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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운명의 끝 (114/135)


114화. 운명의 끝
2023.05.02.



 
카시우스가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문질러 닦았다.

힐로샤인의 기사들은 제 몫 이상을 해내고 있었다.

신의 힘을 가진 기사들이다.

이어지는 전투로 지친 이들이 뒤로 빠지고 빈자리를 메테오와 힐로샤인의 기사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카시우스와 기사들이 점점 앞으로 전진했다.

지난했었던 밤샘 전투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쥐새끼처럼 도망치려던 클라우드 공작이 붙들려 끌려왔다.


“사, 살려주시게.”

클라우드 공작이 카시우스의 발밑에서 빌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클라우드는 카시우스를 노예 기사라고 무시하던 고집스러운 귀족 나리였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클라우드 공작이 발밑에 무릎 꿇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카시우스가 피로가 누적된 눈꺼풀을 치켜떴다.


“당신이 살려달라고 말하면. 이미 죽은 자들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어?”

이 전쟁은 클라우드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내게도 책임이 있지.’

카시우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패배를 받아들여. 그리고 장렬하게 죽어. 네가 저지른 짓에 책임을 지는 거야.”

꾀죄죄한 몰골의 클라우드 공작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기괴하게 빛나고 있는 눈동자와 카시우스의 나른한 눈동자가 마주쳤다.

승리와 피로에 젖어 있던 카시우스에게 클라우드가 말했다.


“패배? 나는 지지 않는다! 언제고 다시 일어나서 네놈의 목을 칠 것이다! 나는 클라우드 공작이야! 너 같은 노예 출신 기사하고는 결이 다르…… 억!”

카시우스가 클라우드의 목을 움켜쥐었다.

카시우스의 억센 손에 붙들린 클라우드가 컥컥대며 카시우스의 손을 긁었다.

단단한 피부에 생채기가 나서 붉은 길이 생겼다.

클라우드가 몸부림을 쳤다. 카시우스의 뺨에도 생채기가 생겼다.


“크, 크헉!”

클라우드가 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카시우스의 가슴팍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카시우스가 클라우드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죽이시죠.”

어느새 다가온 메테오가 말했다.


“저런 놈들은 살려두면 화근이 되길 마련입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박쥐 같은 클라우드가 죽어야 이 소모전도 끝이 난다.

카시우스가 검을 휘둘렀다.

적장의 비루하기 짝이 없는 죽음에 적들이 검을 내던지고 도망쳤다.

카시우스가 뺨에 튄 피를 닦아냈다.


“이대로 황성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메테오가 지평선 너머를 내다보며 말했다.

상앗빛의 황성이 고고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태양의 붉은색이 성에 고스란히 물든 듯했다.

이상하게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카시우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카시우스가 검을 움켜쥐었다.

반드시 데리러 오라던 레니샤의 속삭임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카시우스가 검을 하늘로 치켜올렸다.


“이대로 황성으로 전진한다! 황성의 문을 열어라!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대들의 나라를 위해서 검을 들고 싸워라! 부패한 황제를 몰아내고 새로운 황제를, 히엔트리에 천 년의 영광을!”

“우, 우아아아와악!”

전쟁의 피로함도 잊고 기사들이 길을 내달렸다.

무겁게 축축 처지던 몸에 새로운 활력이 불어넣어진 듯했다.

앞다투어 달려가는 그들의 뒤에 카시우스와 메테오가 있었다.

수종 기사들이 발 빠르게 말을 가져왔다.

카시우스가 발을 굴렀다.

저곳에 레니샤가 있다.

레니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가슴이 벅차올라 숨조차 가빠왔다.

눈가로 알 수 없는 감정이 고였다.


‘레니샤!’

 

***

힐로샤인에도 같은 태양이 떠올랐다.

까마귀가 하늘 위를 배회하다 땅 위에 내려앉았다.

까마귀뿐만이 아니었다.

인근에 기거하는 맹금류는 죄다 나온 듯했다.

피 냄새가 힐로샤인에 자욱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건 마치 지옥도와 같았다.

헤일린은 지금 브릭스턴의 침실에 있었다.

이사벨라는 귀를 틀어막고 브릭스턴의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이의 보들보들한 뺨이 두려움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헤일린이 이사벨라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아가.”

이사벨라가 퉁퉁 부은 눈을 간신히 떴다.

이사벨라가 고개를 돌려 헤일린을 응시했다.

밖에서 묻은 먼지와 지옥의 냄새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사벨라에게도 익숙한 것들이었다.


“엄마……!”

이사벨라가 헤일린에게 안겼다.

아이의 무게가 헤일린을 숨 쉬게 했다.

헤일린이 이사벨라를 마주 안았다.


“다친 곳은 없느냐?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이사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요? 엄마는…… 엄마는 괜찮은 거죠?”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침실을 가득 채웠다.

헤일린이 눈을 감았다.

헤일린은 지키고 싶었던 이들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카시우스가 남겨두고 떠난 기사들은 뛰어난 정예병이었다.

전쟁터에서 쌓아온 경험으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웠다.

지형을 이용해서 전쟁을 하자는 것도 테리언을 비롯한 기사들의 머리에서 나온 거였다.

이건 모두가 다 함께 이루어낸 값진 승리였다.

헤일린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힐로샤인은 또다시 일어설 것이다.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헤일린 님.”

테리언이 그녀를 찾아왔다.

헤일린이 이사벨라를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테리언이 피곤한 낯빛으로 문가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헤일린 님을 뵙고 싶다는 노파가 있습니다. 꼭 반드시 뵈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곧 가겠네.”

“네.”

테리언이 고개를 조아리곤 떠났다.

헤일린이 이사벨라의 등을 토닥였다.


“무사한 걸 봤으니 됐다. 나는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아.”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머물러 있고 싶었지만 안 된다는 걸 이사벨라도 알고 있었다.

헤일린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사벨라만의 엄마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이사벨라가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밤에는 자장가를 불러주세요.”

“그래.”

“동화책도 읽어주세요.”

“좋아. 약속하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투정을 늘어놓는 딸의 등을 헤일린은 오랫동안이나 쓸어주었다.

헤일린이 이사벨라의 뺨에 입을 맞췄다.

신이시여.

헤일린은 마음속에서 버린 신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감사합니다. 이사벨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땅에 승리를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헤일린의 승리는 나아가 레니샤의 승리가 될 것이며 히엔트리의 역사를 새로 쓰는 기반이 될 것이다.

헤일린의 가슴이 장엄하게 부풀어 올랐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그녀의 손으로 써내려갔다.

헤일린은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

헤일린을 찾아온 노파의 이름은 그레이스였다.

쭈글쭈글하게 주름진 얼굴에 눈빛만큼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그레이스가 헤일린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추앙할 사람이 아니네. 나는 그냥 대리에 불과해.”

그레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힐로샤인의 승리를 주도하신 분이니 충분히 자격이 있으십니다.”

“……할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헤일린이 멋쩍은 기분에 말머리를 돌렸다.

그레이스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이 노파에게는 별것 아닌 능력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전승되어온 비법이지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헤일린이 피곤한 두 눈을 깜빡였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몸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전에는 이사벨라와 함께 눈물까지 쏟지 않았던가.

급격한 피로가 헤일린을 짓눌렀다.

그런데도 기이한 기분에 휩싸여 노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노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저희 일족은 힐로샤인에서 샤먼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샤먼?”

“힐로샤인 일족들 사이에서 의사 노릇을 하던 자들이지요. 새로운 의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저희는 도태되었으나, 여전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마지막 후손입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헤일린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음에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헤일린이 긴장감에 두 손을 맞잡았다.

그레이스가 희뿌연 눈을 깜빡였다.


“샤먼 일족에게는 대대로…… 로샤의 눈물을 만드는 방법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로샤의 눈물?”

헤일린이 중얼거렸다.


“네. 죽은 자도 살려낼 수 있는 명약이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이번 세기에 만들어진 로샤의 눈물은 총 셋이었습니다.”

“셋?”

“네. 그중 두 개는 로테라의 진상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레이스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로샤의 눈물이라. 분명 들어본 적이 있었다.

헤일린이 침을 삼켰다.

헤일린은 힐로샤인 출신이 아니었다.

게다가 힐로샤인의 비밀에 대해서 알지도 못한다.

그런 것들은 레니샤나 브릭스턴이 아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로샤의 눈물만큼은…….


“한 병은 샴디르의 공주님을 살리는 데 사용되었고.”

그 순간 헤일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억났다!’

로테라에 보존되어 있었던 나머지 한 병은……!


“나머지 한 병은 황제, 렉서스를 살리는 데 사용되었지요.”

헤일린의 입술을 달싹거렸다.

피로가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한 병은 어찌 되었지? 자네가 보관하고 있다던 그것 말이야!”

그레이스가 품에 숨기고 있었던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짙은 갈색의 유리병이었다.


“이게…….”

“이번 세기에 만들어진 마지막 로샤의 눈물입니다.”

헤일린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오늘을 위해서 이 늙은이가 아껴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릭스턴을 살릴 수 있는 건가?”

“다만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눈을 잃을 수도 있고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지요.”

헤일린이 침을 삼키곤 병을 움켜쥐었다.


“회복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당장 눈을 뜨진 못하실 거예요.”

“그래도 상관없네.”

헤일린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맙네. 정말로 고마워.”

별말씀을.

이것으로 샤먼 일족의 사명은 끝났다.

이제 그만 자연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그레이스의 주름진 눈가에 웃음이 맺혔다.

***

황성은 활짝 열려 있었다.

카시우스와 메테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을 본 사용인들이 줄행랑을 놓았다.

그리고 길 끝에, 높은 발코니에 레니샤가 있었다.


 
레니샤가 생긋 미소 지었다.

레니샤는 약속을 지켰다.

살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카시우스가 눈을 깜빡였다.

레니샤로 인해 눈이 부셨다.

그녀의 빛이 카시우스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레니샤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은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메테오가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들과 동행한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천년의 영광을 누리소서!!!”

격앙된 목소리가 황성에 울려 퍼졌다.

그 가운데에 카시우스와 레니샤만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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