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화. 아카데미 (132/135)


외전 2화. 아카데미
2023.07.04.



 
레니샤가 고민에 빠진 얼굴로 서류를 뒤적였다.

힐로샤인으로의 천도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제도 귀족들의 반발이 극심했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귀족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가면서 주는 일은 이제 숙달되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적응이 되질 않는다.


“흐음. 우리 베리턴은 고작 8살인데,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게 맞을까?”

학부모가 되는 일 말이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레니샤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니샤는 모든 상황에 있어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레니샤의 결정은 아이의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곤 했다.

아카데미 또한 그런 선택 중의 하나였다.

대신 중 일부는 베리턴을 아카데미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일부는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해서 제왕학을 익혀야 한다고 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의 선택은 아카데미였다.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얻는 경험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특히 황성이라는 좁은 세상에서 자란 베리턴에게는 세상을 보여주는 경험이 필요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는 그 경험의 장터로 아카데미를 골랐다.

신중한 결정을 앞두고 고민이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베리턴을 보내기 전에 졸업을 앞두고 있는 이사벨라를 부른 것이다.

이사벨라가 생긋 미소 지었다.


“고모님. 고모님은 베리턴에 대해서 너무 모르세요.”

“무슨 말이니?”

레니샤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이사벨라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이런 질문은 제가 아니라 베리턴한테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 애는 자신의 일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구요.”

레니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저는 좋았어요.”

이사벨라는 졸업을 앞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힐로샤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카데미 방학 기간에는 친구들 집에 놀러 가거나, 제도에서 지냈다.

브릭스턴과 헤일린은 그것을 서운해했지만, 그들 또한 힐로샤인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들 없이는 힐로샤인이 마비되기 때문이기도 했고, 브릭스턴의 재활이 지지부진하게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힐로샤인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사벨라가 무슨 생각인지 알 듯하면서도 어려웠다.

이사벨라가 말을 이었다.


“친구도 많이 사귀었고, 새로운 것도 배웠고. 그리고 부모님 없이도 제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찾았고요.”

“이사벨라, 네 부모님은…….”

“네, 알아요. 저를 사랑하시죠. 그리고 그분들은 동시에 상처가 많은 분들이세요. 저만큼이나. 저 없이 두 분에게 집중하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사벨라가 어른스럽게 말했다.

반짝이는 이사벨라의 눈을 보면서 레니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사이에 이사벨라가 이렇게 어른이 된 것인지.

하긴, 베리턴이 8살이 된 것 보면 시간은 이사벨라에게만 흐른 건 아니었다.


“이사벨라, 졸업 후에는 힐로샤인으로 돌아갈 생각이니?”

이사벨라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활짝 웃었다.


“네. 오랜만에 부모님도 뵙고 싶네요.”

“졸업 후에는 뭘 할 생각이냐.”

“아무래도…… 일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이사벨라가 쾌활하게 말했다.


“제가 그간 로테라의 일에서 손을 떼고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로테라를 제가 정말로 물려받아야 한다면 배워야 할 게 많겠죠. 힐로샤인에 머물다가 대륙 여행을 한번 다녀오고 싶어요. 그리고 돌아와서 또 공부해야죠. 부모님 밑에서.”

“혹, 그게 싫거나 한 건 아니겠지?”

이사벨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것 말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걸요.”

이사벨라는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많이 단단해졌다.

그것이 애틋하면서도 기특해서 레니샤가 지그시 이사벨라를 응시했다.

숙녀가 된 이사벨라가 차를 호롭 마셨다.

헤일린의 모습이 묻어난다.

그들이 한동안 정겨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응접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도도도도 구르듯이 뛰어 들어온 베리턴이 이사벨라를 꼭 끌어안았다.


“누나!!”

“베리턴! 세상에! 그사이에 키가 얼마나 큰 거야? 우리가 얼마 만에 만났지?”

“일주일! 분명 3일 전에 온다고 해놓고서…….”

베리턴이 커다란 눈으로 이사벨라를 노려보았다.

이사벨라가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누나가 잘못했네. 졸업 연구 과제가 쉽지만은 않더라고.”

“졸업 연구 과제? 그게 뭐야?”

“졸업하려면 해야 하는 거. 베리턴이 아카데미를 가게 되면 해야 하는 거?”

“움.”

이사벨라가 베리턴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베리턴. 이제 이 어미는 보이지도 않는 거니?”

“아니요, 어머니.”

베리턴이 방향을 틀어서 레니샤도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어머니.”

베리턴이 배시시 웃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는 베리턴을 구김살 하나 없는 아이로 키웠다.

그들이 살아온 삶과는 다르게 베리턴은 이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

베리턴은 잘 웃고, 잘 울었으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다행히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바란 대로 잘 자라준 것이다.


“나도 사랑한다, 베리턴.”

레니샤가 속삭였다.


“베리턴.”

“응?”

“너는 아카데미에 가고 싶은 거야? 아니면 따로 하고 싶은 게 있니?”

이사벨라가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베리턴이 고개를 갸웃했다.

베리턴이 방을 빙글 돌았다. 작은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저 나이대에도 심각한 고민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아카데미에 가는 것이 베리턴의 큰 고민거리인 듯했다.


“……아카데미에 가면 뭐가 좋아?”

“친구를 잔뜩 사귈 수 있지. 그리고 좋아하는 과목을 연구할 수도 있고. 배울 수 있는 게 참 많아.”

“하지만, 부모님하고 떨어져야 하잖아.”

베리턴이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곧 있으면 어머니하고 아버지는 힐로샤인으로 가시는데 나만 이곳에 남는 거잖아.”

“방학이 되면 베리턴도 힐로샤인으로 올 수 있어.”

“……친구들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해?”

말랑말랑한 작은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베리턴은 종종 또래 아이들과 어울린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아이들만 있는 집단에 던져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베리턴이 이사벨라의 치마에 매달렸다.

한 번도 스스로 친구를 사귀어본 적 없으니 걱정할 만했다.

이사벨라가 베리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베리턴은 레니샤와 카시우스를 나눠 닮아서 귀엽기 짝이 없었다.

이사벨라가 깨물어주고 싶은 베리턴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아무도 너를 미워할 수 없을걸.”

“어째서?”

“우리 베리턴은 잘생겼잖아.”

“응?”

“그것도 꽤 중요하거든.”

이사벨라가 베리턴의 뺨을 마구 문질렀다.


“으이, 누나아!”

“잘생겼고, 똑똑하고, 용감하지. 친구들이 전부 베리턴을 좋아하게 될 거야. 베리턴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말이야.”

베리턴은 그간 황성에서 검술 수련을 비롯해서 개인 교습을 받아왔다.

아무래도 황제위를 이을 후계자다 보니 어릴 때부터 많은 것을 배워온 것이다.

게다가 레니샤와 카시우스 슬하에 베리턴뿐이다 보니 온 제국의 관심이 베리턴에게 쏠려 있었다.

베리턴이 몸을 배배 꼬면서 말했다.


“그런가?”

“물론이지. 또 뭐가 걱정이야?”

“움.”

베리턴이 작은 손으로 뺨을 짚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뒤처지면 어떡하지?”

“그럴 리가 있겠니. 베리턴은 평소에도 공부를 아주 많이 하고 있잖아.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날걸.”

그 나이대 아이들이 할 만한 고민이었다.

이사벨라의 차분한 대답에 베리턴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먹구름이 물러간 베리턴의 얼굴을 이사벨라가 조물락거렸다.


“누나아! 나도 이제 8살이란 말이야!”

“베리. 그렇다고 해도 너는 내 귀여운 동생이야.”

이사벨라가 단호하게 말하고는 베리턴을 꼭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레니샤의 눈가에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오늘 이사벨라를 부른 것은 백번 잘한 일이었다.

베리턴은 레니샤나, 카시우스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들을 이사벨라에게는 술술 털어놓곤 했다.

그리고 이사벨라는 시원하게 베리턴에게 답을 내려주었다. 항상.

사실 이사벨라의 눈높이에서 보기에 베리턴의 고민은 사소할 것이다.


“베리라고 부르지 마!”

베리턴이 빨개져서는 이사벨라의 품에서 발버둥 쳤다.


“으으! 나 애기 아니라니까!”

“요 귀여운 것.”

이사벨라가 베리턴의 말랑한 뺨을 앙앙 물고 나서야 아이를 놓아주었다.

베리턴이 잔뜩 토라져서는 뒤로 도망쳤지만, 정말로 기분이 나쁜 건 아닌 듯했다.


“우리 스트로베리, 이리 와. 너 주려고 누나가 마카롱도 잔뜩 사 왔다고. 네가 좋아하는 커피하우스에서.”

“스트로베리 말고오!”

“블루베리?”

이사벨라가 놀리듯이 말했다. 저런 걸 보면 레니샤를 꼭 닮았다.

레니샤가 혀를 차고는 차를 마셨다.


“블루베리도 말고오! 나는!”

“베리턴이지.”

이사벨라가 생긋 웃었다.

베리턴이 분한 얼굴로 이사벨라를 쏘아보았다.


“그래서 이 맛있는 마카롱을 안 먹을 거라고?”

이사벨라가 그릇을 들어 보였다.


“정말로?”

“그, 그건 아니야!”

베리턴이 얼른 달려와서 이사벨라의 옆에 앉았다.

황성에서는 영양학적인 관점에 맞춰서 잘 짜인 식단만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이렇게 이사벨라가 들고 오는 간식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벨라가 베리턴의 입가에 묻은 것을 툭 하고 닦았다.


“우리 스트로베리.”

“웅.”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베리는 어딜 가서도 잘할 수 있을 거야. 물론, 베리가 아카데미에 가고 싶다면 말이야.”

더 어릴 때는 이사벨라를 따라 아카데미엘 가겠다고 울며불며 조른 적이 있었다.


“가보고 싶어.”

베리턴이 씩씩하게 말했다.


“재밌을 것 같아.”

“부모님이 널 보러오지 못할 거야.”

“누나가 대신 보러오면 되잖아. 그리고 힐로샤인에 가서 나 잘 지내고 있다고 전해주면 돼!”

“요 녀석, 벌써부터 누나를 심부름꾼으로 생각하는구만.”

“흥! 날 사랑한다면서 그 정도도 못 해 줘?”

“말하는 것 보게.”

이사벨라가 베리턴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베리턴이 꿈쩍도 하지 않고 마카롱을 야무지게 먹었다.

레니샤가 숨죽여 웃었다.

레니샤의 눈에는 이사벨라도 여전히 어린애 같은데 둘을 나란히 놓으면 확실히 많이 자랐다 싶었다.

이사벨라는 베리턴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과거 레니샤가 이사벨라에게 그랬었던 것처럼.

지난하고 기억하고 싶은 게 별로 없는 과거에도 좋은 추억이 한 자락 정도는 남아 있었다.

이사벨라를 비롯한 가족들과 보내던 시간이었다.

레니샤의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


“대신 내가 좋은 선물 줄게.”

“뭘?”

“누나 곧 생일이잖아. 내가 누나 선물 사주려고 용돈 모아뒀단 말이야!”

베리턴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 뭘 사줄 건데?”

“움.”

베리턴이 레니샤를 떠올렸다. 레니샤가 평소에 뭘 좋아하는지.


“어, 목걸이? 반지?”

황태자궁 앞으로 배정된 예산도 아니고, 베리턴의 용돈으로는 턱없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베리턴의 사랑스러움에 레니샤와 이사벨라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