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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화. 서로 가야 할 길 (133/135)


외전 3화. 서로 가야 할 길
2023.07.07.



카시우스가 베리턴을 꼭 끌어안았다.

오늘은 베리턴의 거룩적인 아카데미 입학 날이었다.

카시우스가 베리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베리턴이 카시우스를 마주 안았다.

베리턴이 아무리 잘 자라고 있다고 한들 카시우스의 품에 안겨 있는 걸 보니 아직 너무 어렸다.

카시우스가 베리턴의 뺨에 키스했다.


“이 아버지가 널 보고 싶으면 어떡하지?”

매달리는 쪽은 카시우스였다. 베리턴이 어른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어휴, 아버지도 저 없이 지내실 때가 됐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레니샤의 품에서 보고 싶을 거라고 한 시간 내내 어리광을 부리던 베리턴이 어른스럽게 말했다.

레니샤와 린데이가 그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머금었다.


“베리턴…….”

“우리는 방학 때 볼 거예요! 이번 학기가 끝나고 나면 바로 갈게요. 약속!”

“약속.”

카시우스가 울먹울먹한 눈으로 작은 손가락에 손가락을 걸었다.


“됐죠?”

카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우스가 베리턴을 놓아주고 고개를 돌려 레니샤를 응시했다.

레니샤가 눈을 깜빡였다.

카시우스는 전투 의지가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노려보다시피 했다.


“이번에 철도를 들여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추진하고 있다고 했죠, 정확히는.”

레니샤가 가볍게 대답했다.


“힐로샤인과 제도 사이에 철도가 곧 놓일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카시우스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레니샤를 응시했다.

레니샤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그런 논의가 오가고 있기는 했다.

제도를 옮기는 일이다 보니 중앙 귀족의 반발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레니샤의 의지에 따라 힐로샤인으로 먼저 가서 자리를 잡은 중앙 귀족들도 있기는 했으나, 타고난 뿌리를 버리기 힘들어하는 기성세대들이 있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제도로서의 역할을 한 만큼, 아카데미를 포함하여 여러 주요 시설들이 위치해 있었다.

완전히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레니샤는 그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철도를 들여오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었다.

렉서스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를 꼽자면, 그는 문을 닫고 살았다.

히엔트리 제국주의에 찌들어 있던 자라 다른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덕분에 눈부신 문화 발전을 이루고 있는 주변의 나라들보다 훨씬 뒤처져 있었다.

철도 또한 그중 하나였다.

레니샤는 문화의 발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여전히 제국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히고는 있지만 철도를 들여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결론은, 카시우스를 놀려주고 싶었달까?


“레니샤!”

“푸훕.”

“아버지는 왜 매일 어머니한테 당해?”

베리턴이 볼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시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철도는 올해 말부터 착공이 될 거예요. 가능하다면.”

“당신이 말했으니 이루어지겠지요. 레니샤, 자꾸 이러면…….”

“이러면?”

레니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전보다 더 여유로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카시우스가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여전히 레니샤가 저렇게 웃을 때면 설렌다.

레니샤의 뒤로 꽃잎이 날리는 것 같다. 카시우스가 침을 삼켰다.

카시우스에게 찾아온 봄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었다.

얼어붙는 일 없이.


“……슬플 거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카시우스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베리턴이 혀를 찼다.

하여튼,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너무 무르다니까.

레니샤가 베리턴을 향해 팔을 벌렸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 봐야 한다, 아가.”

“아가 말고 베리턴이요.”

“그래, 베리턴.”

레니샤가 베리턴을 꼭 끌어안았다.

바쁜 일정에도 오늘 시간을 내서 이렇게 나온 게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훌쩍 자란 베리턴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나.

베리턴은 아카데미의 교복이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비슷비슷한 교복을 입은 또래 아이들이 아카데미 정문을 넘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코를 훌쩍이며 뒤를 돌아보고 있었고, 또 어떤 아이는 씩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아이들도 있었다.

레니샤가 베리턴의 등을 정문 안으로 살짝 밀어 넣었다.


“4개월 뒤에 보자, 베리턴.”

“네, 어머니.”

오늘로 레니샤와 카시우스는 힐로샤인으로 떠난다.

그들이 여태까지 남아 있었던 것은 베리턴이 아카데미로 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베리턴이 잠시 망설이다가 씩씩하게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갔다.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꽤 오랜 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언제 저렇게 큰 건지.”

카시우스가 감상에 젖어서는 중얼거렸다.


“당신이 다 키웠죠. 저 애는 당신을 너무 닮았어. 말랑하다구요.”

“……린데이 시녀장 말이 당신을 닮았다던데.”

“어머?”

레니샤가 사르르 웃었다.

이렇게 보면 레니샤는 황제가 아니라, 그저 귀부인처럼 보인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양산을 받아 들었다.


“얼른 가요, 고모님, 고모부님. 이러다가 기차를 놓치겠다구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던 이사벨라가 두 사람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8년 만에 돌아가는 길이다 보니 설레는 것 같았다.

레니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린데이 시녀장까지 네 사람을 태운 마차가 길을 재촉했다.

***



“세상에, 이사벨라……! 숙녀가 다 되었구나.”

긴 여정 끝에 이사벨라는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헤일린이 이사벨라를 꼭 끌어안았다.

어느새 헤일린은 이사벨라보다 한 뼘은 작아져 있었다.

어릴 적 부모님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단단하고 커 보였는데, 이렇게 보니 이사벨라가 지켜줘야 할 것만 같다.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무심한 녀석! 편지가 아니라 네가 직접 왔어야지.”

이사벨라가 배시시 웃었다.

헤일린에게서 떨어져 나온 이사벨라가 브릭스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불편해 보이기는 하지만, 브릭스턴은 두 다리로 서 있었다.

이사벨라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이사벨라가 침을 삼켰다.


“이 아비가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늦어버렸구나.”

브릭스턴이 이사벨라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안아보자, 이사벨라.”

이사벨라가 기꺼이 그 품에 안겼다.

이사벨라에게 있어서 브릭스턴은 거목이었다.

도끼질 한두 번으로는 절대로 꺾을 수 없는 나무.

브릭스턴이 무너지고 나서 어쩌면 이사벨라도 도망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순간을 못 견디겠어서.

이사벨라의 미간이 위쪽으로 산을 그렸다.

간신히 눈물을 참아낸 이사벨라가 속삭이듯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

“고생했다, 우리 딸.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니. 잘 컸다, 잘 컸어.”

브릭스턴이 투박하게 이사벨라의 등을 두드렸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이들 대다수가 눈시울을 붉혔다.

브릭스턴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는 까닭이었다.

지난 8년 동안 이어진 재활은 눈 뜨고는 못 지켜볼 정도였다.

고통에 신음하며 잠들고, 고통을 못 이겨서 잠에서 깬 적도 많았다.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재활에 임하던 브릭스턴의 의지가 지금을 만들어낸 것이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 그냥 놓아버리셔도 됩니다.’

눈물로 읍소하는 보좌관 앞에서 브릭스턴은 헛헛하게 웃어 보였다.


‘이사벨라에게 약속했네. 내가 데리러 가기로. 그런데 이런 다리로는 짐만 되지 않겠나.’

‘브릭스턴 님……!’

‘적어도 그 앨 안아줄 수는 있어야지.’

그 의지로 브릭스턴은 결국 일어서는 데 성공했다.

로샤의 눈물을 의지로 이겨낸 것이다.

브릭스턴이 절뚝거리면서 이사벨라의 손을 잡았다.


“들어가자, 이사벨라.”

“브릭스턴.”

돌아서던 브릭스턴의 귀에 꽃바람 같은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브릭스턴이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이젠 내가 보이지도 않는 거야?”

막 마차에서 내리던 레니샤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브릭스턴이 눈을 깜빡였다.

레니샤도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다.

레니샤는 지난 8년 동안 렉서스의 실책을 바로 잡고, 천도 준비를 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덕분에 원치 않았던 생이별을 한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했던 세월이었다.


“세상에, 레니샤……!”

“약속을 지켰어, 브릭스턴.”

브릭스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샤는 렉서스의 목을 부모님의 묘비 앞에 바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소금 상자에 든 렉서스의 목이 힐로샤인에 도착했을 때, 브릭스턴은 짐승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그 대단한 황제도 인간이었다.

언젠가는 죽고, 자신의 죗값을 받을 인간!

그런 렉서스를 이기지 못하고 동생과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

그놈의 목을 묘비 앞에 올리던 날 브릭스턴은 그간 끊었던 술을 오랜만에 입에 댔다.

후회와 희열, 그리고 허탈함이 몰려왔었다.

여전히 생생한 감정을 기억한다.


“고생했다, 레니샤.”

레니샤가 생긋 웃었다.

결국, 레니샤는 해낸 것이다.

이렇게 황제가 되어 돌아왔으니 말이다.

로테라 공작 부부가 지키고 싶어 했던 그 예쁜 모습 그대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기뻐하실 거다. 인사드리러 갈 거지?”

“아무리 바빠도 가야지.”

레니샤가 긍정했다.

레니샤의 양산을 든 카시우스가 다가왔다.

덩치가 산만 한 기사가 작고 귀여운 양산을 들고 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놓고 보니 여전히 달랐다.

레니샤는 하얗고 예쁜 설탕 과자 같았고 카시우스는 밀빛으로 구운 바게트 같았다.

하지만, 웃는 모습이 닮았다.

두 사람은 가족이 되어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카시우스 공.”

“오랜만에 뵙습니다. 브릭스턴, 그리고 헤일린.”

“잘 왔어요. 정말 잘 왔어.”

헤일린이 감격에 겨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 베리턴도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이사벨라가 덧붙였다.


“그러게. 그 녀석 지금 잘하고 있겠지?”

카시우스가 걱정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들의 뒤로 긴 석양이 드리워졌다.

힐로샤인에서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실상은 우울감에 젖은 얼굴로 베리턴이 벤치에 앉았다.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을 생각보다 더 복잡했다.

힘들다기보다는…… 복잡한 게 맞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고.


“후우.”

베리턴이 한숨을 푸우 내쉬었다. 그 서슬에 앞머리가 날렸다.


“꺄! 베리턴 정말 잘생겼어!”

“잘생긴 게 아니라 귀여운 거야! 미쳤다, 미쳤어. 괜히 시녀장님이 스트로베리라고 하신 게 아니라니까?”

“그 네 이모님?”

“맞아. 우리 엄마랑 친한 분이시거든!”

여학생들이 베리턴을 향해서 쏟아내는 찬사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스트로베리, 그놈의 스트로베리.

친구 관계가 무너지는 소리다.

베리턴이 창피함에 얼굴을 비빌 때였다.

베리턴 옆에 한 남자애가 쓱 하고 앉았다.


“야, 스트로베리.”

씨, 다들 가만 안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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