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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폐위 (115/135)


115화. 폐위
2023.05.05.



 
탈출에 성공했다!

제도를 벗어났을 때, 렐라인의 마음은 환희로 들떴다.

그건 렐라인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렐라인과 함께 일을 도모한 후궁들의 꾀죄죄한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생존을 향한 열망이 마음속에 그득했다.

렐라인이 고개를 돌려 기사에게 업힌 렉서스를 응시했다.

렉서스는 눈을 꾹 감고 있었다.

렐라인이 덜컥 마음이 내려앉아서 렉서스를 흔들었다.


“황제 폐하, 황제 폐하!”

렐라인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렉서스를 흔드는 속도도 빨라졌다.

렐라인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나머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설마, 렉서스가 죽은 걸까?

렐라인이 렉서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렐라인이 렉서스에게 제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였다.

렉서스가 눈을 번쩍 뜨곤 기사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위협을 느낀 렐라인이 도망치려다가 렉서스에게 붙들렸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커다란 손이 렐라인의 목줄을 틀어쥐었다.


“건방진 년.”

“커헉! 커허억!!”

렐라인이 발버둥을 치면서 렉서스의 손을 긁었다.

렉서스가 무표정하게 렐라인을 응시했다.

렐라인이 게거품을 물 때쯤이 돼서야 상황을 파악한 이들이 동시에 렉서스에게 달려들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이러다가 정말로 죽습니다!!”

“플랜스 백작이 힐로샤인에서 말을 돌려 돌아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에게 몸을 의탁해야 합니다!”

렉서스가 고개를 꺾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기이할 정도로 서늘한 빛으로 번뜩였다.

마치 어둠 속에 놓인 자수정 같았다.

렉서스가 손에 힘을 풀었다.

툭 하고 떨어진 렐라인이 바닥에 엎어진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어깨를 들썩이는 렐라인을 후궁들이 보살폈다.

렉서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누구 마음대로 군대를 물렸단 말이지? 나는 허락한 적 없다.”

“그대로 있었다면 플랜스 백작의 군대 또한 몰살되었을 겁니다. 차후를 위해서라도…….”

기사가 겁먹은 얼굴로 전황을 고해 올렸다.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낫습니다.”

간신히 말을 끝맺은 기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기사의 목덜미에 쭈뼛 솜털이 곤두섰다.

렉서스가 곤두선 시선으로 기사를 노려보았다.

렉서스가 이마를 짚고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렐라인만 탓할 게 아니다.

플랜스 백작 또한 렐라인과 다를 게 없었다.

그 아비에 그 딸이라고, 황제의 명을 우습게 알고 제멋대로 결정을 내린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렉서스의 의지가 아니었다.

렉서스가 이를 아득 갈았다.


“죽더라도 거기에서 죽었어야지.”

렉서스가 분노를 내뱉었다.


“최소한 치욕스럽게 돌아오지는 말았어야지! 나를 황성에 그대로 두고 떠났어야지! 누가 내 목숨을 비참하게 이어달라고 부탁했나?”

렉서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터질 것 같은 분노가 렉서스의 안에 가득 고였다.


“나는 죽음으로 남았어야 했다! 이렇게 도망치는 쥐새끼 꼴이 되어서는 안 됐어!”

레니샤의 눈앞에서 렉서스의 죽음을 새겨주는 것.

혹은 레니샤의 손에 직접 죽음을 맞이하는 것.

렉서스가 바라는 그림은 그런 것들이었다.

렉서스가 몸을 돌려 멀리 보이는 황성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도 고고한 황성은 이미 아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렉서스가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강렬한 감정들이 들끓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레니샤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오만한 군주의 얼굴이었다.

패배자를 보는 승리자였다.

렉서스는 레니샤 앞에 다시 한번 작아졌다.

가뜩이나 벌어졌었던 차이가 더 벌어진 것이다.

렉서스가 자신을 억누르고 레니샤를 억압하며 두 사람의 키를 비등하게 맞춰두었는데 억압이 풀렸다.

레니샤는 렉서스를 아래로 깔아보고 있었다.

비천한 열등감이 가슴을 비집고 튀어 올랐다.


“제기랄!!”

욕설이 줄줄이 터졌다.


“황제 폐하, 저희의 충심을……. 커흠. 충심을 의심하진 마소서.”

렐라인이 부축을 받으며 말했다.

잔뜩 쉰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가득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커흠.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렐라인은 억울했다.

렉서스 또한 렐라인의 갸륵한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렉서스를 살리기 위해서 렐라인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지금도 렐라인은 자신의 정의에 흠뻑 취해 있었다.

지금 당장은 렉서스가 분노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못 하고 있지만 상황을 파악하게 되면 렐라인이 옳았다는 걸 알아줄 것이다.

렐라인이 코를 훌쩍였다.


“……저는 황제 폐하를…….”

“황제는 황성에서 죽기에 황제인 거야.”

렉서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렉서스의 창백한 얼굴 위로 흐트러진 은빛 머리카락이 내려앉았다.


“나는 끝까지 비루했다. 죽음조차도 황제답지 못했어.”

렉서스가 등 뒤의 황성을 손가락질했다.


“모두들 나를 도망자로 기억할 것이다. 나는 기어이…….”

렉서스가 숨을 몰아쉬었다.


“폐위된 황제로 기록되겠지. 너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렐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다시 돌아가실 수 있을 거예요! 저희가 돕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바라신다면 뜻을 모을 자들이 있을 거예요! 그간 히엔트리 제국의 부국강병을 이루신 분 아닙니까! 황제 폐하를 존경하고 따르는 자들이 많습니다.”

렉서스가 광소를 터뜨렸다.

세상 물정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귀한 영애가 할 만한 발언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았다.

이미 새로운 태양으로 떠오르고 있는 레니샤를 저버리고 렉서스의 손을 들어준다?

패배한 자에게 인생을 배팅할 기회주의자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귀족들은 시류에 민감하다.

그들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황성을 떠난 렉서스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충성심? 개나 주라지.”

렉서스는 그의 수하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렉서스를 따랐었던 이유는 단 하나.

렉서스가 공포정치를 표방하는 폭군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렉서스는 아무것도 아니다.

렉서스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발가락도 핥았던 자들이 지금은 레니샤의 발을 핥고 있을 것이다.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하며 사흘 굶은 개새끼처럼 황성 주변을 맴돌고 있겠지.

렉서스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렐라인을 응시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자다.

렉서스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좋다, 렐라인. 네 충성심을 증명해보거라.”

렐라인이 눈물 젖은 눈을 들어 올렸다.

드디어 렉서스가 그녀에게, 그리고 플랜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줄 마음을 먹었나 보다.

렐라인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멍이 시퍼렇게 들었을 것이 분명한 목이 시큰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저, 저만 믿으세요, 폐, 폐하!”

렐라인이 목을 더듬거렸다.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가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렉서스가 느린 걸음을 옮겼다.

어떤 기대도 없는 스산한 눈동자가 그의 미래를 넘겨짚었다.

이렇게 살다 죽겠지.

레니샤는 세월이 흐를수록 렉서스를 잊어갈 것이다.

그리고 가끔 렉서스를 떠올리겠지.


‘아, 그 멍청한 새끼.’

렉서스가 픽, 웃음을 흘렸다.

허파에 바람이 든 것처럼 계속 이유 없는 웃음이 흘렀다.

인생은 덧없고 그의 권력은 더욱 덧없었다.


 

***



“……저 미친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루나가 투덜거렸다.

렉서스는 제 두 발로 황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죽을 생각이었다고?

대체 죽기 위해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레니샤가 렉서스만 생각하면 진절머리 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루나가 팔짱을 낀 채로 렉서스를 응시했다.

저놈을 쫓는 일에 정말로 의미가 있을까.

레니샤는 대체 왜 저놈을 살려두어야 한다고 말한 걸까.

루나는 레니샤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루나가 렉서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렉서스가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때에는 반드시 제거한다.

그것이 루나가 받은 임무였다.

루나가 검을 고쳐 쥐었다.

***

레니샤는 분명 카시우스를 보았다.

약속한 대로 그녀를 데리러 온 카시우스를, 보았다.

레니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레니샤는 카시우스만 본 게 아니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레니샤는 많은 것을 보았다.

동이 터오는 지평선 너머의 희망도, 레니샤를 향해 힘차게 다가오고 있는 미래도, 그리고 카시우스도.

레니샤가 난간을 움켜쥔 채로 눈을 깜빡였다.

온갖 감정이 봇물 터지듯이 치솟았다.

저 태양은 레니샤다.

레니샤는 히엔트리의 새로운 태양이, 새로운 황제가 될 것이다.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레니샤를 우러러보는 깨끗한 시선들에 발끝까지 전율이 흘렀다.


“황제 폐하.”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모두가 레니샤를 황제로 지칭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레니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종장뿐만 아니라 황성의 모든 사용인이 몰려온 것 같았다.

그들은 레니샤를 주인으로 인정했다.

레니샤가 입술을 달싹였다.

황제로서 레니샤가 내릴 첫 번째 명은 단 하나.


“죽은 로테라 공작의 작위를 복권한다. 로테라의 잃어버린 명예를 바로 세울 것이다.”

“네, 폐하!!”

레니샤의 투명한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어머니, 아버지…….’

레니샤가 입술을 악물었다.

레니샤를 지키기 위해서 제 목숨을 내던지신 두 분이시다.


‘브릭스턴…….’

그 외에도 레니샤를 위해서 희생된 수많은 이들의 이름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레니샤는 천천히 그들의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절대로 잊지 않는다.

레니샤는 지금 이 자리가 그들의 피 위에 세워졌음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

덴버스 후작이 레니샤에게 황제의 인장을 바쳐 올렸다.


“……이게 남아 있었군.”

“챙길 정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레니샤가 묘한 얼굴로 황제의 인장을 주시했다.

이것을 무기로 렉서스는 수많은 명령을 내렸다.

사용감이 가득한 낡은 인장 반지는 묵직한 빛을 품고 있었다.

피를 머금은 듯이 요사스럽기까지 했다.

레니샤가 그것을 목에 걸었다.


“새로운 인장 반지를 제작할 것이다. 이 일은 신전과 논의할 것이며……. 내일 아침 첫 회의를 주관한다. 덴버스 후작, 자네가 황성을 추스르도록 하게. 시종장, 자네가 덴버스 후작을 돕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안정을 찾아야 해.”

레니샤가 몸을 돌려 다시 하늘을 응시했다.

레니샤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외부에서 히엔트리의 흔들림을 알아차리기 전에.”

“네, 폐하!!”

“도망친 역적들을 추적하여 제도로 압송하라. 그리고…….”

레니샤가 입술을 휘어올렸다.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황제의 자격이 없는 살육자, 렉서스 히엔트리를 폐위한다.”

화려한 태양이 대지 위에 새로운 희망을 움텄다.

어둠은 가고 아침이 밝았다.

레니샤는 그 아침을 이끄는 등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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