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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지난날의 대가 (123/135)


123화. 지난날의 대가
2023.06.02.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적군의 손에 죽느냐, 그나마 희미한 가능성에 배팅을 하느냐.

카시우스의 의식이 그날로 끌려 들어갔다.

***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이었다.

붉은 뱀이 고개를 치켜들고 날카로운 눈으로 카시우스를 응시했다.

세 뱀 신이 죽고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붉은 뱀의 기색은 여전했다.

영혼만 남았어도 신은 신이라는 건가.

영혼까지 불태울 것 같은 열기를 뚫고 들어온 카시우스의 피부는 군데군데 새까맣게 타 있었다.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통각이 느끼는 감각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받아들이는 경로를 차단한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모든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카시우스가 녹아내린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형형한 안광으로 붉은 뱀을 응시했다.


[여기까지 오는 인간이 다 있군.]

까끌한 웃음기가 녹아 있는 목소리였다.


“잃을 게 없어…… 왔습니다.”

카시우스의 목소리는 꺼져버릴 촛불처럼 가녀렸다.

카시우스가 숨을 헐떡였다.


“무엇이라도 해보자 싶어서…….”

이족들을 잃고 가족을 잃었다.

노예 검투사로서의 삶을 살다가 전쟁터로 흘러 들어갔다.

좋은 상관을 만나 제국으로 금의환향할 줄 알았는데, 미친 황제는 그 상관마저 죽였다.

로테라 공작이 억울하게 죽었다.

이제 더 이상 카시우스는 기댈 곳도, 기대할 것도 없었다.

아군은 전쟁터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테라 공작의 죽음이 적군에게 알려지면 끝이다.

그들은 총사령관을 잃은 오합지졸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였다.

그래서 카시우스가 이곳에 서 있는 것이다.

잃을 게 없어 두려울 게 없었고, 어차피 내놓은 목숨이라 망설임도 없었다.


[……삶의 마지막에 서 있군.]

붉은 뱀의 혀가 카시우스의 피부를 훑었다.


[내 이름은 케로스. 죽음 앞에 선 자여.]

붉은 뱀의 눈가가 휘었다.

왠지 웃고 있다고 여겨졌다.

카시우스가 바닥에 개구리처럼 엎어진 채로 고개만 들어 붉은 뱀을 응시했다.

일분일초가 흐를 때마다 카시우스의 몸은 녹아내리고 영혼은 무너지고 있었다.


[죽음의 불꽃을 건너 내게 닿은 자여. 나는 인간과의 약속에 따라 내 모든 힘을 네게 내어주리라.]

카시우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붉은 뱀이 하는 말들이 전부 흩어져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눈을 감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붉은 뱀의 힘을 받아들이기 전에 육체가 붕괴될 것 같았다.

카시우스가 입을 벌리면 재와 불꽃이 밀려 들어왔고 숨을 내쉬면 거기에 유황 냄새가 뒤섞였다.

이곳이 바로 불의 지옥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으리라.

카시우스가 완전히 숨을 놓으려던 순간이었다.

동굴을 태우고 있던 불꽃들이 카시우스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카시우스의 몸이 들썩였다.

녹았던 피부는 다시 재생되었고 사라졌던 눈꺼풀이 생겨났다.

다 떨어져 나갔었던 손톱과 발톱도 돌아왔다.

카시우스가 신의 힘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허억!!!”

카시우스가 돌연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태초의 인간으로 돌아가 어떤 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카시우스가 다시 태어났다.

카시우스가 몸을 일으켜 제 손과 발을 확인했다.

불에 타 떨어져 나갔었던 왼팔이 멀쩡했다.

발가락도 다 달려 있었고 새까맣게 탔었던 피부도 본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어떤 열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카시우스가 동굴 안을 돌아보았다.

불꽃은 사라져 있었고 붉은 비늘을 농염하게 빛내던 사체는 빛을 잃고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카시우스가 천천히 다가가 몸체에 손을 얹었다.


[신의 힘을 탐한 자여. 항상 몸과 정신을 수련하라. 네가 빈틈을 보이는 순간 나는 망설이지 않을 테니.]

카시우스의 몸에 전율이 일었다.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리라 여겼던 일을 성공한 것이다.

카시우스는 살아 있는 신, 그 자체가 되었다.

***



“카시우스, 카시우스!!”

예니카가 더듬거리며 카시우스의 팔을 당겼다.

무슨 일인지 카시우스의 숨이 멎은 것이 느껴졌다.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에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예니카에게는 큰일로 느껴졌다.

예니카가 무너지듯이 카시우스의 팔에 매달렸다.

카시우스가 예니카를 부축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예니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카시우스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예니카가 서러운 숨을 토해냈다.

카시우스의 숨이 멎는 순간, 그녀의 숨도 멎었다.

더 이상 살아 있을 이유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정말 괜찮습니다, 어머니.”

카시우스가 예니카를 품에 안았다. 예니카가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예니카의 말대로였다.

카시우스의 힘은 그를 지탱하고 있는 동시에, 그를 노리고 있었다.

카시우스의 싱그러운 육체와 영혼을 말이다.

언젠가 이 힘은 카시우스를 삼켜 버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후회하느냐 묻느냐면.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저는 이 힘으로 살아남았고.”

살인귀가 되어 적군을 도륙했다.

붉은 뱀의 비늘은 검과 화살, 창이 통하지 않았으며 뱀의 이빨은 날카로워 인간을 단번에 찢어발겼다.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하여 레니샤를 만나고, 살아 있는 예니카를 만났다.

카시우스의 희생은 그것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그러니 후회하지 않습니다.”

예니카가 카시우스의 옷자락을 손 안 가득히 움켜쥐었다.

운명은 예니카를 이곳으로 인도했다.

분명 예니카가 여태 죽지 못하고 살아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카시우스를 위해서 마지막엔 하나쯤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예니카가 목걸이를 더듬어 움켜쥐었다.

생명줄이라도 된 것처럼 강렬하게.

***

그 시각, 레니샤는 대신관을 만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알현을 청한 대신관은 레니샤의 요청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저희 신전은 황제 폐하의 신성성과 정당성을 확인하였습니다.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 힐로샤인으로 천도하신다는 뜻을 밝히셨으니, 그에 대한 위험성을 확인한바.”

레니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위험성?

저들이 말하는 위험성이야 신전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이리라.


“힐로샤인의 기운을 튼튼히 하고 새로이 시작될 제국을 위하여 신전 또한 폐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사실 신전은 제국민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고 불안감을 해소해주며, 종종 민생 안전에 기여해주는 데에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물론, 히엔트리의 법은 신전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모든 법을 수호하는 역할도 하고 있긴 하나, 법의 집행은 재판관으로부터 이루어지므로 실권은 없었다.

신전을 배제한다고 해도 레니샤로서는 별로 아쉬울 게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적폐를 청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신전은 선대 황제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명분이 되어 왔다.

이족에게 이단의 낙인을 찍은 것처럼.


“힐로샤인까지? 그대들의 뜻이 그렇다면 나 또한 막을 생각은 없네.”

대신관의 표정에 환희가 어렸다.


‘역시 아무리 자기가 대단하다고는 한들 혼자의 힘으로 황위를 지탱할 수는 없겠지! 신전의 도움이 필요할게야!’

그런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레니샤가 그다음으로 꺼낸 말은 대신관의 기대를 완전히 배신했다.


“하지만, 그에 들어가는 비용은 황성에서 지출해줄 수 없네.”

“예?”

대신관이 얼뜨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히엔트리엔 개혁의 바람이 관통하고 있지. 대신관도 알다시피 들어갈 돈이 한두 푼이 아니군.”

렉서스가 히엔트리에서 공포정치를 펼치며 제국의 돈을 닥닥 긁어모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귀족의 목을 자르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런데 국고의 돈이 모자라다고?

레니샤가 생긋 미소 지었다.

햇빛이 내려앉은 레니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떤 남자의 마음이라도 설레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이었지만, 대신관에게 그런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레니샤의 등 뒤로 버티고 선 거대한 무언가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세 뱀 신의 가호가 레니샤와 함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신관이 입을 벙긋거렸다.


“신전의 일은 신전이 알아서 해줬으면 싶은데. 그게 가능하다면 힐로샤인에 연통을 넣어 자리를 확보해달라는 말 정도는 전할 수 있겠지.”

“폐하, 하지만……!”

“대신관.”

레니샤가 대신관의 말을 잘랐다.


“자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로테라가 무너질 때 자네는 어디에 있었나.”

대신관이 입을 조가비처럼 다물었다. 그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폐하, 그 일은……! 폐위된 황제가 멋대로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쵸르파 평야를 되찾아와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한 것은 대신관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쵸르파 평야에 깃든 선조의 얼과 세 뱀 신의 기운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했었었나.”

레니샤의 눈이 가볍게 휘었다.

대신관은 로테라의 죽음에 작은 기여를 했다.

그들의 등을 전쟁터로 떠밀고.


“게다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전투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을 텐데.”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그곳에 신의 뜻이 있다며 로테라 공작의 등을 떠민 건 대신관이 보낸 공문이었다.


“그, 그건 제가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저…… 직인 하나만 빌려드렸을 뿐, 전부 폐황의 뜻이었습니다!!”

대신관이 하얗게 질려서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고집스러운 눈빛이었다.


“정말로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내 생각 또한 자네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그간 자네가 나를 위해서 해준 일들은 잊지 않고 있네. 그렇기에 나는 자네에게 과거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네.”

대신관의 주름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레니샤의 말들이 창이 되어 대신관을 공격했다.


“내게 더 내어줄 게 있다면 찾아오게. 고해성사를 해도 좋겠지.”

대신관이 이를 악물었다.

고해성사. 모든 죄를 인정하라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대신관은 그의 자리를 내려놓고 떠나야 했다.

레니샤의 날카로운 분홍빛 눈동자는 조금의 자비도 없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후회……하실 겁니다. 히엔트리 제국은 세 뱀 신께서…….”

“신들께서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도 지켜볼 일 아닌가? 만약, 내가 틀렸다면 하늘이 내게 벌을 내리겠지. 하지만, 하늘은 어떤 응답도 없으시니…….”

레니샤의 미소가 도드라졌다.

햇빛에 비친 레니샤의 모습이 성스러워 보였다.


“이건 어찌 된 일인가, 대신관.”

대신관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난날의 방관이 대신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

그날 밤, 레니샤에게도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다.

브릭스턴이 의식을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헬레나가 소식을 전해왔다.

전자는 기뻤고 후자는 기대를 심어주었다.

무엇 하나 레니샤를 배반하지 않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하늘은 레니샤의 편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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