 손 위로 에스텔이 걱정해 주었던 상처가 보였다.
‘일을 마치자마자 상처를 치료하기로 약속했지.’
의무실을 향해 걸어가려던 베티를 에리히가 붙잡았다.
“베티. 이상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에리히가 흐린 청회색 눈동자로 매섭게 베티를 노려보았다.
“함부로 그 여자 동정하지 마.”
“…….”
“어차피 정식으로 혼인 신고도 하지 않은 가짜다. 복수를 위해 사용하고 나면 버릴 용도라고. 괜히 동정했다간 너만 힘들어져.”
에리히의 말은 틀린 게 없다. 요한 주인님은 결코 계획을 바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동정한다 한들, 베티 자신만 힘들어질 뿐이었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손으로 상처를 감싼 베티가 입술을 깨물었다.
*** 나는 거울을 보며 머리에 묶은 분홍색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리본을 하지 않는 게 나을까?’
내 나름대로는 꽤 중요한 결정이었다. 내가 조금 더 외모에 신경 쓴다고 해서 흑막이 크게 달라질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면 나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리본 모양을 결정한 뒤 식사 장소로 향했다.
‘와, 예쁘다.’
식사 장소는 아주 화려했다. 오늘 꺾어서 장식한 것처럼 싱그러운 장미와 은은하게 흔들리는 촛불이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아직 없네.’
맞은편에는 요한 몫으로 놓인 은식기가 있었다.
‘원작대로 안 올까?’
때마침 급히 들어온 하인이 내게 요한의 말을 전했다.
“안녕하십니까, 마님. 주인님께서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식사에 늦으실 것 같다 하셨습니다. 주인님께서 언제 돌아오실지 알 수 없으니 먼저 식사를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 더 기다려 봐야 오지도 않을 텐데 뭐.
“알았어. 대신 공작님께 아무리 일이 바쁘셔도 식사는 꼭 챙겨드시라고 전해줘.”
“예.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블란쳇 공작가의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으로 온 날이라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다. 하나같이 손이 많이 갈 요리들뿐이었다.
‘맛있어!’
얼마나 맛있는지 그저 먹는 것만으로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특히 메인 요리로 나온 송아지 스테이크는 입에서 아주 살살 녹았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다니.’
리베르탄 공작가도 공작가답게 요리가 괜찮았지만, 블란쳇 공작가의 요리는 차원이 다른 것 같았다.
‘뭐, 거기서는 맛있어도 제대로 못 먹었겠지만.’
이제 내가 가장 기대하고 있던 디저트가 나오려고 할 즈음이었다.
“내가 많이 늦었지.”
소리 없이 열린 문 사이로 검은 정장을 입은 요한이 우아하게 걸어들어왔다. 촛불의 은근한 그림자가 남자를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아니. 존재 자체가 비현실적인 것처럼 잘생긴 건가?’
맞은편에 앉은 요한이 턱을 괸 채 내게 물었다.
“식사는 좀 어때, 입맛에 맞아?”
“네. 아주 맛있어요.”
“다행이네.”
마지막으로 디저트가 내 앞에 놓였다. 엘레온 열매를 메인으로 한 케이크였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나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필 엘레온 열매라니.’
엘레온 열매는 남왕국에서 나오는 희귀한 과일이었다. 중독적인 쓴맛 때문에 많은 귀족이 찾는 과일이었지만,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 과일이었다. 정확히는 먹을 수 없는 과일이었다. 엘레온 열매가 들어간 음식을 먹을 때마다 몸에 열이 나거나 힘이 없어졌다. 물론 죽을 정도로 심각하진 않았다.
‘왜 하필 디저트로 이 열매가 나와서.’
다른 디저트로 바꿔달라 부탁하려던 찰나, 갑자기 ‘하필’ 나온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레온 열매는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자주 나오던 디저트였기 때문이다.
‘우연이 아니야.’
요한은 흑막답게 굉장히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리베르탄 공작가 내부 정보를 다 파악할 수는 없더라도 공작저에 자주 올라가는 요리에 대한 정보쯤은 알고 있었으리라.
‘그러니까 이건…….’
고개를 들자마자 진득한 시선으로 나를 주시하는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그가 생각하던 에스텔 리베르탄이 맞는지 시험하는 거야.’
어쩌면 그가 아는 정보에, 내가 엘레온 열매 디저트를 좋아한단 얘기까지 들어가 있을 수도 있었다. 리베르탄의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듯이. 요한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아, 혼자 먹어도 되나 싶어서요.”
배시시 웃어 보인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엘레온 열매 케이크를 잘라 한 입 넣었다.
‘지금 당장은 수상해 보이면 곤란해.’
그러다 리베르탄 공작가가 몰락할 때 같이 처리될 수도 있으니까. 엘레온 열매의 미묘한 쓴맛이 혀를 강타했다. 케이크의 단맛과 어우러져 무척 깊은 맛이 났다.
‘……맛있기는 하네…….’
나도 모르게 이 열매를 처음 먹었을 때가 떠올랐다. 리베르탄 공작가에 이 열매 요리가 자주 나오던 이유, 모두가 내가 이 열매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이유. 그건 모두 예스텔라가 이 열매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너는 우리 스텔라의 대용품이야. 그런 주제에 멋대로 식사를 가려? 내 딸 흉내 내면서 호의호식해놓고, 이제 와선 그 역할도 안 하겠다고?’
‘어차피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리베르탄 공작 부부 앞에서 최대한 예스텔라인 척해야 했던 나는 엘레온 열매를 아주 자연스럽게 먹었다.
“디저트가 아주 맛있어요. 요리사한테 꼭 맛있다고 전해주세요.”
그때 포크를 쥐고 있던 내 손에 멋대로 힘이 풀렸다. 흰 원피스에 포크가 떨어져 생크림이 묻어버렸다.
‘언제나 품위를 지키라고 했을 텐데!’
반사적으로 하얗게 질린 나는 서둘러 냅킨을 쥐어 생크림을 닦았다.
“죄, 죄송해요. 제가…….”
“잠깐.”
자리에서 일어난 요한이 냅킨으로 얼룩을 닦던 내 손목을 붙잡았다. 미처 통제하지 못한 떨림이 흘러 들어갔다.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