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렉서스의 심연
(110/135)
110화. 렉서스의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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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렉서스의 심연
2023.04.18.
동이 텄다.
렉서스가 붉은 포도주를 목으로 넘겼다.
마치 그것이 누군가의 피처럼 비릿하게 느껴졌다.
렉서스가 피식 웃으며 잔 안에 가득 고인 포도주를 힐끗 응시했다.
지난 밤, 시가지가 불타올랐다.
클라우드 공작은 렉서스와의 약속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카시우스를 향해 검을 겨눈 것이다.
오늘 꺾지 못한다면, 내일.
그리고 내일 꺾지 못한다면 그다음 날.
클라우드 공작은 여태까지 그러했듯이 약속한 바를 지킬 것이 분명했다.
렉서스가 입 안에 감도는 포도주향을 혀로 쓸었다.
보랏빛 눈동자에 기이할 정도의 열망과 증오가 번뜩였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너무 과한 것을 욕심내시다가 모든 걸 다 잃는 법입니다.]
“자네가 바란 게 이거 아니었나? 그럼 내가 이대로 레니샤에게 모든 걸 넘겨줄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 나는 다시 한번 레니샤를 꺾고 이 자리를 지킬 걸세.”
렉서스가 광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이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 자리인지 레니샤에게 알려줄 참이야! 나는 처음에는 자네가 이 자리를 탐낸다고 생각했어.”
렉서스가 이를 갈 듯이 말했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로테라를 멸문시켰음에도 그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고 이어졌다.
머리를 잃은 무리는 흩어지길 마련인데 한곳에 모여서 똘똘 뭉친다면 진짜 머리는 따로 있다는 뜻이다.
브릭스턴? 헤일린?
아니. 그런 피라미들은 큰 꿈을 꾸지 못한다.
그렇다면 남은 건 레니샤.
레니샤 로테라. 그의 부인이었던 여자.
“레니샤를 이 자리에 올릴 생각이었던 거지?”
유령이 입을 다물었다.
“자네는 내가 레니샤를 죽이지 못할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아무 걱정도 없이 전쟁터로 떠난 거지. 레니샤를 이곳에 남겨 두고!”
렉서스가 방 안을 서성거렸다.
뿌연 빛이 방 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돌연 멈춰 선 렉서스가 유령을 노려보았다.
로테라 공작은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유령답지 않은 기백도 함께였다.
[저는 모든 선택을 폐하께 맡긴 것입니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군.”
[레니샤를 꺾지 못한 건 제가 아니라 폐하이십니다. 8년 동안 무엇을 하셨습니까? 레니샤가 각국의 사신들과 인맥을 쌓고 명예를 쌓아 올리는 동안 폐하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렉서스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는 앞을 한 번 내다보지 못하셨었지요. 그러니 이 모든 것은 폐하께서 자초하신 일입니다. 기회는 수도 없이 있었지요.]
렉서스가 눈을 치켜떴다.
분노가 심장에서부터 역류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인정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업보라는 사실을.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모든 잘못을 타인에게 떠미는 게 훨씬 쉬운 법이다.
렉서스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이제 와서 제 삶을 바꿀 의지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자네는 이렇게 될 걸 알고 레니샤를 황후로 만든 거야.”
[그럴 리가요. 저는 폐하께서 그 아이를 품어주시길 바랐습니다.]
“아니! 자네도 레니샤를 황제로 만들고 싶었겠지!!”
[그러면 지금이라도 죽이시면 될 일 아닙니까? 그 아이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뽑아내십시오. 모든 게 끝날 겁니다.]
렉서스가 부들부들 떨었다.
유령의 말이 옳았다.
저 유령이 오랜만에 복용한 약과 술이 불러일으킨 환영일지, 아니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끝내려면 레니샤를 죽여야 한다는 걸 렉서스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반역의 중심에는 항상 레니샤가 있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에 분홍빛 눈동자를 가진 찬란한 소녀.
반짝반짝 해만큼이나 찬란하게 빛나는 사랑스러운 그의 여인.
마음에 담은 이후로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단 한 명의 여자.
렉서스가 비틀거렸다.
잊고 있었던 두통이 그를 엄습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레니샤를 보면 머리가 아팠다.
세상을 비추는 그 찬란함이 언젠가는 렉서스를 넘어설 것 같아서 두려웠다.
사람들은 레니샤의 빛에 이끌렸고 기꺼이 그녀의 발끝에 키스하고 경배했다.
렉서스가 손에 든 잔을 떨어뜨렸다.
챙 소리를 내며 깨진 유리잔이 그의 발가락을 파고들었다.
진득한 고통이 렉서스의 온몸에 퍼졌다.
렉서스는 레니샤를 질투함과 동시에 두려워했다.
그조차도 사랑해 마지않으면서도 레니샤가 언젠가는 그의 자리를 노릴 것을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은 두통이 되었고 렉서스를 광기로 몰아넣었다.
미치지 않고서는 레니샤를 견뎌낼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등을 돌리지 않고서는 그 찬란함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렉서스는 스스로를 좀먹는 길을 택했다.
로테라를 원망하고 스스로를 지옥으로 밀어 넣으면서.
모든 잘못은 로테라로 돌렸다.
로테라가 무너지면 레니샤도 제 속에 든 운명을 꺾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레니샤는 거기서 무너지지 않았다.
비참한 꼴로 내쫓겨 힐로샤인에 가서도 그녀는 일어섰다.
짧은 시간 안에 눈부신 성장을 이룬 힐로샤인은 각국의 찬탄을 받고 있었다.
렉서스가 손으로 눈을 덮었다.
세 뱀 신이 레니샤를 비호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
렉서스 그는 그저 레니샤가 자랄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킨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거다.
세 뱀 신은 레니샤의 대리로 그를 내세웠고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이제는 쓸모를 다했으니 렉서스를 내쫓고 레니샤를 이 천년 제국의 앞자리에 세우려는 것이다.
기울어가는 히엔트리여.
새로운 물결과 함께 다시 한번 찬란한 천 년의 역사를 맞이하게 되리라!
귀에 종소리가 광광 울리는 듯했다.
“하하하하…….”
렉서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
발밑이 무너지는 것이 느껴진다.
렉서스가 딛고 있었던 것은 모래 제단에 불과했던 거다.
그는 빠져나가는 것들을 억지로 붙들고 홀로 버티고 있었다.
허상에 불과했었던 그의 제국이여.
렉서스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바닥에 널브러지듯이 앉은 렉서스의 옆으로 핏물이 번져나갔다.
렉서스가 빛이 점멸하는 눈동자로 창밖을 응시했다.
죽어야 한다면 레니샤에게 가장 강렬하게 남겠다.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새기고 그 위를 더 후벼파서 잊지 못하도록.
상처가 영원히 아물지 못해 레니샤가 몇 번이고 그를 떠올리도록!
“가장 많은 것을 앗아가겠다. 레니샤가 사랑하는 건 모두 도륙 내 버리겠어.”
레니샤의 가슴속에 공허와 고독만 고이도록.
그 사이에 남는 것은 카시우스가 아니라 렉서스일 것이다.
“최후의 승리자는 나야.”
유령이 점점 흐려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렉서스가 붉은 태양을 노려보았다.
그의 죽음이 저 태양만큼이나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이 느껴졌다.
“황제 폐하! 레니샤 님이 사라지셨습니다! 하녀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건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와 같았다.
렉서스가 검을 움켜쥐었다.
끝의 끝까지 레니샤와 함께할 것이다.
렉서스의 보랏빛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스며들었다.
***
카시우스가 팔에 천을 둘러 감았다.
이로 잡아당겨 천을 동여 묶은 카시우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잔인했던 밤이 지나갔다.
기어이 카시우스는 살아남았고 저택 너머로 황제의 기사들이 넘어가는 것을 막아냈다.
카시우스가 지친 몸을 일으켰다.
“공작 각하. 이것이 끝일까요?”
카시우스의 뺨에 돋아 있던 붉은 비늘이 슈르륵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카시우스와 눈이 마주친 기사가 흠칫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세로로 응축된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끝일 리 없지.”
목소리는 심연 속에 가라앉은 듯했다.
“각하. 모습이…….”
카시우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괴물 같나?”
“아, 아닙니다…….”
“영웅의 실체란 본디 이런 것이지. 사람을 베고, 또 베고. 그렇게 살아남아 돌아온 악귀가 사람일 리가 있나.”
“각하…….”
기사가 말끝을 흐렸다.
카시우스는 그들을 지켜낸 영웅이었다.
말도 안 되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쵸르파 평야를 가져왔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도 두려움이 그를 휘어감았다.
카시우스의 검은 붉은 피로 물든 채 번뜩이는 빛을 내뿜고 있었다.
금세라도 그를 향해 달려들 것만 같았다.
검을 휘어 감고 있는 붉은 기운이 혀를 날름거렸다.
기사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런 것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니기는.”
카시우스가 쓰게 웃었다.
이 모습을 감추려고 노력했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법.
붉은 뱀의 껍질을 둘러쓴 카시우스는 인간보다는 괴물에 가까웠다.
그 누가 이 모습을 보고 영웅이라 칭송하겠는가.
“곧 후발대가 올 것이다. 클라우드 공작은 도망쳤나?”
“네. 시신을 찾지 못했습니다.”
기사가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카시우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신의 힘을 한도 없이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 힘은 사용할수록 카시우스를 좀먹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저들이 바라는 건 카시우스의 목이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그것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저들의 검이 누구를 노리고 들어오는지.
렉서스는 카시우스를 죽이고 싶은 거다.
카시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카시우스만 포기하면 모든 게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의 뒤에 남은 자들은?
렉서스가 그들을 가만히 둘까?
그리고.
‘반드시 나를 데리러 와요.’
레니샤는.
카시우스를 향해 환하게 웃던 그 여자는?
카시우스 앞에서만 무너지던 그 여자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카시우스가 울컥 넘어오는 비릿한 피를 간신히 삼켰다.
그를 들쑤시던 붉은 뱀의 힘이 느리게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후우…… 부상자들을 추스르고 전열을 대비하라. 최대한 끌어모아서…….”
“각하!!”
기사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해가 떠오르는 지평선을 따라 군대가 몰려오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전열을 가다듬게.”
쉴 틈을 주질 않는구먼. 이 빌어먹을 렉서스.
카시우스가 검을 다시 움켜쥐었다.
팔이 제 것이 아닌 듯 무겁기만 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카시우스는 레니샤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멀리 있던 이들이 점점 다가왔다.
햇빛의 장막에 가려졌었던 그들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났다.
“……로테라 공작.”
이 순간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목소리였다.
카시우스가 몸에 힘을 풀었다. 그다음 천천히 검을 내렸다.
“메테오 왕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얼굴인데?”
메테오가 싱그럽게 웃고는 말에서 내렸다.
“힐로샤인으로부터의 원군입니다. 헤일린 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구원의 손길이 로테라 저택에 당도했다.
모두가 외면했었던 외로운 싸움에 동지가 생긴 것이다.
메테오가 데리고 온 기사의 수는 많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힐로샤인의 기사들입니다.”
그것이 시사하고 있는 바는 명확했다.
검은 뱀의 기운이 붉은 대지 위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