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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대가를 지불하는 것 (126/135)


126화. 대가를 지불하는 것
2023.06.13.


힐로샤인에도 거북이처럼 느린 속도이기는 해도 평화가 찾아왔다.

브릭스턴의 재활이 시작되었다. 밀빛 피부는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해졌고 누워만 있었던 몸에서는 근육이 어느 정도 빠지는 바람에 좀 더 메말라 보였다.

그럼에도 짙은 눈썹이나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삶을 향한 의지와 고집이 느껴졌다. 브릭스턴의 이마 위로 땀이 맺혔다.


“잘하고 있어요, 브릭스턴!”

헤일린이 주먹을 움켜쥐고 응원했다. 한동안 수심에 잠겨 있었던 헤일린의 작은 얼굴엔 미소가 옅게 어려 있었다. 브릭스턴이 그것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분명 있었다. 다리는 멋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이 몸으로는 수련조차 할 수 없었다.

평생 검을 잡고 살아온 브릭스턴에게 이건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웃고 있는 헤일린을 보면 무엇도 포기할 수 없었다.

브릭스턴은 반드시, 오래오래 살아서 헤일린과 이사벨라를 지켜야 했다. 지켜 주지 못했었던 만큼!

브릭스턴이 누워 있는 동안 헤일린은 이사벨라와 브릭스턴뿐만 아니라, 힐로샤인을 훌륭하게 지켜 냈다. 헤일린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브릭스턴이 고통을 이겨 내고 마지막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헤일린이 브릭스턴을 꼭 끌어안았다. 헤일린이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브릭스턴. 정말, 정말 고마워요.”

숨 가쁜 그 목소리를 들으며 브릭스턴이 몸에 힘을 풀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재활을 생각하면 하루, 하루가 고통이었으나 헤일린의 웃는 얼굴을 생각하면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게 다행이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했다. 이런 일을 당한 게 브릭스턴이라서 다행이라고. 이 고통을 헤일린이나 이사벨라와 나눠 지고 싶지 않았다. 브릭스턴이 헤일린에게 몸을 살짝 기댔다.


“나도 고마워, 헤일린. ……사랑해.”

브릭스턴이 속삭였다. 헤일린이 브릭스턴의 품에 고개를 비볐다.

처음, 이사벨라를 제도로 보낼 결정을 했을 때는 속상했다. 이번에도 그들이 부족하고 모자라 아이를 떼어 놓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사벨라는 새로운 세상에서 즐거운 경험을 하고 있었고, 헤일린은 브릭스턴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사벨라를 생각하고 있는 건 브릭스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이사벨라는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레니샤를 못 믿는 건 아니죠? 이사벨라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대요.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색다른 경험을 하면서.”

“……이곳의 기억이 행복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브릭스턴이 씁쓸하게 말했다. 이사벨라가 그렇게 상처받은 것도 전부 그가 못나서 벌어진 일 같았다. 헤일린이 브릭스턴의 등을 쓸었다.


“브릭스턴, 그래도 우리는 이사벨라를 지켜 냈어요.”

“어쩌면 그 아이가 살아남은 것일지도 모르지. 그 아이는 우리보다 더 강한 아이야.”

전쟁과 상황에 얼룩져 아이의 얼굴에 서글픈 그림자가 졌을지는 몰라도, 이사벨라는 강했다.


“아카데미엘 다니고 싶어 한대요. 거기서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다나.”

“푸훕. 가끔 보면 그 애는 레니샤를 닮았어. 레니샤도 그랬었거든.”

“레니샤가 이사벨라를 하도 끼고 돌아서 그래요.”

헤일린도 옅게 웃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닮을 만도 하지.”

이 잔잔한 일상이 너무나 소중하다. 헤일린은 브릭스턴과 최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고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이번에 헤일린이 깨달은 게 있다면, 후회하면 늦는다는 거다.

그대로 브릭스턴이 일어나지 못했더라면 헤일린은 마음속에 담아 둔 말 한 마디도 전하지 못하고 그를 보냈을 것이다.


“사랑해요, 브릭스턴.”

제발, 이 일상이 지속될 수 있기를. 어쩔 때는 아프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겠지만, 그 순간에조차 곁에 있을 수 있기를. 행복이 지긋지긋할 때까지 지속되기를.

헤일린이 간절하게 기도했다.


 
평화로운 힐로샤인에 헨리가 도착한 것은 그날 오후의 일이었다. 힐로샤인의 배신자, 그가 돌아왔다. 힐로샤인의 검은 그림자에 또다시 피의 무게가 더해질 시간이었다.

***



“오늘은 로테라에 대해서 논하겠네.”

레니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레니샤는 이전과 많이 변했다. 날카롭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던 때와 달리 지금은 부드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니샤 본연의 위엄이나 카리스마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심연 속에 위압감을 품고 겉을 잔잔한 수면으로 감싼 것 같달까.

보이지 않는 게 더 두려운 법이다.

그런 상황에 로테라라니. 그 이름은 듣기만 해도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폐위된 황제는 로테라를 억울하게 멸문시켰고, 앞에 앉은 황제는 그 로테라의 자손이다.

게다가 로테라의 살아남은 자손들이 돌아오지 않았던가. 거기에 더해서 카시우스가 로테라의 이름을 잇고 있었다.

내각대신들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명징한 답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떤 말을 해도 반드시 허점이 생길 것 같았다. 지금 레니샤가 바라는 건 무엇인가.

누가 먼저 입을 여나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덴버스 후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요사이 레니샤의 최측근으로 급부상하여 미혼의 딸을 가진 귀부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는 주인공이었다.


“로테라는 가졌던 위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몰수되었던 로테라의 자산을 돌려주고, 그들의 누명을 벗겨 내야 합니다.”

저것이구나. 황제가 되었다고는 하나 레니샤의 뿌리는 로테라에 있었다. 이 기묘한 상황에서 덴버스 후작이 길을 제시한 것이다.


“맞습니다! 로테라는 죄인이 아니라 영웅입니다. 그들은 벌이 아니라 상을 받아야 하는 이들입니다!”

귀족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레니샤가 생긋 웃었다. 봄날 같은 분홍색 눈동자가 왜 이럴 때면 피를 머금은 붉은빛으로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귀족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레니샤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다들 그렇다고 생각한다니 나 또한 고려하겠네. 자, 그렇다면 로테라의 주인은 누가 되어야 마땅한가?”

내각대신들의 입을 다시 한번 틀어막는 질문이었다. 백합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내각대신들을 보며 덴버스 후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꼴을 보고 있으면 지금쯤 의상실에서 편하게 일하고 있을 투리엘이 부러워진다.

이런 자리에 오기 싫다고 다 내던지지 않았던가.

덴버스 후작이 혀를 찼다.

항상 차려진 밥만 먹던 자들이니 말할 용기나 있겠는가.


“로테라의 주인은 브릭스턴과 그의 자손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덴버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카시우스 공작이 아니라?”

“카시우스 공작의 자손은 황족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출산하실 분이 황자님이실지, 황녀님이실지 알 수는 없으나 두 분 중 한 분은 황제가 되실 겁니다.”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레니샤가 한심한 작자들에게 눈을 한 번 굴리고는 다시 덴버스 후작을 응시했다.


“그러니 그분들께는 로테라의 작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로테라는 국가의 위기 상황에 제일 먼저 나서는 가문입니다. 그러니 그 의무를 다해 온 헤일린 부인이 그 자리를 맡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브릭스턴 경께서는 장애를 얻으셨습니다. 로테라의 가주 직을 맡으시는 건 힘드실 겁니다. 대신 브릭스턴 경은 로테라의 검법을 전부 익히신 분입니다.”

덴버스 후작이 잠시 말을 쉬고 물로 목을 축였다. 그 누구도 덴버스 후작을 이어 입을 열려 하지 않는다. 결국 덴버스 후작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쟁으로 로테라의 기사 수가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니 브릭스턴 경께는 새로운 기사를 육성하는 일을 맡기소서.”

“오! 그러면 되겠구만.”

말을 꺼낸 재무대신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생각을 먼저 하지 못한 그의 무능함이 돋보였다.


“추가로 카시우스 공께는 새로운 작위를 수여하심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그분께서는 쵸르파 평야에서 세우신 공적에 대한 대가를 아직 제대로 받지 못하셨습니다.”

“……호오. 후작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네. 이 논의는 다음에 이어 하도록 하지. 그다음, 메테오 왕자와 샴디르에 어떤 보상을 하는 게 좋을지 논의해 보지.”

레니샤가 그다음 화제를 꺼냈다. 메테오는 아직까지 제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레니샤를 도와서 제도가 안정을 되찾는 걸 돕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도움에는 대가가 없을 수는 없었다. 레니샤는 마음에 얹힌 돌덩이 같은 부채감을 덜어 내기 위해서라도 메테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었다.


“……음.”

내각대신들이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다. 레니샤가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입이 무거운 자들을 들였군.”

다행히 그 와중에도 생각이 있는 자가 있기는 했다.


“메테오 왕자께서는 폐하께서 이 자리에 오르시는 데 큰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사실, 신분과 명분으로 따져도 그분을 후궁으로 들이는 게 합당하다고 사료되옵니다.”

후궁! 그렇지, 그런 제도가 있었지!

내각대신들 사이에 파란이 일었다. 메테오 왕자를 후궁에 들이고 나면 그다음은 더 쉬울 것이다. 새로운 후보들이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소란도 금세 가라앉았다.


“아쉽게도 나는 한 명으로도 벅차.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어떻게 그들을 전부 돌보겠나. 분명 서운한 자가 생기겠지.”

그리고 레니샤는 카시우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카시우스의 세상엔 레니샤가 전부였다.

그녀의 말 한 마디에 벌벌 떠는 그 착한 남자가 눈물 흘리는 건 싫었다. 레니샤는 그녀의 강아지에게 아주 후하고 관대한 편이었으므로, 이번에도 그를 위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


“앞으로도 후궁을 들일 일은 없을 것이네.”

“하지만, 폐하!”

“본디 후궁은 황실 자손을 많이 남기기 위해서 시작한 제도였지.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 나 하나가 아니던가.”

레니샤가 턱을 괸 채로 삐딱하게 웃었다.


“사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생각해 보지.”

절대로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다. 귀족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메테오 왕자에게도 합당한 작위를 내리는 건 어떻습니까? 그리고 샴디르와 협상을 통해서 그들이 바라는 것을 들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호. 샴디르가 바라는 것.”

메테오는 그저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총량을 재어 봤을 때 오히려 은혜를 갚아야 하는 건 레니샤 쪽이다.

레니샤가 생각에 잠겼다.

샴디르가 어떤 요구를 할지 조금도 짐작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회의는 끝났다. 그리고 그 대답은 샴디르에서 내어놓았다.

요약하자면.


‘레니샤의 은혜를 입은 어린 황녀가 떼를 쓰는 것을 못 이기겠으니, 그 아이를 받아 줬으면 좋겠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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