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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예니카가 보는 과거 (122/135)


122화. 예니카가 보는 과거
2023.05.30.



 
예니카의 일행에게는 여독을 풀 수 있는 방이 주어졌다.

레니샤와 카시우스는 여전히 예니카를 만난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주눅 든 이사벨라만 아니었다면 레니샤는 내내 예니카가 한 말을 곱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니샤의 혼란과 그녀의 고뇌를 콕 짚어주던 그 말들은…….


“고모! 고모는 이사벨라가 반갑지 않은 거야?”

레니샤가 고개를 저어 정신을 차렸다.

소파에 기대 앉아 있던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몸을 바로 세웠다.

커다란 회색 눈동자가 서글픔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유독 타인의 눈치를 본다.

이사벨라가 이렇게 된 데에는 레니샤도 한몫했을 것이다.

린데이가 이사벨라 뒤에서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환경이 불안하신 모양입니다.’

그럴 만도 했다.

이사벨라는 제도에서 제 부모를 잠시 잃었었다.

이곳이 이사벨라에게 좋은 기억일 수만은 없었다.

레니샤가 이사벨라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럴 리가 있겠니, 이사벨라. 이리 오렴.”

이사벨라가 망설이다가 레니샤의 품에 꼭 안겼다.


“……사람들이 고모를 폐하라고 불러요. 이사벨라가 아는 황제는 나쁜 사람인데……. 고모도 나쁜 사람이 된 건가요?”

이사벨라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 린데이도 아이의 혼란을 알아차렸다.

이사벨라는 묘한 부분에서 어른스럽고, 또 이상한 부분에서 어린아이 같았다.

그건 불안정한 이사벨라의 유년 시절을 투영하고 있는 듯했다.

레니샤가 안쓰러운 마음으로 이사벨라의 등을 쓸었다.

아이에게 렉서스가 얼마나 가혹했는지 레니샤도 안다.

이 아이의 몸을 가로지르는 상처와 변해버린 눈동자 색이 그 증거였다.

많이 자라기는 했지만, 머리를 길게 기른 귀족 영애들보다는 월등히 짧은 머리카락도 레니샤의 죄책감의 일부였다.

이사벨라가 그런 혹독한 일을 겪을 필요는 없었다.

이런 어린아이에게까지 칼을 세워야 했었던 렉서스의 잔인함에 욕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레니샤가 소중한 꿀단지처럼 이사벨라를 품고는 귀에 속삭였다.


“그럴 리가 있겠니. 고모가 미안. 이사벨라에게 제대로 된 이야기도 해주지 못했구나.”

이사벨라가 레니샤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괜히 어린애처럼 굴고 있다는 자각은 있지만, 레니샤가 이렇게 안아주고 있으니 괜찮다.

이사벨라는 좀 더 투정을 부려보기로 했다.


“나는 절대로 나쁜 황제는 되지 않을 생각이란다. 렉서스 황제와는 절대 다른 사람이 될 거야. 이사벨라에게 약속하마. 내가 나쁜 황제가 된다면 이사벨라가 와서 나를 꾸짖어주면 되지 않겠니?”

“내가?”

“그럼.”

“황제의 명은 어겨서는 안 된대요, 고모. 이젠 고모라고 부르면 안 돼?”

“불러도 돼.”

레니샤의 말에 이사벨라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환해졌다.


“황제는 아주 높은 사람이라……. 함부로 명을 어기면 죽을 수도 있…….”

“쉿. 이사벨라, 앞으로 네게 그런 위험한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아. 이 고모가 약속하마. 고모가 약속한 걸 지키지 않는 걸 본 적 있니?”

“……금방 돌아올 거라고 해놓고…….”

아. 레니샤가 이마를 짚었다.

어린아이에게는 어떤 약속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여상하게 했었던 그 말이 어쩌면 이사벨라에게는 상처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여전히 레니샤는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미안, 이사벨라. 그건 정말 미안. 고모가 해야 할 일이 많았어.”

“이사벨라를 잊어버릴 만큼?”

할 말을 잃은 레니샤가 이사벨라의 이마에 키스했다.


“나쁜 기억은 잊어버리렴, 이사벨라.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할게.”

이사벨라가 잠시 그렇게 머물러 있다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사벨라 너와 네 친구들에게 좀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줄 의무가 있어.”

“……그건 어려워요.”

“그냥 쉽게…… 이사벨라가 보기에 나쁜 황제가 되지 않겠다는 이야기야.”

“약속.”

이사벨라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레니샤가 자신의 것을 걸었다.

한참을 레니샤의 품에 안겨 있던 이사벨라가 피곤에 젖어 돌아갔다.


“수고했어요.”

재잘거리는 이사벨라의 모든 것을 받아준 레니샤가 지쳐 늘어졌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 잔을 내밀었다.


“……카시우스도 고생했어요.”

이사벨라의 질문 공세는 레니샤에게만 쏟아진 게 아니었다.

아이는 카시우스에게도 궁금한 게 많은 듯했다.

예니카가 어떻게 카시우스의 어머니인 것인지, 그들은 이족이라고 들었는데 카시우스도 그런 것인지.

이족들은 정확히 어떤 자들인지, 카시우스도 예니카를 보고 싶었는지, 등등.

그간 꾹 닫혀 있었던 이사벨라의 입술은 봄날에 녹아 흐르기 시작한 하천처럼 거침이 없었다.


“이사벨라가 발랄한 모습을 되찾아 다행이군요. 힐로샤인에서 걱정이 크다고 하지 않았나요?”

“맞아요. 잘 먹지도 않고, 말도 안 한다고 하더군요. 지금 모습을 봐서는 전혀 모르겠지만.”

“……아이에게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되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머리카락에 키스했다.


“오늘 많이 놀랐겠네요. 미안해요, 레니샤. 그런 상황에 놓이게 만들어서.”

“당신도 예상하지 못했잖아요, 카시우스. 어땠나요? 떨렸나요? 아니면 행복했나요?”

레니샤가 눈을 반짝였다.

카시우스에게 달라붙어 묻는 레니샤는 일부, 이사벨라를 닮아 있었다.

카시우스가 웃음을 흘리곤 말했다.


“얼떨떨했습니다. 저 또한 예상도 하지 못했던 만남이라. 너무 매정해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이런 일이 있으면 눈물도 흘리지 않습니까? 저는 너무 덤덤했습니다. 우는 대신에 웃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카시우스…….”

“사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당시의 감정이 어땠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어요.”

“어떤 것이요?”

“……기뻤던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이 그리워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뵐 수 있다면, 그때 하지 못했던 약속을 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약속이었나요?”

“절대로 죽지 않겠다, 살아서 돌아오겠다. 그런 약속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에 전 어머니의 치마를 붙들고 울기밖에 못하는 한심한 아들이었거든요.”

“……그땐 어렸잖아요.”

카시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걱정하셨을 겁니다. 의젓하지 못한 아들이라서.”

“……어머니하고 충분히 이야기를 나눈 건가요?”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애초에 귀가도 늦어진 데다가 예니카는 체력이 떨어진 듯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이사벨라의 재잘거림에서 풀려났을 땐 이미 예니카의 방에는 불이 꺼진 이후였다.

카시우스는 예니카로부터 재회 이후로 어떤 것도 묻지도, 듣지도 못한 것이다.


“앞으로 시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세상은 그렇게 공평하지 않거든. 언제든지 당신의 뒤통수를 칠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내일 어머니를 찾아뵙는 게 좋겠어요.”

카시우스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샤가 피곤한 몸을 늘어뜨렸다.

갑자기 그녀를 찾아왔었던 긴장감은 가신 지 오래였지만 심신이 지친 기분이었다.

하긴, 요새 무리를 하긴 했지.

이 제국을 안전한 궤도로 올리기 위해서 레니샤는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레니샤를 두고 렉서스를 떠올리지 않는다.

레니샤가 바라던 대로 말이다.

레니샤는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종아리를 꾹꾹 눌렀다.

단단하게 뭉쳐 있었던 근육이 느리게 풀어졌다.


“으…….”

레니샤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그 덕에 레니샤의 옷차림이 흐트러졌다.

카시우스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려다 레니샤를 응시했다.

금빛 눈이 마치 용암처럼 눅진하게 끓어오르는 듯했다.

간간이 헛손질을 하면서도 근육을 마사지하는 카시우스를 보면서 레니샤가 입맛을 다셨다.

여전히 곧고 바른 카시우스.

다리를 주무르는 걸 그만두고 모르는 척 스타킹을 당겨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텐데.

카시우스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레니샤가 잡히지 않은 발을 움직였다.


“레니샤!”

카시우스가 놀라 레니샤를 불렀다.

레니샤가 사르르, 꽃잎이 흩날리는 것처럼 웃었다.

여전히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말이다.

카시우스가 눈을 깜빡였다.


“카시우스. 나는 목욕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뜨거운 물에 향유를 가득 풀어서 몸을 담그면 나아질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발을 내려놓고 일어나려는 순간 레니샤가 그의 허벅지를 다리로 짓눌렀다.

카시우스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레니샤?”

“카시우스는요? 안 피곤해요?”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세이렌 같은 여자가 카시우스에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레니샤가 발을 또다시 움직였다.


“윽! 레니샤, 제발…….”

“카시우스도 씻어야 하잖아요. 굳이 타인을 피곤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욕조는 넓어요, 카시우스.”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카시우스가 눈을 꾹 감았다.

레니샤의 유머 감각은 여전했다. 레니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의 요조숙녀. 일어날까요?”

카시우스가 순순히 순종했다.

이거야말로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

예니카가 단정한 얼굴로 카시우스를 맞이했다.

어제 흘렸던 감정의 잔재들은 전혀 남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카시우스가 괜히 옷매무새를 만지작거렸다.

긴장한 건 카시우스뿐인 듯했다.


“……내가 예전에 한 말을 기억하니?”

“제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네 미래만큼은 짧게도 볼 수 없었지. 네 미래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족들의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붉게 타오르는 너를 보았다. 그래서 네게 경고했었다. 절대로 신의 힘을 탐해서는 안 된다고.”

예니카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그 힘이 너를 집어삼킬 거라고 생각했단다. 지금도 너는…….”

예니카가 카시우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시우스가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다.


“불꽃 속에서 타오르고 있구나. 금기된 신의 힘을 집어삼켰으니 당연한 대가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입니다.”

“몸을 항상 수련해야 한다. 네가 약해지는 순간 이 힘은…….”

슈르륵.

카시우스의 피부를 타고 붉은 비늘이 돋아났다가 가라앉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예니카가 카시우스의 피부를 쓸었다.

붉은 비늘이 돋아났었던 자리였다.


“너를 집어삼킬 거다, 카시우스. 너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거야.”

붉은 뱀이 카시우스에게 경고했었던 그대로였다.


[어리석은 인간아. 인간의 그릇에 신의 힘을 온전히 담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라. 내 힘은 언젠가 너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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