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오늘
(130/135)
130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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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오늘
2023.06.27.
7개월 후.
오랜 산고 끝에 아이가 태어났다.
레니샤를 꼭 닮은 남자아이였다.
레니샤처럼 분홍색 눈동자와 백금발을 타고났는데 몸집은 카시우스를 닮았다.
예니카는 아이의 생김을 전해 듣고 카시우스의 어린 시절을 똑 닮았다고 말했다.
카시우스도 신생아 시절부터 손에 꼽히는 우량아였다나.
레니샤가 아이의 뺨을 쓸었다.
부드럽게 뭉개지는 생크림 같은 뺨이 사랑스럽다.
레니샤가 아이의 뺨에 키스했다.
“잘 잤니, 우리 아가.”
“꺄앙!”
아이가 두 손을 잼잼, 움직였다.
고개를 뒤트는 게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게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레니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뒤쪽에서 뻗어온 손이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베리턴. 좋은 아침이지?”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었다.
카시우스와 레니샤는 태어난 아이와 곧 태어나게 될 아이에게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카시우스가 아이의 둥근 배에 입술을 비볐다.
“아부부부부부!”
“꺄!”
그것이 퍽 재밌는지 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속 한 번 썩이지 않고 무탈하게 자라고 있었다.
아이가 웃는 것, 먹는 것, 우는 것, 자는 것.
종일 아이를 지켜 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오늘도 그렇게 한량처럼 지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레니샤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레니샤의 대관식 날이었다.
샴디르의 메테오는 돌아갔고 막내 왕녀가 입국했다.
레니샤는 샴디르의 국왕에게 막내 왕녀가 무사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자격만 갖춘다면 황제의 보좌관으로 일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7개월 동안 그 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레니샤는 아이를 낳기 직전까지 황제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대륙은 히엔트리의 새로운 황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건 각 나라를 다스리는 위정자들에게 있어서 위험한 일이었다.
왕의 피를 잇지 않은 자가 왕이 될 수 있다니!
레니샤를 향해 비난을 쏟아내는 그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레니샤는 신전을 동원했다.
대신관은 레니샤의 뜻에 따라 그녀에게 새로운 신성성이 부여되었음을 대륙에 공표했다.
검은 뱀과 붉은 뱀의 비호를 받고 있고, 붉은 뱀을 이어받은 아이가 태어나 다음 황제가 될 테니 문제가 없다고 말이다.
그들이 수그러들 때까지는 꽤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힐로샤인으로 제도를 천도하는 일도 천천히 진행 중이었다.
한 번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자리가 비게 될 제도를 총괄하는 자리에는 덴버스 후작이 낙점되었다.
레니샤가 종을 흔들었다.
“네, 폐하.”
침실로 들어온 시녀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사이에 헬레나와 제인도 섞여 있었다. 그들도 제자리를 찾았다.
“대관식 준비를 하지. 황자는 공작께서 직접 챙기실 터이니 오늘은 나 하나만 건사해주면 되네. 벌써부터 오늘 하루가 걱정이군.”
어린 하녀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레니샤가 자애로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을 위해서 긴 시간 준비해왔지 않은가.”
린데이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렸다.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톡톡 닦아낸 린데이가 목을 가다듬었다.
“경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린데이를 따라 시녀들과 하녀들이 고개를 숙였다.
“경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레니샤가 활짝 웃었다.
레니샤의 곁에는 앙알앙알 울음을 터뜨린 베리턴과 항상 기둥처럼 단단한 카시우스가 함께였다.
레니샤가 손을 뻗어 카시우스의 허리를 감았다.
오늘도 카시우스는 레니샤의 곁에 있을 것이다.
***
“정말 내가 오늘 힐로샤인의 대표예요?”
이사벨라가 쾌활하게 물었다.
이사벨라는 아카데미에 진학했다.
늦깍이로 입학했지만, 학업의 성취가 빨랐고 곧 3학년으로 진급할 예정이었다.
이사벨라의 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어머님, 아버님께서 참석을 못 하실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가씨께서 대표가 되신 겁니다.”
“어머!”
이사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사벨라 아가씨처럼 의젓하고 똑똑한 아이는 본 적이 없습니다. 분명 잘 해내실 수 있을 거예요.”
오늘 대관식에서 황제는 제도를 천도할 뜻을 공식 발표할 예정이었다.
다들 알고 있지만, 쉬쉬하고 있었던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이사벨라는 오늘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유모가 이사벨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사벨라의 팔을 붙들고 다정하게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는 장차 로테라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실 거예요.”
“……내가?”
“네.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셨으니 이루어지겠지요?”
“응…….”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 시작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처음이니 실수해도 다들 눈감아 줄 겁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
“그러면 황제 폐하 뒤에 숨으세요.”
“고모님 뒤에?”
“네. 황제 폐하께서 설마 아가씨를 내치시겠어요?”
이사벨라가 깔깔 웃었다.
생각해보니 세상에서 제일 센 사람이 이사벨라의 뒤에 있었다.
이사벨라의 두려움이 물러갔다.
웃는 이사벨라를 보며 유모도 미소 지었다.
“……섭섭하지는 않으세요?”
“응?”
“아버님, 어머님을 못 뵌 지 오래되셨잖아요.”
힐로샤인을 떠나온 이후로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도 한 번도 제도로 온 적이 없었다.
편지는 계속 주고받았지만…….
이사벨라가 곰곰이 생각했다.
“아니야. 안 섭섭해. 아버지랑 어머니도 내게 오기 위해서 노력하고 계신걸.”
“네?”
“아버지가 그랬어. 꼭 나를 데리러 오신다고.”
“…….”
아직 브릭스턴은 마차를 오래 타지 못한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지만, 부축 없이는 걷기 힘들었다.
헤일린은 힐로샤인을 돌보랴, 브릭스턴을 돌보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사벨라가 말을 이었다.
“만약, 아버지랑 어머니가 못 오시면 내가 뵈러 가면 돼. 나는 하나도 안 섭섭해.”
“아가씨…….”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되어버린 이사벨라를 유모가 꼭 끌어안았다.
어느새 등까지 긴 이사벨라의 머리카락을 유모가 쓰다듬었다.
레니샤는 이사벨라의 머리카락에 신경을 엄청 쓰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자라는데 좋다는 건 전부 구해왔고 이사벨라의 향유도 직접 골랐다.
종종 일이 바쁘지 않을 때는 이사벨라의 머리카락을 직접 빗겨주기도 했다.
‘이건 어른의 잘못이야. 이사벨라, 네 잘못이 아니다.’
레니샤는 짧은 이사벨라의 머리카락을 보고 이리 중얼거리곤 했다.
그 덕분인지 이사벨라는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오늘은 머리를 반묶음해줘.”
이사벨라가 당차게 말했다.
“네, 아가씨!”
“최대한 어른스럽게 해줘야 해.”
“노력할게요.”
***
빰빠밤-!
나팔 소리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황제 부부가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관식 소식을 들은 이들은 생업을 접고 전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오늘 대관식을 지켜보기 위해서 먼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도 많았다.
“세상에……!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시지 않아?”
“그럼! 하늘이 점지해주신 분들인데. 카시우스 공작께서 붉은 뱀의 힘을 이으셨다지?”
“레니샤 황제께서는 검은 뱀의 땅에서 나신 분이시라며! 운명이지, 운명이야!”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그러다가 함성 소리가 커졌다.
“아기님이셔! 황자님! 여기도 봐주세요, 황자님!”
사람들이 손을 뻗으며 흔들었다.
카시우스가 베리턴을 높이 들어 올렸다.
아기가 발을 버둥거렸다.
무엇인가 불만인지 울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이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과 모자를 벗어 하늘로 던졌다.
“휘익!”
“황자님!!!”
광장을 울리는 소란에 아기가 놀랐는지 자지러졌고 결국 유모의 품에 안겨서 퇴장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렉서스가 있었다.
낡은 후드를 눌러쓴 렉서스가 고개를 치켜들어 레니샤를 응시했다.
레니샤는 제자리를 찾아, 제 옷을 입은 것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렉서스의 곁에서 검게 죽어가던 이가 아니었다.
렉서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레니샤…….”
더 이상 저 자리가 탐나지 않는다.
레니샤가 박아넣은 못은 여전히 그를 헤집고 있었다.
사랑한 적이 없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레니샤의 인생에 렉서스는 무엇이었을까.
렉서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오늘 이곳에 온 건 마지막 결정을 위해서였다.
한참을 레니샤를 지켜보던 렉서스가 몸을 돌렸다.
비척거리며 걷던 렉서스가 멍하니 강을 응시했다.
렉서스가 재위하던 시절에는 피로 물들어 있던 강이 햇빛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모든 게 변했다.
세상은 레니샤의 빛깔로 물들었다.
‘이래서 하늘이 고른 황제는 다르다는 건가.’
렉서스가 피식 웃었다.
손에 품고 있었던 것을 만지작거렸다.
마지막 미련까지 전부 던져 넣었다.
레니샤는 스스로 말한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를 완전히 잊은 것 같기도 했다.
레니샤에게 잊혔다면, 더 이상 그녀에게 남겨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무슨 미련을 가지겠는가.
렉서스가 병에 든 독약을 쭉 들이켰다.
목구멍이 불타올랐다.
렉서스가 몸을 뒤틀며 바닥에 픽하고 쓰러졌다.
그런 렉서스를 지켜보던 기사들이 다가왔다.
“……드디어 끝났군.”
“명도 길지.”
누구도 렉서스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주지 않는다.
기사들이 짐짝처럼 렉서스를 어깨에 둘러멨다.
렉서스가 눈을 감지 못한 채로 숨을 거뒀다.
‘레니샤…….’
끝까지 미련을 놓지 못한 채로.
***
렉서스의 죽음을 들은 건 대관식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였다.
레니샤는 여상하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보며 차를 마시는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레니샤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랬군.”
딱 그게 전부였다.
레니샤가 더 이상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카시우스와 베리턴이 그녀의 주의를 돌렸다.
“웅캬! 응캬!”
아기가 손에 쥔 것을 입 안에 우물거리며 테이블 위로 난입했다.
“베리턴!!”
카시우스가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아기를 붙들었고 레니샤의 고개가 돌아갔다.
“세상에, 아가!”
오늘 새로 입힌 옷이 엉망이 되었다.
베리턴이 환하게 웃으며 레니샤의 뺨에 음식물이 묻은 손바닥을 얹었다.
“캬아! 아무!”
레니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카시우스가 엉망이 된 음식들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아직 렉서스 사체의 처우를 묻지 못한 시종이 한동안 레니샤의 뒤를 서성거렸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굳이 고할 필요 있겠는가.
시종이 뒤로 물러섰다.
렉서스의 죽음은 레니샤의 시간을 30초도 차지하지 못했다.
행복하게 웃는 사람들 뒤로 남겨진 패배한 자의 죽음은 이렇게 잊힐 것이다.
카시우스와 레니샤가 입을 맞추는 것을 마지막으로 시종이 완전하게 연회장을 떠났다.
남겨질 자들은 남았고 떠날 자들은 떠나야 할 시간이다.
쿵.
연회장의 문이 닫혔다.
과거의 영광을 내쫓은 채로.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