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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어머니 (120/135)


120화. 어머니
2023.05.23.



 
렐라인은 여전히 달콤한 꿈에 젖어 있었다.

그 누구도 렐라인의 꿈이 허망하다고 말해주지 않은 까닭이었다.

오히려 플랜스 백작은 렐라인이 노력만 한다면 훗날 반드시 황후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부추겼다.


“아이를 낳아야 해, 렐라인. 너도 알다시피 남자들은 제 아이가 태어나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기울기 마련이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네, 어머니. 그런데 폐하께서 요새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세요. 그냥 틀어박혀서 술만 마시고 계시니…….”

렐라인이 투덜거렸다.


“카나리아 황후를 모셨던 하녀도 들여왔다면서. 너는 할 수 있을 거다, 렐라인. 우리는 만나주지도 않으시니…….”

“……폐하께서 흥미 있어 하실 소식이나 그런 건 없을까요? 아니면, 폐하께서 바라실 만한 일이나…….”

“아직까지 네 아버지가 별말씀 없으셔서. 지금 반역자들을 견제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시잖니. 이럴 때일수록 폐하께서 나서주시면 좋은데…….”

“제가 잘 말씀드려 볼게요.”

렐라인이 볼을 부풀렸다.

플랜스 백작 부인이 렐라인을 다독여 렉서스의 방으로 올려보냈다.

플랜스 백작 부인의 뒤로 플랜스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태까지 오간 이야기를 다 들은 듯 플랜스 백작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저 애가 반드시 렉서스 황제의 아이를 낳아야 해.”

“가능할까요? 렉서스 황제가 생식 능력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그러면 렉서스 황제의 아이라고 믿을 만한 아이를 낳게 해야지.”

“렉서스 황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플랜스 백작이 까맣게 탄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애당초, 플랜스 백작은 렉서스를 다시 황제로 복권시킬 생각이었다.

신전에서 힐로샤인과 로테라의 신성성을 인정하고 레니샤를 지지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신전까지 그렇게 나오자 여태까지 플랜스 백작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던 자들도 그를 피하고 있었다.

아무도 플랜스 백작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렉서스도 저 꼴이니, 두 다리로 뛰어다닌들 수확이 있겠는가.

플랜스 백작 또한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

렐라인이 렉서스 황제의 아이를 낳기만 하면…….


“아이를 낳기만 하면 레니샤의 정통성에 대해서 논의해볼 여지는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렉서스 황제는…….”

플랜스 백작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죽여야지.”

플랜스 백작의 단언에 백작 부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제야 그들이 어떤 일에 손을 담그고 있는지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플랜스 백작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검은 그림자들이 일렁이며 손을 흔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플랜스 백작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안 되는 일에 계속 투자를 할 순 없잖아. 지금도 레니샤가 우리에게 주목하고 있다고. 그 여자는 몰라서 우리를 내버려 두고 있는 게 아니야.”

플랜스 백작 부인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면요? 모르는 게 아니라면 대체 왜…….”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이 우리를 가지고 노는 거지.”

더없이 단조로운 한 마디였다.

***

렉서스가 초점이 풀린 눈으로 렐라인을 응시했다.


“폐하. 이렇게 술만 드시면 몸이 상하세요.”

렐라인이 애교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살살 비위를 맞춰서 어떻게든 같이 밤을 보내고야 말 작정이었다.

렐라인이 렉서스의 옆에 앉았다.


“고민이 많아 보이세요, 폐하.”

“큭.”

“폐하?”

“괜한 말을 하면서 시간을 끄는군. 내가 바라는 걸 들어줄 생각이 없다면 이만 나가.”

“황성에 들여보내 달라고 하셨었죠?”

렉서스가 눈을 굴려 렐라인을 쫓았다.

렉서스가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한 요구는 한결같았다.

렉서스를 당장 황성으로 들여보내줄 것.

그리고 레니샤 앞에 렉서스를 세울 것.

렉서스가 레니샤의 손에 죽을 수 있도록!

하지만, 플랜스 백작은 그런 요구를 보란 듯이 거역했고 그를 이 방에 가둬두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렐라인은 가증스러울 정도로 해맑았다.

렐라인이 렉서스의 술병을 빼앗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네가 무슨 수로. 백작도 하지 못한 일이야. 그런데 고작 백작 영애인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렐라인의 얼굴이 수치로 붉어졌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아양이나 떨고 있어야 한다니.

렐라인이 애써 웃었다.


“제가 황성에서 폐하를 모시고 이곳까지 왔잖아요. 거꾸로 가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이전에 온 길을 되짚어가면 황성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이건 제법 흥미가 이는 이야기였다.


“순찰을 도는 이들이 있을 거다.”

“그들 중 하나를 매수하면 되겠군요.”

렐라인이 가볍게 말했다.


“제가 폐하의 소원을 이뤄드릴게요. 그러니…….”

몸을 일으킨 렐라인이 렉서스의 무릎 위에 올라탔다.

보들보들한 손으로 렉서스의 뺨을 쓸었다.


“제가 바라는 것을 주세요, 폐하.”

렐라인이 렉서스의 손을 끌어서 제 아랫배에 얹었다.


“다시금 황제가 되어주세요. 그리고 제가 낳은 아이에게 황위를 물려주시는 겁니다.”

렉서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 여자는 아직 제 부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렐라인에게 아기를 강요할 이유는 단 하나.


‘나를 죽이기 위해서겠지.’

렉서스가 피식 웃었다.

렉서스의 아기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새로운 후계자가 된다.

렉서스는 쓸모가 다할 것이고 플랜스 백작은 그를 죽일 것이 뻔했다.

이런 것 하나 짚어보지 못할 정도로 렐라인은 현명하지 못했다.

렉서스가 렐라인에게 몸을 내어주었다.

어차피 흙으로 들어갈 몸이다.

마지막까지 이용당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렐라인이 내어준 이 작은 희망만으로도 렉서스는 며칠은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렉서스는 제 위에 렐라인을 올려놓고도 레니샤를 생각했다.


‘당신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지독하게 레니샤가 보고 싶은 밤이었다.

***

이사벨라를 태운 마차가 제도에 진입했다.

짧다면 짧은 여정 동안 이사벨라는 많이 성장했다.

처음으로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혼자 여행하는 중이었다.

사용인들은 있었지만, 이사벨라의 의지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첫 여행이었다.

무력하기만 했었던 꼬맹이 이사벨라는 없었다.

마차 너머로 고개를 내민 이사벨라가 제도의 풍경을 응시했다.

가장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살았는데 전쟁터나 힐로샤인보다 이곳이 더 생경했다.


‘너무 오래 떠나 있어서 그런가?’

이사벨라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카시우스가 제도의 경계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흑색의 말을 타고 후드를 쓰고 있는 장신의 사내는 멀리에서도 눈에 띄었다.


“카시우스!!!”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가파르게 높아졌다.

이사벨라가 카시우스에게 달음박질쳤다.

카시우스가 기다렸다는 듯 이사벨라를 번쩍 안아 올렸다.

이사벨라가 카시우스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제야 이사벨라는 깊은 곳에 품고 있었던 두려움을 알아차렸다.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돌아오지 않는 게 어쩌면 아주 멀리 떠나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이사벨라가 간절한 손길로 카시우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사벨라. 그간 잘 지냈니?”

카시우스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하나도 잘 못 지냈어요. 밥도 안 먹고 매일 울었어.”

이사벨라가 코를 훌쩍거렸다.


“이런.”

카시우스가 이사벨라의 등을 쓸었다.

이사벨라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카시우스도 알고 있었다.

아기가 불안정한 상태라는 이야기도 들었고.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아이가 신경 쓰였다.


“거짓말쟁이. 이렇게 멀쩡하면서. 고모랑 돌아오기로 해놓고서.”

“내가 미안. 정말로 미안해, 이사벨라.”

“나는…… 나는…… 카시우스가 다시는 안 올까 봐…… 레니샤도 멀리 갔을까 봐…….”

“그럴 리가 없지 않니.”

카시우스의 나지막한 속삭임에도 이사벨라의 눈물을 멈출 줄을 몰랐다.

다행히 인적이 드문 곳에 마차를 세워 다행이었다.

이사벨라의 유모와 제인이 안쓰러운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는 게 전부였다.

이사벨라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만약 별이 되어 멀리 가는 일이 생기더라도 미리 말해줘야 해.”

“…….”

“이사벨라가 하고 싶은 말이 엄청 많았는데 하나도 못 해서 너무 속상했어요.”

“이사벨라…….”

“구해줘서 고마웠어요, 카시우스. 나를 고모한테 데려가 준 것도 고맙고, 엄마랑 아빠를 만나게 해준 것도 고마웠어요. 그리고…… 그리고…….”

이사벨라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레니샤 고모를 행복하게 해줘서 고마워요.”

“내가?”

“카시우스랑 있으면 레니샤가 잘 웃어요. 행복해 보여요. 레니샤는…… 안 행복해 보였었는데 카시우스랑 있으면 달라요.”

아이의 솔직한 말에 카시우스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네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구나.”

“네?”

“나는 네 고모를 꼭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거든.”

“와아. 카시우스는 정말 좋은 사람이네요. 강아지처럼.”

카시우스가 눈을 치켜떴다.

대체 테리언 이놈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떠들고 다니길래 이사벨라도 이런 소리를 하나 싶었다.


 
이사벨라가 카시우스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헤헤 웃는 이사벨라 덕분에 화도 한 번 내지 못했다.

카시우스가 이사벨라를 추슬러 안고는 뒤쪽을 향해 턱짓했다.

오늘 이족들도 함께 올 거라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그들은 더 이상 이단이 아니다.

신전의 공표가 있을 것이며 이족들은 공신으로서 중요한 자리에 등용될 거였다.

이족들을 보는 카시우스의 마음이 웅장해졌다.

카시우스는 히샴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해냈다.

그간 외면해야만 했었던 의무를 이제야 마주 보게 되었다.


‘아버지.’

카시우스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리고 어머니.’

그를 지키고 죽은 이들의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이족들의 행렬이 점점 가까워졌다.

이족들과 카시우스의 거리는 그들의 어색함만큼이나 멀었다.

카시우스가 그들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이족들 사이로 베일을 얼굴 위로 드리운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족들이 주춤거리며 길을 터주고 있었다.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앞으로 나온 여자가 천천히 베일을 벗었다.

뿌옇게 흐려진 눈동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엔 얼굴에 남은 깊은 흉터가, 그다음에는…….

카시우스가 눈을 깜빡였다.

한 번도 이런 순간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전부 죽었다고 생각했다. 카시우스를 대신해서!

그것은 돌덩이처럼 마음에 얹힌 짐이었으며 절대로 내려놓지 못할 짐이었다.

그렇기에 레니샤에게 공감했고 그녀의 슬픔에 동조할 수 있었다.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를 살리기 위해서 죽어간 가족들을 잊지 못하고 있기에.

그런데.


“어머니…….”

그의 굴레가 마법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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