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팔려온 신부2021.12.03.
여자가 사라졌다.
“에스텔?”
남자는 미친 사람처럼 여자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남자가 시퍼런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거짓말이다.’
여자가 그를 버리고 사라졌다. 거짓말 같던 순간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 하지만 남자는 엉망이 되어도 그녀를 찾아 헤맸다. 평소에 여자가 자주 머물던 방, 볕이 좋다며 미소 지었던 장미 정원, 그를 보며 수줍게 웃었던 둘만의 공간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만 같은데.’
이젠 생사조차 불분명하다. 만에 하나 여자가 죽었을 수도 있다는 가정에 심장이 아프게 옥죄었다. 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무표정하게 굳었다.
‘이런다고 부인이 돌아오진 않겠지.’
설령 그 여자가 죽었다 해도, 남아 있는 시체라도 잡아 와 그의 곁에 묶어두어야 했다. 어둑한 광기가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였다.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사라졌는진 알 수 없어도.’
도망친 방법이 있다면, 잡아서 가둘 방법 또한 있으리라.
‘에스텔.’
봄꽃처럼 빛나던 연분홍 백금발, 신비로운 남색 눈을 가진 사랑스러운 그의 아내.
‘결국 이렇게 됐군.’
모든 게 남자의 잘못이었다. 그 아름다운 미소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 것은.
‘하지만 그래도 네가 없으면 안 되겠다.’
밝아오는 아침에도 온 세상이 밤처럼 어두웠다. 그녀가 선물한 행복은 또 다른 지옥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남자의 선뜩한 눈빛이 결혼반지를 향했다. 우아한 백금색 링에, 짙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 남자는 여자의 푸른 눈동자를 닮은 보석을 하고자 했고, 여자는 남자의 눈동자를 닮은 붉은 보석을 원했다. 하지만 결국 결혼반지는 남자의 선택대로 정해졌다. 그렇게 이 반지는 제 손에 남은, 여자의 유일한 흔적이 되었다. 눈을 감은 남자가 경건하게 결혼반지에 입을 맞췄다. 어쩐지 아직 이 반지를 통해 여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귓가로 흐느껴 떨리던 가냘픈 목소리가 어른거렸다.
‘안녕, 요한.’
반드시 되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발목을 으스러뜨려서라도 가두고 말 것이다.
“우린 계속 함께하게 될 거야.”
남자, 요한 블란쳇은 고고하게 눈을 뜨며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자가 이따금 홀린 듯이 바라보던 미소였다.
“영원히.”
*** 에스텔은 리베르탄 공작가에 입양된 고아였다. 별 볼 일 없는 고아가 위세 높은 리베르탄 공작가에 입양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공녀 예스텔라의 죽음.’ 태양처럼 반짝이는 금발, 깊고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랑스러운 예스텔라. 사람들은 악마 같은 리베르탄 공작가에 태어난 천사를 영혼을 바쳐 사랑했다. 그래서 예스텔라가 불치병으로 짧게 생을 마감했을 때, 모두가 그 빈자리를 견디지 못했다. 비슷한 무언가라도 채워 그 지독한 상실감을 메워보려 했다. 그렇게 가장 비슷한 소녀로 선택받은 것이 바로 에스텔이었다. 푸른색 눈동자가 어린 예스텔라를 떠올려서, 운명적으로 고아원에서 마주쳤기에, 고아답지 않게 설탕 인형처럼 사랑스럽게 생겨서. 에스텔은 하나같이 애매한 이유로 공작가의 공녀로 입양되는 어마어마한 행운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게 진짜 행운이 아니라는 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든든한 부모님이 되어줄 줄 알았던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에스텔을 입양한 뒤 학대했다. 애초에 그들이 그녀를 입양한 이유는 딸을 추억하기 위한 존재가 필요해서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에스텔이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할 때마다 며칠씩 굶기거나 좁은 곳에 가둬버렸다. 학대를 숨기기 위해서인지 저택 밖으로 거의 나가지도 못하게 했고, 그건 사랑으로 좋게 포장되었다. 그렇게 리베르탄 공작가가 빚더미에 올라 망하기 전까지. *** 솔직히 나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진짜 망해버렸네.’
무리하게 사업 규모를 늘릴 때부터 짐작했지만, 나는 더 이전부터 리베르탄 공작가의 몰락을 알고 있었다.
‘책에서 봤으니까.’
몇 년 전, 벽장에 갇혀 기절해 있던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곳이 소설 속이고, 내가 책의 여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어째 인생이 너무 험난하다 싶었지.’
책 내용에 따르면, 빚더미에 앉은 리베르탄 공작가에 한줄기 구원 같은 거래가 성사된다.
‘내 결혼 하나로 모든 빚을 없애주겠다는 거래.’
하필 상대가 원수 집안인 블란쳇 공작가였지만, 어차피 아끼지도 않던 딸 하나 팔아치우는 것치곤 아주 남는 장사였다. 그렇게 블란쳇 공작과 결혼한 나는 팔린 가짜 부인이라는 것도 모른 채 흑막 남편을 짝사랑하다 배신당한다. 중간에 남주와 도망치기도 하지만 붙잡혀 잔혹하게 죽고 만다.
‘그렇게 죽을 수는 없어.’
그동안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도망치는 것도 계속 실패한 이상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신뢰를 쌓다가 도망치는 것.’
다행히 나는 흑막이 리베르탄 공작가와 원수라는 것조차 몰랐던 원작과 달리 그 배경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집사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흑막에게 팔리듯 시집가게 되는 날. *** 나는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비밀 엄수에 철저한 흑막이 내게 안대를 씌운 채 마차로 데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원작대로야.’
갑자기 나를 부른 리베르탄 공작은 내가 원하던 말을 줄줄이 해주었다.
‘이제 예스텔라를 대신해 이 집안에서 사랑받은 보답을 할 차례다.’
‘너도 은혜라는 걸 아는 인간이라면 네가 할 일이 뭔지 알 테지.’
그렇게 지금이다. 움직이던 마차가 멈추었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온 순간 눈앞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스르륵 풀렸다. 오랜 시간 안대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당장 시력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얌전히 눈을 깜빡거리고 있자, 천천히 주위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눈앞에 남자가 있었다. 일순 숨이 멎을 정도로 근사한 남자가 시야를 꽉 채웠다. 고고한 검은색 머리카락, 귀족처럼 우아하고 수려한 이목구비, 그중에서도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였다. 요한 블란쳇. 젊은 나이에 몰락한 공작가를 다시 세우고 지배자가 된 제국 최고의 신랑감.
나른함과 단정함이 공존하는 미형의 얼굴과 달리 근육으로 꽉 짜여진 듯한 몸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
“안녕, 부인.”
그가 곱게 눈웃음을 짓자, 왼쪽 볼에 깊게 보조개가 패었다. 서늘했던 얼굴이 웃자마자 소년처럼 청량해졌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지?”
“…….”
“오는 길이 무섭지는 않았어?”
나른한 목소리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한 것처럼 들렸다. 근사한 외향에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정말 여러모로 해로운 남자다.
‘저건 다 가짜야. 진정해.’
이 근사한 남자의 목적은, 원한이 풀릴 때까지 나를 가지고 놀다 완전히 망가뜨리는 거다.
‘너는 절대 도망 못 가.’
‘나처럼 네 가족들 전부 다 지옥 끝까지 고통받아야 하거든.’
원작에서 읽었던 남자의 복수를 떠올리니 미남을 본 충격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행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검은 장갑을 낀 남자의 손이 내 손을 덮었다. 큰 손은 내 손을 다 덮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몸이 긴장했다.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혹시 부인은 내가 무서운 건가?”
원작의 에스텔은 맨 처음엔 남편의 외모에 넋을 잃었다가, 저 말을 듣고 겁에 질려 결국 울어버렸다.
‘이해는 가.’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어도, 남자에게서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위협적인 맹수를 앞에 둔 것처럼 그 위압감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아니요. 무섭지 않았어요.”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묘하게 가늘어지며, ‘에스텔’이 보일 반응을 관찰하는 중이니까.
‘흑막이 바라는 게 뭘까?’
흑막이 생각하는 나를 떠올렸다. 에스텔은 불치병으로 어린 나이에 죽은 리베르탄 공녀 대신 입양된 고아다. 원수인 리베르탄 공작에게 호의호식하며 행복하게 자란 축복받은 입양아. 실제로는 학대를 받았지만 그런 사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천천히 남자의 손을 붙잡고 생긋 웃었다.
“그냥 처음 만나게 되어 놀랐을 뿐이에요.”
“그래?”
“부인으로서 처음 만난 남편을 무서워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이상한가?”
나를 주시하던 남자가 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를 보자마자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거든. 사실, 부인도 그럴 만한 조건이 충분하고.”
“왜요?”
남자의 붉은 눈동자 위로 언뜻 비친 내 모습은 무해해 보였다.
“부인은 가족한테 버림받아 나한테 팔려왔잖아.”
남자가 느릿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그것도 돈 때문에.”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처럼 섬뜩한 붉은 눈동자로 내게 웃음 쳤다. 목덜미로 남자의 숨결이 번진 듯한 감각이 일었다. 털이 서고 소름이 돋았다.
“부인은 부모한테 배신감 같은 건 안 들어?”
*** 요한은 그의 새 아내를 바라보았다. 에스텔 리베르탄. 그녀는 어디까지나 복수 대상에 불과했다. 솔직히 리베르탄의 진짜 딸도 아닌 에스텔이 지은 죄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친딸처럼 생각할 만큼 아끼는 딸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이 거대한 복수에 중요한 체스 말이 되었다.
“안녕, 부인.”
크림처럼 부드러운 연분홍색 백금발, 공들여 만든 설탕 인형처럼 사랑스러운 이목구비. 살짝 겁에 질린 반응은 그가 원했던 대로였다. 그걸 위해 일부러 안대까지 씌웠으니까.
“혹시 부인은 내가 무서운 건가?”
특히 믿었던 가족에게 돈에 팔려가는 상황이다. 혼란스러움과 불안함에 휘둘리기 딱 좋은 상태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에스텔이 내놓은 대답은 조금 특이했다.
“부인으로서 처음 만난 남편을 무서워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어느샌가 겁에 질린 듯한 반응은 사라졌고, 아기 토끼처럼 맑고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신기한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묘하게 사람의 욕망을 자극했다.
“부인은 가족한테 버림받아 나한테 팔려왔잖아.”
그래서 요한은 한 번 더 자극해서 흔들어보기로 했다.
“그것도 돈 때문에.”
에스텔의 남색 눈동자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부인은 부모한테 배신감 같은 건 안 들어?”
“배신감은…… 없어요.”
백금발보다 은빛처럼 보이는 흰색의 속눈썹을 내리깐 여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아인 저를 입양해서 여태까지 키워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니까요.”
예상외면서도, 그린 듯이 모범적인 답안이다.
“이제 부모님께서 돌봐주실 나이는 지났으니, 제 의무를 다해야죠.”
“의무를 어떻게 다할 생각인데?”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결혼한 만큼 도움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어요.”
이제야 요한은 왜 그녀가 이토록 순진하게 굴 수 있는지 깨달았다.
‘역시 소문대로 곱게 자란 모양인데.’
그런 탓에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 하고, 이 결혼이 정상적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정말…….’
가지고 놀기 딱 좋아 보였다. 요한은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야릇하게 에스텔의 뺨을 감싸 쥐고, 귓가를 간질였다. 에스텔은 그것을 의식한 듯 흠칫 어깨를 떨었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그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물었다.
“부인이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닐 텐데.”
“그, 그러면.”
“그러면?”
요한은 고민하는 듯 자기도 모르게 갸웃거리는 그녀를 따라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시선을 맞추었다.
“공작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하면 좋을 것 같으세요?”
대답에서 느껴지는 순수함은 어딘가 이상하게 사람을 매혹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불현듯 그는 여자를 두고 거래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빚더미에 앉아 곤경에 처한 리베르탄 공작이 그에게 제안했다.
‘그 아이는 소문대로 예쁘니 공작의 마음에 충분히 들 걸세.’
‘분이 풀릴 때까지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네. 어차피 그 애도 리베르탄 공작가의 이름을 이은 아이 아닌가. 분명 원한이 깊을 테지.
사랑으로 길렀다는 입양아를 제물처럼 바쳤다.
‘그토록 아끼던 딸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이용 가치가 있는 건 다 써야지. 그 아이도 리베르탄 공작가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이해해 줄 걸세.’
아마 그가 자신들이 죽였던 블란쳇 가문의 장남이 아니라, 먼 친척쯤이라 여겨 감히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리베르탄은 이 여자를 버렸다. 버리다 못해 분이나 풀라며 직접 손에 쥐여주기까지 했다. 가족들에게조차 버림받아 팔리듯이 시집온 가짜. 그리고 그 말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이 가짜는 가족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있었다. 그 묘하게 헌신적인 모습이 그리운 추억을 건드려, 조롱할 마음조차 사라졌다.
‘이건 좀 이상하군.’
그는 오랫동안 이 복수의 순간만을 바라왔다. 분명 달콤한 복수를 최대한 음미해야 마땅하건만, 마음 한구석에 거슬리는 무언가가 자꾸 솟아났다.
“역시 이런 문제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인 에스텔이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최대한 공작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어쩌면 그의 생각보다 더 이 여자가 너무 순진하고 순수해서. 모두에게 버림받은 이 여자가 그의 가장 불행한 시절을 떠올리게 해서 그럴지도. 하지만 고작 그게 전부였다. 계획이 바뀔 이유는 되지 못했다. 여전히 그는 이 어리석은 여자에게 자신의 양부모가 저지른 죄를 알게 한 뒤 가장 비참하게 망가뜨릴 생각이었다. *** 흑막은 나를 저택의 방에 데려다놓고 사라졌다. 요한이 문을 닫고 나가고, 인기척이 다 사라진 걸 확인하고서야 나는 겨우 숨을 돌렸다.
‘내가 이상하게 대답한 건 없겠지?’
리베르탄 공작 부부에게 워낙 기대한 게 없어서 배신감도 없었는데. 그 부분이 수상해 보였을까 봐 괜히 걱정되었다.
‘그래도 잘 해결했잖아.’
한 가지 더 안심되는 건, 원작처럼 나는 흑막과 각방을 썼다는 점이다. 원작대로 되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밤에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똑똑.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하녀 하나가 방문을 두드리며 인사했다. 갈색 머리에 차분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하녀였다. 하지만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주인마님. 저는 오늘부터 마님을 모시기로 한 베티예요.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억났다.’
원작에서 요한의 명령에 따라 나를 배신한 하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