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히엔트리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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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히엔트리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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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히엔트리의 희망
2023.05.16.
브릭스턴은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목숨을 내던져 이사벨라를 구했으니, 두 다리로 값을 치른 건 오히려 싸게 먹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를 원망하진 않나요?”
헤일린이 브릭스턴의 무릎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지금 헤일린의 손짓에도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릎 아래로 감각이 완전히 마비된 것이다.
브릭스턴이 헤일린의 손을 붙들었다.
하도 울어서 붉게 부푼 눈동자가 브릭스턴을 향했다.
이 여자 눈에서 눈물을 마를 일 없게 만든 건 브릭스턴이다.
브릭스턴은 헤일린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지 불행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세상사, 뜻대로 되는 건 없다더니 그건 여전했다.
브릭스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당신을 원망할 이유가 어딨어.”
브릭스턴의 목소리가 엉망인 채로 툭 하고 튀어나왔다.
“억지로 당신 숨을 붙여놓은 것도 나, 당신이 누워만 있는 걸 견디지 못하겠어서 로샤의 눈물을 먹인 것도 나. 내가 한 결정이지 당신의 의지는 아니었잖아요.”
헤일린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처음, 브릭스턴의 부상 소식을 접했을 때는 그의 목숨을 붙여만 달라고 신께 기도했었다.
그러다가 운 좋게 그 기도가 통했다.
브릭스턴의 핏줄에 검은 뱀의 기운이 스며 있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행복했다.
분명 처음에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쥘 수 있음에 행복했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헤일린의 행복도 점점 바닥났다.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이사벨라를 돌보는 것도, 생각지도 않았던 임시 영주의 역할도.
헤일린은 브릭스턴이 너무 필요했다.
헤일린마저 무너지면 힐로샤인을 지탱해줄 사람이 없어 굳건하게 버텼다.
밤이 되면 무너졌다.
말라가는 브릭스턴의 손을 붙들고 기도했다.
‘내게 돌아와요, 브릭스턴…… 나는 당신이 필요해. 제발 나를 혼자 두지 말아요.’
그러다가 신이 다시 한번 헤일린에게 응답했다.
마지막 로샤의 눈물이 나타난 것이다.
절벽에 몰린 헤일린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이건 예견된 끝이었다.
헤일린은 그녀를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헤일린.”
브릭스턴이 헤일린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녀를 제 다리 위에 걸터앉게 한 브릭스턴이 눈물을 닦아 냈다.
헤일린의 마른 뺨이 신경 쓰였다.
브릭스턴은 그가 눈을 뜰 수 있음에, 헤일린을 다시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사벨라를 홀로 두지 않게 되었다는 생각에 기뻤다.
“이 두 다리는 당신과 이사벨라를 지켜낸 훈장이라고 생각해. 나는 조금도 이게 부끄럽지도 않고, 원망스럽지도 않아.”
브릭스턴이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 말대로 내가 치기 어린 어린애였다면 원망했을지도 몰라. 내 몸의 장애가 부끄러웠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냐.”
브릭스턴이 쓰게 웃었다.
“난 살아남음으로써 당신과 이사벨라의 곁에 남았고, 레니샤의 힘이 되어줄 수 있게 됐어. 다른 이들의 가슴에 못을 박지 않은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브릭스턴이 헤일린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는 손길에는 감출 수 없는 애정이 가득했다.
“살아남은 걸로 감사해.”
헤일린이 큰 숨과 함께 눈물을 터뜨렸다.
브릭스턴이 이토록 강한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정말로.
***
이사벨라에게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어린 시절부터 이사벨라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평범한 어린아이들처럼 사는 건 이미 포기했다.
이제 와 이사벨라가 바라는 건 단 하나.
“모두 행복하게 해주세요.”
이사벨라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이사벨라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전부 떠나거나 다치거나,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이사벨라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아른거렸다.
이제 이사벨라는 사람들을 만나고 감정을 주고받는 게 무서웠다.
이사벨라가 웅크리고 앉은 채로 하늘을 응시했다.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이 녹아내리려면 긴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새로운 상처가 깊이를 더한 까닭이었다.
발코니 아래 정원에 있던 기사들이 아이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들었다.
“……저 꼬맹이가 뭘 안다고.”
“내 말이 그 말이오. 어린애가 이런 일을 겪고 살겠소, 어디?”
“쯔즛. 어린 아가씨가 겪을 일들은 아니었지. 확실히.”
이사벨라의 잿빛 눈동자는 전쟁과 죽음의 상징이었다.
분홍빛 눈동자가 잿빛으로 바래기까지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겠는가.
기사들이 풀잎을 질근질근 씹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아가씨 저대로 둘 거야? 우리가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뭘 하고 싶은 거요?”
“왜, 그. 아가씨를 배신한 그 집사 놈.”
“그 도망자?”
“그놈이라도 잡아다가 족을 쳐…….”
기사들이 험악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이사벨라가 저렇게 힘없이 앉아 있는 얼굴을 볼 때마다 속상한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제도로 모시고 가는 건 어떻소. 거기가 여기보다는 사정이 낫겠지.”
“제도가?”
“레니샤 부인이 계시고, 카시우스 공작이 계시니 말이오. 이번에 이족들이 제도로 간다던데, 그 행렬에 끼는 건 어떻겠느냐는 거지.”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환경을 바꿔주는 것도 좋지.”
기사들이 모종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헤일린에게 이사벨라의 여행이 건의되었다.
이사벨라가 기력 없이 방에만 있는 것보다는 레니샤에게 가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이사벨라의 주치의와 유모, 그리고 브릭스턴과 논의한 결과였다.
사실 지금의 힐로샤인은 브릭스턴의 상황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런 복잡한 이유로 이사벨라의 여행이 결정되었다. 빠른 속도로.
***
한편, 제도의 상황도 하루,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레니샤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금세 제도를 장악했다.
렉서스의 편에 섰었던 귀족들도 변절하여 레니샤의 손을 들었다.
신전에서조차 레니샤의 신성성을 보장하고 나서니 황위의 주인인 변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히엔트리의 하늘이 뒤집힌 것이다.
레니샤는 그녀의 등극을 위해서 흘린 피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여, 그들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대관식은 1년 후로 미뤄두었다.
그런 허례허식을 챙기기 전에 레니샤가 수습해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렉서스가 엉망으로 망쳐놓은 것들을 정상화해야 했다.
폭군의 눈을 피해 뒤에서 딴짓하는 자들을 엄하게 다스려야 했고, 대놓고 렉서스의 발가락을 빨면서 기생하던 귀족들은 쳐내야 했다.
렉서스가 손을 놓고 있었던 일들에 손을 대고, 내부적인 안정을 이루는 것이 더 급했다.
레니샤의 사람들은 그녀를 지지했다.
“새로운 황제 폐하가 로테라에서 나왔다지?”
“큼. 왜, 그 전의 황제는 미쳤었다는 말이 많았었잖아. 바뀔 만도 했지.”
“그런데 왜 그 아기 황자님이 아니라 레니샤 님이 황제가 된 거래?”
“난들 알겠어?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아기 황자가 황제의 핏줄이 아니라더군.”
“뭣?”
렉서스와 카나리아의 이야기는 저잣거리의 가십으로 전락했다.
“세상에. 콩가루가 따로 없군. 그게 황실인가? 황제가 바뀌길 천만 다행이지.”
“맞네, 맞아. 그 전 황제가 나라를 말아먹을 거라는 말도 많았잖아.”
이야기를 나누는 상인들 사이를 카시우스가 여유롭게 걸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를 그대로 드러낸 상태였다.
영웅 카시우스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제도를 한 바퀴 휩쓸고 대륙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노예 검투사의 삶을 살다가 영웅이 되어 돌아온 카시우스가 이제는 황제의 남편이 되었다고 하니 사람들의 관심이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카시우스 공작님 아니십니까?”
그를 알아본 이들이 금세 바글바글하게 모여들었다.
“큼.”
카시우스가 헛기침을 했다.
“무슨 일로 직접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바쁘실 터인데!”
“레니샤 님은 잘 지내시지요? 마지막에 뵈었을 때 얼굴이 창백하셨었는데…….”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제도 사람들은, 아니. 제국 사람들은 로테라 가문을 사랑했다.
로테라 가문이 그간 히엔트리를 위해서 해온 희생을 그들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테라를 향한 사랑은 레니샤에게로 이어졌다.
그 덕분인지 레니샤의 즉위를 비난하는 이들은 극히 적은 편이었다.
카시우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레니샤는 괜찮소. 나는 이곳에 소금빵을 사러 왔는데. 예전에 레니샤가 자주 먹었던 빵이 있다고…… 아시는 분 있소?”
카시우스가 점잖게 말했다.
“오, 그건 여기 내가 잘 알지! 로테라에서 소금빵을 사러 자주 사람이 나왔었거든. 어린 아가씨가 좋아하신다면서!”
“나도, 나도! 레니샤 님이 좋아하실 만한 건 나도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로테라의 아가씨가 자주 드시던 음료수를 알아요!”
시장 상인들이 너도, 나도 이것저것 들고 나와 카시우스의 손에 들려주었다.
순식간에 돈 한 푼 내지 않고 양손이 가득해진 카시우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값을 치러야 하는데…….”
“에이, 별말씀을! 그동안 이야기 들어 보니 마음고생 심하셨던 모양이구먼.”
“이 거리 사람들은 로테라 아가씨를 전부 알아요!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예전 로테라 저택 아닙니까! 우리가 어려울 때면 로테라 가문에서 돈을 풀어서 우리를 도와주셨었지.”
“누가 아니래. 우리 가게가 물에 잠겨서 일 년 장사를 말아먹었었는데 로테라에서 도와줘서 살아났지 뭡니까.”
“맞습니다! 우리 아버지 장례도 로테라에서 준 돈으로 치렀습니다!”
카시우스의 입술이 가볍게 휘어 올라갔다.
어디를 가든 로테라에 대한 찬양이 끊이질 않는다.
황제가 바뀌니 거리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어딘가 모르게 음침한 분위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전보다 훨씬 가볍고 활기차게 변했다.
레니샤가 이 거리에도 새로운 희망을 몰고 온 것이다.
“로테라의 아가씨라면 분명 좋은 황제가 되실 겁니다!”
“나도 그렇게 믿어요! 황제 폐하께 우리의 응원을 전해주세요!”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카시우스가 그들과 함께 웃었다.
뿌듯함과 함께 자랑스러움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이런 사람이 카시우스의 사람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사랑하고 있었다.
카시우스의 어깨가 기분 좋게 무거워졌다.
“고맙소. 그대로 전하겠소, 꼭.”
카시우스가 마음은 따뜻하고 두 손은 무겁게 거리를 빠져나왔다.
이미 사람들은 레니샤를 황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레니샤가 불러일으킨 물결이 히엔트리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어디까지 변화시킬 수 있을지 기대감이 몰려왔다.
레니샤는 히엔트리의 희망이었다.
모두가 사랑하는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