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화. 렉서스의 죽음 (131/135)


외전 1화. 렉서스의 죽음
2023.06.30.



 
레니샤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 소식은 악의적으로, 렉서스의 속을 긁는 목적으로 그의 귀로 들어왔다.

그쯤 되니 렉서스는 그가 살아 있는 것이 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생에 걸쳐 유일하게 사랑했었던 사람이 타인과 가족을 이루는 것을 지켜본다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유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쿨럭.

렉서스가 입가를 쓱 닦았다.

비릿한 피가 콧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렉서스가 무감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적신 피를 응시했다.

방 안에는 렉서스뿐이었다.

렉서스에게 주어진 것은 이 작은 방 하나뿐이다.

렉서스는 여관 주인이 가져다주는 밥을 먹고, 그가 들려주는 소식을 들었다.

레니샤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레니샤는 렉서스로부터 모든 관심을 거둬들인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다시 속이 뒤틀렸다.


“……빌어먹을.”

그냥 죽고 싶어도 겁이 나서 죽지 못한다.

렉서스가 죽으면 로테라 공작이 달려와서 그를 물어뜯을 것 같았다.

베리턴뿐이겠나.

로테라 공작 부인을 비롯하여 렉서스의 손에 명을 달리한 이들이 전부 달려오겠지.

렉서스가 헛헛하게 웃었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누구도 곁에 없었다.

렉서스가 세상을 쥐었던 날들이 모두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렸다.

렉서스가 마른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울컥 튀어나왔다.


[이제 그만 갈 때가 되셨습니다, 폐하.]

로테라 공작의 유령은 여기까지 찾아와서 지랄이다.


“푸흐흐흐…… 푸하하하하하하!!”

그래, 유령이 남았군.

렉서스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약에 절어서 덜덜 떨리는 몸을 간신히 움직였다.


‘그간 견딜 수 있었던 건 로샤의 눈물 덕인가.’

렉서스가 핏기가 맺힌 입술을 혀로 훑었다.

렉서스가 힘겨운 한숨을 내쉬고는 창가에 가서 섰다.

창문에 이마를 기댄 렉서스가 밖을 노려보았다.


“와아아아! 황자 전하 만세!!”

“레니샤 황제 폐하 만세!! 카시우스 대공님 만세!!! 히엔트리 만세!!”

렉서스의 귀에도 길거리가 술렁거리는 소리가 전부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희열에 찬 것처럼 보였다.

그럴 만도 하지. 진정한 황제의 후계자가 태어났으니 말이다.

게다가 로테라의 명망이 높았던 만큼 더욱 찬양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레니샤, 레니샤…….”

렉서스가 중얼거렸다.


[내 딸이 아들을 낳았다더군요. 폐하께서는 그 긴 세월 동안 주지 못했던 것이지요. 노예 기사라고 하셨습니까?]

로테라 공작이 렉서스의 귀를 핥을 것처럼 속삭였다.

렉서스가 부들부들 떨렸다.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제가 보기엔 그 못난 노예 기사가 폐하보다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내 딸이 사람 보는 눈이 있지요.]

창가를 짚은 렉서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니 폐하를 사랑하지 않은 겁니다.]

“으아아악! 꺼져! 꺼지란 말이야!”

[제가 가긴 어딜 갑니까!! 폐하의 마지막을 눈앞에 두고!]

렉서스가 손을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사라져, 베리턴!!!! 쿨럭!!”

렉서스가 토한 핏물이 창문을 뒤덮었다.

렉서스의 마지막은 그렇게 초라하게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레니샤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품에 안긴 아기의 재롱에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아이를 낳기 직전까지 일을 놓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그 일이 조금도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아무!”

고사리 같은 손이 레니샤의 소매를 쭉쭉 잡아당겼다.


“아버지를 닮아서 힘이 센 건가.”

레니샤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의 뺨에 입술을 비비자, 아기가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는 레니샤를 대신해서 제국을 맡은 건 카시우스였다.

레니샤의 수행원들이 전부 카시우스를 쫓아다니며 그를 보필하고 있었다.

카시우스는 갑자기 떠맡게 된 일을 버거워했지만, 그런대로 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가끔가다.


“레니샤!”

이렇게 뜬금없이 찾아오긴 하지만.


“왜 그래요, 카시우스? 이전처럼 기사단이 파업이라도 선언한 건가요? 아니면, 폭동이라도 일어났나요?”

레니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카시우스가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제가 그랬습니까? 그런 일들로…… 당신을 귀찮게 했군요.”

카시우스가 헛기침을 했다. 밀빛 피부가 보기 좋게 달아올랐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손짓했다.


“우리 아기가 방금 엄마라고 한 것 같아요, 한번 들어…….”

“아기 이름을 결정했어요, 레니샤.”

카시우스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돌아보았다.

카시우스가 아기를 번쩍 안아 올렸다.


“오래도록 생각했습니다. 가장 좋은 이름을 주고 싶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이름도, 가장 오래 산 자의 이름도, 가장 훌륭한 황제의 이름도 고려했습니다.”

레니샤는 아기의 이름을 짓는 일을 전부 카시우스에게 맡겼다.

그리고 카시우스는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도 이 주일을 더 고민했다.


“그런데요?”

“더 좋은 이름을 찾았습니다. 제 가슴에 남아 있었던 단 하나의 이름이 있습니다. 제 영웅이신 분이죠.”

카시우스가 환하게 웃었다.


“영웅?”

왠지 모르게 레니샤의 심장이 뛰었다.

카시우스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레니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베리턴. 그 이름을 주고 싶습니다.”

베리턴 로테라.

레니샤의 눈꺼풀이 떨렸다.

불명예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을 가장 영광되게 되살리는 방법이었다.


“딸을 낳으면 당신 어머니의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꼭 끌어안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내 생에 가장 위대한 영웅은 당신 아버지였습니다, 레니샤. 저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란 사람입니다. 그러니 허락하십시오, 레니샤. 우리 아이는 히엔트리의, 나아가 ‘로테라’의 이름을 짊어진 제국민의 영웅이 될 겁니다.”

그들은 히엔트리가 안정되는 대로 ‘로테라’ 제국으로 국호를 바꿀 계획이었다.

레니샤가 울컥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닮는다면 분명 훌륭한 사람이 될 거예요. 정의롭고, 똑똑하고, 용감하고…….”

레니샤의 눈앞에 아버지의 잔상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 넓은 뒷모습이 단 한 번 작아 보였었던 적이 있었다.


‘이 아비가 끝까지 너를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어. 레니샤, 우리 딸. 그래도 너는 이겨내야 한다. 나는 너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마치 아버지가 곁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레니샤.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해.’

레니샤가 눈을 감았다.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내가 이래서 당신이 좋아.”

레니샤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거든.”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이마에 키스했다.

레니샤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이 마음을 알까.

어떤 말을 해야 레니샤가 기뻐할지, 조금이라도 더 웃을지 고민하는 그를 알까.

그리고 이건 카시우스의 진심이 담긴 선택이기도 했다.


“우리 큰아들은, 이 아이는 베리턴 로테라라고 불리게 될 거예요. 카시우스, 이 아이는 우리 아버지처럼…… 강하고, 정의롭고, 똑똑하게 자랄 거예요. 우리의 바람대로.”

카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레니샤와 카시우스의 첫 아이는 베리턴 로테라가 되었다.

***

대관식 날이 되었다.

이전처럼 길거리가 들썩였다.

렉서스가 창가에 가만히 기대서 있다가 비틀거리며 방을 빠져나왔다.

그 누구도 렉서스를 붙들지 않았다.

어쩌면 저들도 마지막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하얗게 질려서 병색이 만연한 렉서스를 사람들이 피해 다녔다.

렉서스가 비틀거리며 정처 없이 걸었다.

어디를 가도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전부 레니샤와 카시우스의 이름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콜록.”

렉서스가 흐릿한 눈동자로 앞을 응시했다.

그는 가지지 못한 영광된 순간이었다.


“내 자리야…….”

렉서스가 중얼거렸다.

그의 고집스러운 보랏빛 눈동자는 레니샤의 옆자리, 카시우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내 거란 말이야…….”

렉서스가 피 끓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놔…… 내 거란 말이야…… 컥!”

인파가 몰리자 사람들이 렉서스를 치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녔다.


“내, 내가 누군 줄 알고! 다들 저리 비켜!”

렉서스가 비틀거리며 소리쳤다. 그의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렉서스의 흐릿한 눈동자와 마주한 남자가 침을 뱉었다.


“퉤! 어디서 흐릿한 생선눈깔을 한 놈이! 네놈이 누군데!”

남자가 렉서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디 한번 말해봐! 네놈이 누구냐고!”

렉서스가 파르르 떨었다. 렉서스가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커다란 살덩이가 움직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렉서스가 피식 웃었다.


“내가 바로 황제다. 저 여자는 바로 내 여자란 말이다!”

렉서스가 피를 튀기면서 외쳤다.


“네가 황제면 나는 신이다.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어! 야, 이 경사스러운 날에 이런 불경한 게 끼어 있어서야 쓰겠나.”

남자가 제 부하들을 향해 눈짓했다.


“뭐 가진 게 없는지 살펴 드려라. 불경한 죄를 지었으면 대가를 내놓아야지!”

렉서스가 남자들에게 끌려가면서 피거품을 물었다.

건달들의 주먹에 얻어맞으면서 렉서스가 숨을 쌕쌕 내쉬었다.

끝까지 보고 죽어야 한다.

이 두 눈에 레니샤를 담고 죽어야 한다.

영원토록 그녀를 잊지 못하도록…….

유령이 되어서라도 레니샤의 곁에 머물 수 있도록.


“크헉!”

렉서스가 배를 더듬으면서 피를 토했다.


“야, 씨. 진짜 죽는 거 아냐?”

“그럼 어때. 어차피 죽기 직전이었어.”

건달들이 나누는 대화가 점점 멀어졌다.

렉서스의 품을 뒤져서 금화를 챙긴 건달들이 달아났다.

버려진 쓰레기처럼 웅크린 채로 렉서스가 간헐적인 숨을 내쉬었다.

숨이 점점 꺼져가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렉서스가 눈을 깜빡였다.


‘제발, 레니샤…….’

하지만, 렉서스를 배웅 나온 것은 레니샤가 아니었다.

낯선 여자가 렉서스를 향해 몸을 숙였다.


“정말 질긴 목숨이네. 그냥 이대로 죽는 게 어때?”

렉서스가 눈을 깜빡였다.

레니샤의 옆에 있었던 여자다. 여자가 피식 웃었다.


“뭘 봐.”

“레, 레니샤한테 데려다줘…….”

렉서스가 피를 흘리며 말했다.

렉서스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루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미친 거 아냐? 레니샤가 널 보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레니샤는 네가 없어야 행복한데?”

“……아,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레니샤는 내 아내야!”

렉서스가 거칠게 기침했다.

루나가 인상을 쓴 채로 손을 털었다.


“뭐야. 피 튀기잖아.”

루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레니샤는 절대로 렉서스를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루나의 뒤에 헬레나가 싸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헬레나가 루나의 어깨를 짚었다.


“곧 숨이 끊어지겠군요.”

“길어야 5분? 하여튼, 악당들이 명이 길다니까.”

“바로 레니샤 님께 고해야겠습니다.”

“대관식 선물로 제격이네.”

재잘거리는 잡담을 들으며 렉서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바닥의 차가운 기운이 렉서스에게 파고들었다.

렉서스는 그제야 인정했다.

레니샤는 그의 마지막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