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마지막 만남 (129/135)


129화. 마지막 만남
2023.06.23.



 
플랜스 백작은 사실 자신 있었다.

지금 히엔트리의 병력은 양분되어 있었다.

그중의 반절은 플랜스 백작의 손아귀에 있었고 나머지는 산재해 있거나 힐로샤인, 그리고 황성에 있는 이들이 전부였다.

힐로샤인은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서 용병들과 퇴역한 군인들, 새내기들을 받아들여 몸집을 불렸다.

거기에 이단인 이족들을 더했으니 플랜스 백작이 퇴각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플랜스 백작은 이전과 다르지 않나.

주변의 세력들이 전부 플랜스 백작에게 합세했고, 황성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한 무엇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샴디르의 병력들도 제국을 빠져나갔고 이족의 병력은 힐로샤인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니 플랜스 백작이 우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대단한 오판이었다.

햇빛을 등진 카시우스가 위협적으로 플랜스 백작을 압박했다.

카시우스의 손에 들린 대검이 플랜스 백작의 목젖을 흔들림 없이 겨누고 있었다.


“……카시우스 공작…….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려 하지…….”

“아니.”

카시우스가 검을 움직였다.

좀 더 가까워진 검에 베어진 살갗에서 진득한 피가 흘렀다.

플랜스 백작이 저도 모르게 숨을 헐떡였다.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플랜스 백작을 옭아맸다.

플랜스 백작이 덜덜 떨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건 자네겠지.”

카시우스가 무심히 대답했다.


“렐라인 영애가 가진 아이, 정말 황제의 아이가 맞는가?”

플랜스 백작이 부들거리는 입술을 끌어 올렸다.


“맞, 맞습니다! 분명 렉서스 황제 폐하의…….”

플랜스 백작의 손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

스산한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플랜스 백작의 손을 잡은 기사 중 태반은 달아났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가 되었다.

붉은 뱀의 전설을 직접 마주한 이들은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다.

플랜스 백작이 몇 달 동안 준비한 전쟁은 고작 3시간도 되지 않아서 정리되었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식은땀이 등을 흥건하게 적셨다.

카시우스가 검을 움직였다. 플랜스 백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퍽!!!

어딘가에 대검이 틀어박히는 소리가 났다.

플랜스 백작이 눈을 슬그머니 떴다.

검은 플랜스 백작의 다리 사이에 박혀 있었다.

플랜스 백작이 목을 더듬더듬 만졌다.

아직 그의 목은 멀쩡하게 몸뚱이에 붙어 있었다.

꼴사나운 모습을 지켜보던 카시우스가 느리게 몸을 굽혀 앉았다.

플랜스 백작이 숨을 들이켰다.

날카로운 황금안이 불타고 있었다.

그가 조금만 실수해도 카시우스는 그를 한입에 집어삼키리라.


“……폐위된 황제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었다.”

“흡! 내, 내 딸의 명, 명예를 더럽히지 마시오! 분명히 황제의 아이였소!”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 누구도 폐위된 황제의 아이를 따르진 않을 테니 말이야. 보거라. 자네 곁에 누가 남아 있는가?”

“카시우스 공작……!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오. 히엔트리의 역사는 히엔트리의 핏줄과 함께해 왔소. 지금의 황제는……!”

“네 딸은 어디에 있지?”

지금까지 플랜스 백작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렐라인 플랜스를 찾기 위하여.

성을 전부 뒤졌는데도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카시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이런 대화를 반복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카시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카시우스가 검을 뽑아 등을 돌렸다.


“죽여. 그리고 렐라인 플랜스를 수색한다. 이 땅에 있다면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네!”

케인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카시우스가 케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렉서스는?”

“잘 숨겨두었습니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죄인들을 제도로 압송한다!! 역적들의 수괴인 플랜스 백작은 이 자리에서 본보기 삼아 처형할 것이다! 한 놈도 놓치지 말고 포박하라!”

“네!! 총사령관님!!”

카시우스가 검을 검집에 꽂았다.

***

렉서스의 앞에 상자가 놓였다.

과거, 어느 시절엔가 보았었던 익숙한 상자였다.

렉서스가 눈을 깜빡였다.


“이것이 무엇이냐.”

“레니샤 황제께서 보내셨습니다. 열어보세요.”

헬레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불로 몸을 돌돌 말고 있던 렉서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삐쩍 마른 몸은 상자를 열 힘도 없는 듯했다.


“열어.”

렉서스가 차갑게 뇌까렸다.

중독 증세로 덜덜 떨고 있는 손바닥으로 상자를 짚었다.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으시네요.”

헬레나가 피식 웃고는 상자를 열었다.

짠내와 뒤섞인 비린내가 방 안을 뒤덮었다.

렉서스가 몸을 뒤로 물렸다.


“이게 무엇이냐.”

“레니샤 황제께서 보내주신 선물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헬레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헬레나가 소금 상자 안에 든 것을 하나, 하나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플랜스 백작의 목, 이건…… 아, 이건 카나리아의 목, 그리고 이건…… 헨리의 목.”

썩어 문드러진 목이 트로피처럼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렉서스가 지독한 꼴을 보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치워라!!”

렉서스가 발버둥을 쳤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상자 뒤로 도열한 유령들이 렉서스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무력하게 망가진 채로 바닥을 기어 다니는 렉서스를 헬레나가 오시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그때,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렉서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황제 폐하.”

헬레나가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섰다.

레니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레니샤의 뒤로 카시우스와 루나, 린데이, 투리엘을 비롯한 여러 이들이 있었다.

유령들은 사라지고 렉서스의 적들만이 남았다.

렉서스가 빛이 바랜 보랏빛 눈동자로 레니샤를 응시했다.


“레니샤……. 나를 데리러……. 네가 나를 보러 왔구나.”

렉서스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다가 휘청거렸다.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모습을 레니샤가 움직임 없이 응시했다.

레니샤가 느리게 몸을 굽혀 열려 있는 상자의 뚜껑을 짚었다.


“렉서스, 당신이 나한테 선물해줬던 거잖아. 나도 그래서 똑같은 걸로 준비해봤어.”

레니샤가 미소 지었다.

봄꽃 같은 눈동자 속에는 서릿발이 몰아치고 있었다.

누군가를 향한 강렬한 적의와 분노로 불타올랐다.

공허했다.

레니샤의 복수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그녀가 잃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상실감은 여전히 레니샤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태까지 렉서스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렉서스가 죽고 나면 정말 남는 게 없는데…… 그 뒤의 허망함은 어떡해야 하나.

레니샤가 싸늘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웃어, 렉서스.”

렉서스가 밀랍 같은 표정으로 레니샤를 보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렉서스의 모든 것, 렉서스의 세상, 한 번도 손에 넣지 못했었던 그의 아내!

렉서스가 이를 까득 물었다.


“선물을 줬는데 왜 안 웃는 거지?”

레니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부모의 시체 앞에서 레니샤는 광대처럼 웃으며 춤을 춰야 했다.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다.


“레니샤…….”

렉서스가 손을 뻗었다.


“이러지 마……. 나한테 이러지 마.”

그의 눈에는 상자 속에 든 것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렉서스의 목소리가 물기로 젖었다.


“나의 모든 것.”

레니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제멋대로 세상을 편집하는 건 렉서스의 주특기였다.

자신이 바라는 것만 보고 판단한다.

레니샤가 혀를 짧게 찼다.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사랑한 적 없어, 렉서스.”

레니샤가 나긋나긋 속삭였다.

한 단어, 한 단어가 전부 렉서스에게 꽂혀 들어가도록.


 


“나는 한 번도 너를 본 적이 없어.”

“거짓말하지 마!!”

“동정이었고 연민이었지. 불쌍해서 당신을 구했는데 그게 내 인생을 망쳐놓을 줄이야.”

“그, 그럴 리 없어!! 사랑이었잖아! 나를 좋아했잖아!!!”

“그다음에는…… 증오했지. 손가락 하나 닿는 것도 싫었어. 얼마나 끔찍하던지.”

레니샤가 어느 때보다도 예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사랑한 건 이 남자야.”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끌어냈다.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레니샤가 고개를 기댔다.


“그건 들었나?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거. 나 정말 행복하거든.”

렉서스가 발버둥쳤다.

달려들려는 렉서스를 기사들이 제압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감싸 안았다.

오늘 반드시 와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동행하기는 했는데 저런 몹쓸 꼴만 보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눈을 가렸다.

레니샤가 부러 더 까르르 웃었다.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도록.


“렉서스, 앞으로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야. 그렇지?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어. 죽어서도, 다시 태어나서도 보지 말자.”

렉서스가 힘없이 늘어졌다.

죽은 개구리처럼 납작해진 렉서스를 두고 기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헬레나, 이만 돌아가자.”

“하지만, 폐하…….”

헬레나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렉서스를 돌아보았다.

제 손으로 목숨을 끊지 못한 게 한인 듯했다.

레니샤가 고개를 저었다.


“저게 더 비참할 게다. 나는 저놈을 가장 비참하게 죽게 해주겠다고 맹세했거든.”

“……예.”

헬레나가 고개를 조아렸다.

헬레나가 레니샤의 뒤에 섰다.

레니샤의 복수는 이것으로 끝났다.

렉서스는 바닥을 기어 다니는 지렁이보다 더 비참하고 초라해졌다.

이다음에 어떤 선택을 하던 그건 렉서스의 몫이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와 함께 방을 빠져나왔다.


“아니야!!! 가지 마, 레니샤!! 나를 두고 가지 마!!!”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레니샤는 한순간도 멈춰 서지 않았다.

레니샤가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지켜보다가 죽으면 고하라.”

“네, 폐하.”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정말 웃긴 일이다.

렉서스는 정말로 레니샤를 사랑했다.

그 저주스러운 것도 사랑이었다.

레니샤가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카시우스의 품에 고개를 묻은 레니샤가 숨을 몰아쉬었다.


“슬픕니까?”

“아니요. 여전히 후회해요. 저 남자를 내 저택에 들여놓았던 그날을.”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꼭 끌어안았다.


“더 안아줘요, 더……. 너무 추운 것 같아.”

아기처럼 웅크린 레니샤를 꼭 안았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입술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레니샤의 감정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렉서스에게 잃은 것이 많은 자들은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단단한 철옹성 같았던 렉서스는 무너졌고 그가 제국에 드리웠던 공포는 사라졌다.

지금은 레니샤처럼 부드러운 바람과 가끔 나타나는 꽃샘추위만이 제국을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렉서스는 사라졌음에도 그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람들의 깊은 가슴속에.


“평생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

카시우스가 속삭였다.


“당신을 춥게 하지 않겠습니다.”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됐다. 그거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짙은 상실감과 허무함을.

이 또한 시간이 흐르면 옅어질 감정이었다.

레니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