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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화. 행복의 종착역 (135/135)


외전 5화. 행복의 종착역
2023.07.14.



 
예리카나는 어쨌든 레니샤의 보좌관이 되었다.

이럴 날만을 기다렸다면서 환하게 웃던 그 모습이란.

약간 오싹해서 했던 말을 무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쨌든, 예리카나라는 새로운 날개를 얻었으니 앞으로 전진할 차례였다.


“예리카나, 네가 본 것을 이야기해보렴. 어디서부터 손대면 좋을 것 같니?”

“동쪽은 철도를 소화할 만한 여유가 없어요. 시작은 남쪽부터 하면 좋을 것 같아요.”

“흐음.”

레니샤가 보고서를 확인했다.

철도는 이전의 제도와 힐로샤인을 잇는 것으로 그칠 게 아니다.

철도의 건설은 사회와 문화, 그리고 경제의 발전을 가지고 온다.

일자리 창출은 물론이고 수입과 수출도 활발해지는 것이다.

레니샤는 그 효과로 히엔트리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남쪽의 자원을 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맞아요. 산업이 더 발전할 수 있을 거예요, 폐하.”

큰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사업이었다.

한동안은 철도에 집중해야 할지도 모른다.


“힐로샤인의 금고에 얼마가 축적되어 있나요, 헤일린?”

그간 검은 뱀의 비늘을 캐서 얻은 수익이 꽤 되는 걸로 알고 있었다.

한동안 바빠서 그쪽에는 손을 떼긴 했지만.


“3년간 히엔트리를 운영하실 돈은 될 겁니다.”

예상외의 답변에 레니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돈을 쌓아두기만 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헤일린의 깔끔한 대답에 레니샤가 입맛을 다셨다.


“다시 한번 생각하지만, 헤일린이 남지 않겠다는 건 너무 슬픈 것 같아요.”

“아쉬울 때 떠나야 더욱 그리워하시겠지요.”

헤일린과 레니샤가 마주 웃었다.

레니샤가 평생에 걸친 사업으로 점찍은 철도 사업이 현실화된 것은 늦여름의 일이었다.

첫 삽을 뜨던 날, 레니샤는 설렘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건 카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저 철도를 이용하면 3시간이면 베리턴을 보러 갈 수 있었다.

동상이몽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철도를 반겼다.

***



“이러다가는 우리 제국이 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황제가 제국을 가만히 두지 않고 있어요. 전통을 파괴하고, 관습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덴버스 후작, 어떻게든 해보셔야지요! 이대로라면 우리는 구시대 유물 취급이나 당할 겁니다.”

덴버스가 혀를 찼다. 다들 어쩜 이렇게 기력이 넘치는지.

덴버스는 이제 막 두 살이 되어가는 딸을 보는 재미로 살고 있었다.

저런 정치 싸움에서는 한 걸음 물러서고 싶었다.

철도가 놓이자마자 달려와서는 하는 말이란.

모순적이다.

새로운 문물이 진정으로 해를 끼친다고 생각한다면, 이용도 하지 말아야지.

덴버스 후작이 피곤한 얼굴로 혀를 찼다.

중앙의 기성 귀족들이 기차를 타고 달려온 것이다.


‘폐하께서는 귀찮은 인사들에게 길을 터주셨구만, 그래.’

덴버스 후작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은 그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걸 인정하시는 겁니까?”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로테라 공작 가는 레니샤의 손을 들 것이 분명하니, 혹시나 해서 덴버스 후작의 옆구리를 찌르는 꼴이 아니꼬웠다.

설마 덴버스 후작이 레니샤의 뒤통수를 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전 철도를 위해서 막대한 기부금을 냈습니다. 저는 여기 계신 분들처럼 철도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러분도 철도를 이용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커흠! 그런 이야기가 아니지 않소!”

전 제도에 남은 이들은 레니샤가 못 이겨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를 지지하고 국정을 돌봐야 하는 중앙 귀족 절반 정도가 빠졌으니 레니샤가 고생할 거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레니샤는 그 자리에 신진 세력을 등용했다.

상업을 통해 돈을 번 젠트리 계급도 있었고, 새로운 작위를 내리기도 했다.

레니샤는 빈자리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위기감을 느끼고 이렇게 달려온 건 여기에 있는 저 작자들이었다.

덴버스 후작이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황제 폐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어 보시지요. 그러면 가엽게 여겨주실 줄 누가 압니까.”

“지금 개국공신 가문의 핏줄인 날 욕보이는 게요!”

“시대가 변했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낡고 쓸모없는 것들은 전부 버리고 그 자리를 새로운 걸로 채워도 모자란 시간입니다.”

“덴버스 후작!”

“피곤하게 하지 말고 돌아가십시오. 오늘은 저택에 귀한 이가 올 예정이거든요. 여기서 시간 낭비 마시고 황성으로 나아가십시오!”

덴버스 후작이 축객령을 내렸다.

오늘은 오랜만에 클러그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방학 때도 잘 오지 않으면서 학기 중에 갑자기 온다는 것이다.

클러그 덴버스는 아버지의 후처가 낳은 아들이었다.

덕분에 덴버스 후작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차라리 아들이라는 편이 어울릴 것이다.


‘기운도 좋지, 노인네.’

거기에 모든 기운을 다 쏟았는지 얼마 가지 않아 사망했지만 말이다.

덕분에 아이는 덴버스 후작이 키웠다. 자기 자식처럼.

요새 베리턴 황태자와 어울린다고 들었는데…….


‘무슨 바람이람.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덴버스 후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덴버스 후작이 집사장을 불렀다.

고민이 많고 피로할 때는 자양강장제가 필요한 법.


“우리 로시는 어디에 있는가.”

“아가씨는 마님과 함께 정원에 계십니다.”

덴버스 후작이 날아갈 것 같은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덴버스 후작의 자양강장제 같은 예쁜 딸이 그를 반겨주었다.


“로시!”

“우빠!”

“세상에, 지금 들었습니까? 부인, 방금 로시가 저한테 아빠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들리는 것도 같고…….”

덴버스 후작 부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웃었다.

덴버스 후작이 아내를 꼭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행복은 덴버스 후작가에도 흘러넘치고 있었다.

***

그리고 황성에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황성에 완벽하게 적응을 마친 레니샤와 카시우스는 여전히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고 있었다.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떨어지지 않는다.

레니샤가 서류를 보면 카시우스가 그걸 넘겨받아 분류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손길이었다.


“오늘은 안 바쁜가요?”

“조금도요.”

카시우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레니샤가 확인한 서류를 카시우스에게 내밀었다.


“이건 파기할 거예요. 별 쓸모없는.”

“무슨 내용입니까?”

“남은 귀족들의 호소문이요. 여전히 꿈속에 사는 제국주의자들의 헛소리를 들어줄 만큼 한가하진 않죠, 내가.”

“그들이 항복해서 들어온다면 다시 써먹을 생각은 있습니까?”

레니샤가 잠시 곰곰이 생각했다.

글쎄, 그들이 그만한 쓸모는 있을까.

새롭게 배우고 발전할 생각은 조금도 없는 한심한 작자들이었다.

그저 과거의 영광에 기대서 남들이 벌어주는 돈만 거머리처럼 빨아먹는 자들.

렉서스는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었었다.

그리고 직접 일을 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탈세를 일삼았다.

인정받고 싶어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레니샤는 그들에게 인정받는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레니샤는 부끄럽지 않은 황제가 되고 싶었다.

후손들이 역사를 되짚어볼 때, 레니샤를 떠올리며 ‘이분이 기틀을 닦았었지.’, ‘살기 좋은 시대였대.’, ‘개혁을 일으키신 분이야.’ 같은 유의미한 평가를 할 수 있길 바란다.


“전혀요. 이미 그들은 그들만의 아집을 내보였습니다. 다른 이들의 몫을 탐내고, 탈세를 일삼았습니다. 그래 놓고는 없는 자들의 곡식을 탐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만들 국정에서 쓸모없습니다.”

레니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들에게 줄 돈이 있다면 철도를 하나 더 놓겠습니다.”

“한동안 덴버스 후작만 피곤하겠군요.”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말대로 서류를 파기했다.

레니샤가 무언가를 짚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레니샤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본 카시우스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일은 날 시키세요, 레니샤! 그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이럽니까!”

레니샤가 혀를 내둘렀다.


“이런 걸로 어떻게 되진 않아요. 그렇지, 예리카나?”

“글쎄요, 황제 폐하. 저는 모르는 영역의 일이라. 다만, 대공님 애가 타시는 것 같으니 저희는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예리카나가 눈치 좋게 집무실 안 사람들을 데리고 나갔다.

레니샤가 생긋 웃고는 카시우스의 뺨을 붙들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입을 가볍게 맞췄다.


“우리 요조숙녀는 무서운 것도 참 많지.”

“……당신이 너무 무모하다고는 생각 안 합니까?”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뺨 여기저기에 키스했다.


“조금도. 무모하기는, 내가 얼마나 조심히 살고 있는데.”

카시우스가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을 떼어내고 기습적으로 키스했다.

레니샤가 웃음을 흘리며 카시우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래, 가끔은 이런 여유도 괜찮겠지.

유능한 레니샤의 보좌관들이 그녀의 몫을 채워줄 것이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피부 위에 키스했다.

따뜻한 숨결을 느끼며 레니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행복은 레니샤의 손안에 있었다.

곧 있으면 베리턴이 온다.

그 아이까지 오면 레니샤의 행복은 완벽해지는 것이다.

기대감이 차올랐다.

***



“야, 얼른 짐 싸!”

대체 왜 저러는 거래?

아카데미 학생들이 베리턴과 클러그를 힐끗거렸다.

첫 입학부터 붙어 다니더니 지금은 모든 일을 함께하는 단짝이 되어버렸다.

클러그 또한 눈길을 끄는 외모라 두 사람은 아카데미에서 선망받는 대상이 되었다.

공부도 잘하고, 검술에도 능하니 아이들의 찬양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들이 이상했다.

베리턴의 뺨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스트로베리 왜 저래?”

“모르겠어…… 볼이 빨가니까 정말 스트로베리 같아. 으, 진짜 내 남자 하고 싶다.”

“야! 내가 먼저 찜했거든!”

여학생들이 투닥거렸다.

평소에는 부끄러워하면서 대화를 들었을 베리턴도 지금은 정신없이 바쁘기만 했다.

클러그를 닦달해서 짐을 챙기게 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만 서두르라니까! 네가 늦는다고 도망가냐?”

베리턴이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너 자꾸 이러면 안 보여준다!!”

“치사하게 이럴 거야? 알았어, 알았다고!”

클러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짐을 챙겼다.

힐로샤인으로 간다는 베리턴과 동행하기로 한 건 충동적인 일이었다.

클러그까지 일어나서 책을 챙기기 시작하자 학생들의 궁금증은 더 깊어졌다.


“클러그까지 저러니까 이상한데. 무슨 일 있는 건가?”

“니가 물어봐.”

“아냐, 니가 물어봐.”

투닥거리던 학생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떠밀렸다.

단발머리의 여학생이 수줍은 얼굴로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이미 가방을 메고 클러그를 재촉하던 베리턴의 옷이 여학생의 손에 붙들렸다.


“저기, 스트로베리.”

“……베리턴이야.”

“무슨 일 있어? 모두 궁금해하고 있어.”

베리턴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곧 여동생이 태어난대! 그래서 여동생 보러 가보려고!”

찬란한 여름이 아이들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축복받은 하늘의 선물이 당도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외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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