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마지막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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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마지막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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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마지막 전쟁
2023.06.20.
플랜스 백작은 불탈 시체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를 해주었다.
그나마 시체를 보존할 수 있도록 독으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창백하게 질린 렉서스의 얼굴과 새파란 입술 같은 것들에 연민이 들었다.
렐라인이 하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온 게야.”
독에 당한 렉서스의 시신을 흰 천으로 덮었다.
“하, 하지만…… 아버지…….”
렐라인이 더듬거렸다.
“얼른 올라가.”
렐라인이 렉서스를 힐끔 보았다.
한동안 부부로 살았던 사람이다.
한때는 렉서스의 황후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렉서스는 렐라인의 꿈이었으며 가장 높은 곳으로 안내할 등대였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무력하게 누워 있는 걸 보니 두려움이 앞선다.
손발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플랜스 백작이 렐라인 앞을 막아섰다.
“올라가라고 했잖니!”
렐라인의 어깨를 붙들고 방 밖으로 쫓아냈다.
렐라인이 눈물 고인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가.”
플랜스 백작이 렐라인에게 손짓했다.
마음이 허한 것은 플랜스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렉서스는 공포 정치의 표상이었다.
사람들은 렉서스를 두려워했다.
무너질 리 없다고 생각했었던 천년의 요새 무너진 것을 지켜보는 것 같다.
플랜스 백작이 스산한 마음을 삼키며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하아. 그러게 왜 그렇게 약해지셨소.”
이건 모두 렉서스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의 황좌가 영원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아니, 그 이후에 도망쳐 나왔을 때 렉서스가 황좌를 되찾을 의지만 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플랜스 백작은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온갖 핑계를 가져다 붙였다.
식어가는 렉서스의 시체 앞에서.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사실 당신만큼 힘의 생리에 대해서 잘 아는 자도 없지 않소. 약자가 되면 강자에게 물어뜯겨 죽는 거지.”
플랜스 백작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손길로 렉서스의 손등에 키스했다.
“잘 가시오.”
마지막으로 떠나는 자에 대한 인사였다.
플랜스 백작이 몸을 돌려 고개를 끄덕였다.
기름통과 등불을 든 이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뜨거운 불길이 솟구쳤다.
여기가 플랜스 백작이 렉서스를 위해 준비한 무덤이었다.
***
“후우…….”
숨을 헐떡이며 키엔이 등에 업고 있던 남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풀숲 위를 구르는 남자의 얼굴은 창백하니 핏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산 자라고는 믿기 힘든 얼굴이었다.
루나가 쭈그리고 앉아서 남자의 뺨을 쿡 찔렀다.
“진짜 살아 있는 거 맞아?”
키엔의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얼굴에는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하지만, 형형한 눈빛은 조금도 때 묻지 않았다.
바닥을 구르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는 눈빛은 생생하기만 했다.
헬레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직접 독을 바꿨어. 그리고 독이 배달되고 저놈이 마시는 것까지 확인했지. 절대로 잘못됐을 리 없어.”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엔이 품에서 물약을 꺼내 남자의 입 안에 흘려 넣었다.
해독제였다.
파랗던 얼굴에 천천히 핏기가 돌아왔다.
렉서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망 선고를 받았던 렉서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격렬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한 렉서스가 몸을 떨었다.
한참을 풀 위를 붉은 피로 물들이던 렉서스가 고개를 들었다.
흐리멍덩하던 보랏빛 눈동자에 점점 초점이 잡혔다.
렉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어디지?”
“어디긴.”
키엔이 손가락으로 플랜스 백작의 성을 가리켰다.
고요에 젖은 성이 스산했다.
공기 속에는 짙은 재 냄새가 섞여 있었다.
“……불이 났었나? 나를 어떻게 밖으로 데리고 온 거지?”
기억이 온전하지 않았다.
렉서스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질문을 바꿔서 하지.”
렉서스가 키엔을 노려보았다.
“나를 왜 살린 거지?”
“아직 황제께서 폐황제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니까요.”
키엔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렉서스가 황제라는 말을 곱씹었다.
지금의 히엔트리를 다스리는 건 레니샤…….
“레니샤가 나를 원하는 건가?”
렉서스가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 올린 렉서스가 키엔을 붙들었다.
“그렇지? 레니샤도 드디어 나의 가치를 알게 된 거야! 그러니 나를…….”
키엔이 버러지를 보는 눈빛으로 렉서스를 응시했다.
대체 그게 어떻게 그렇게 해석되는 거지?
***
플랜스 백작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은 황성에서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플랜스 백작은 아직 배도 나오지 않은 렐라인을 앞세워 세력을 모았다.
렉서스라는 침몰하는 배에 올라타고 있었던 자들이 음지에서 나와 플랜스 백작을 중심으로 모여 검을 들었다.
레니샤의 말대로 열매가 무르익었다.
새벽녘의 황성은 고요했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검을 감추고 있었다.
카시우스는 내일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 떠난다.
레니샤 치세에서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다.
이것으로 렉서스의 남은 잔당들을 처리한다.
카시우스가 팔짱을 낀 채로 발코니에 기대 있을 때였다.
뒤에서 레니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시우스.”
레니샤가 사뿐사뿐 걸어와 카시우스의 품에 안겼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이마에 키스했다.
아이를 가진 이후로 레니샤는 몸가짐을 조심하고 있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와는 다른 시대를 살아갈 아이였다.
그들은 이 아이에게 빛과 행복만 안겨주고 싶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의 과거에 드리워진 먹구름 같은 건 조금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레니샤는 그러기 위해서라도 날카로운 칼춤을 추기로 마음먹었다.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는 자들은 제거한다.
레니샤와 카시우스의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렉서스의 비참한 마지막도 다가오고 있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가슴에 이마를 댄 채로 말했다.
“……일주일 안으로 돌아와요. 아이 곁엔 아버지가 있어야죠.”
“노력하겠습니다.”
카시우스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니샤는 여전히 작고 여렸다.
이 작은 몸속에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그동안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어야 합니다. 잠도 자야 하고요. 주치의 말엔 귀를 기울이고……. 왜 웃습니까?”
카시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레니샤는 카시우스가 하는 말을 들으며 대답 없이 웃고 있었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카시우스. 그리고 이미 나는 충분히 잘 먹고 잘 자고 있어요. 고작 일주일 사이에 얼마나 쪘는지 알아요?”
카시우스가 심각한 얼굴로 레니샤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레니샤의 주장을 틀렸다.
최소한 이 손목이 부러지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잠시 황제의 권위를 내려놓는 동안의 레니샤는 불안할 정도로 가녀렸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주치의도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아기의 성장에는 레니샤의 건강도 중요하다고요.”
레니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여튼, 잔소리.”
뾰로통한 얼굴로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애처럼 잘 먹고, 잘 자고 있을게요. 일도 줄이고.”
레니샤가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카시우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레니샤는 카시우스에게 그가 예상하지도 못했었던 행복을 한 아름 안겨준다.
카시우스는 종종 레니샤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곤 했다.
연회장 문 틈 사이로 마주쳤었던 그 눈동자를 말이다.
렉서스에게 붙들린 채로도 절대 죽지 않았었던 타오르던 불꽃이 분명 그 눈 안에 있었다.
운명처럼 홀렸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한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카시우스가 감정에 받쳐 레니샤를 꼭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목덜미에 속삭였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당신 곁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우스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최대한 빨리 돌아와요. 건강하게 기다리고 있을게.”
레니샤가 나른하게 웃었다.
***
플랜스 백작이 긴장한 얼굴로 난간을 잡았다.
그를 따르는, 아니. 지나간 영광의 잔재와 같은 자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기는 게 중요한가? 우리에게는 명분이 있고, 지금의 황제는 반역자일 뿐이야. 그리고……. 이 길이 아니면 자네에게 또 다른 답이 있는가?”
플랜스 백작에게 물었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있는 자들은 지금 절벽 끝에 발을 딛고 선 것과 같았다.
렉서스 황제의 부산물처럼 남아서 레니샤에게 몰이를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누리지 못 하리라.
짙은 패배감과 후회가 뒤따랐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렉서스는 무너졌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이길 수 있는 확률이 있습니까?”
플랜스 백작이 렐라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 막 임부가 된 딸은 심한 입덧으로 점점 마르고 있었다.
플랜스 백작의 욕심으로 이리저리 떠밀린 딸이 아니던가.
“……황제의 적통이 다음 황제가 되어야지.”
플랜스 백작이 말을 돌렸다.
“죽은 렉서스 황제를 더 이상 욕되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그분 앞에 섰을 때 최소한 들고 있을 얼굴은 있어야지.”
모여 있던 자들 얼굴에 패색이 서렸다.
동이 터왔다.
저 먼 지평선을 따라 새까맣게 몰려오는 이들이 보였다.
플랜스 백작이 차가운 침을 삼켰다.
두려움에 다리가 떨릴 지경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그를 짓밟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새로운 황제의 군대가 그들을 도륙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간신히 사람들을 끌어모아 이 성을 채웠는데 그보다 수가 월등하게 많아 보였다.
플랜스 백작이 침을 삼켰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봐야지! 저들은 역적이다! 감히 황제를 사냥한 저들의 죄를 심판하라!!”
플랜스 백작이 배 속 가득히 들어 있던 공기를 뽑아냈다.
긴장감으로 가득 찬 기사들이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활을 든 자들을 앞에 세우고 화살에 불을 붙여라! 저들에게 뜨거운 맛이 무엇인지 보여줄 것이다!!”
플랜스 백작의 말을 따라 기사들이 화살에 불을 붙였다.
레니샤 황제의 인장을 깃발로 든 이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붉은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황제의 집행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빨간 태양이 떠올랐다.
남자는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카시우스 공작……!’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플랜스 백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누가 먼저 시작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리숙한 기사가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활시위를 놓친 것일지도.
바닥에 꽂힌 불화살 한 개를 시작으로 마지막 전쟁이 시작되었다.
붉은 뱀의 그림자가 플랜스 백작 가의 위로 드리워졌다.
위협적인 자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