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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전쟁 (109/135)


109화. 전쟁
2023.04.14.



 
힐로샤인의 성벽, 망루.

성을 보수하고 그다음에는 힐로샤인 밖을 싸고 있는 거대한 성벽을 보수했다.

레니샤가 최우선으로 생각했었던 건 군사력과 보안, 그리고 안전이었다.

새로 신축한 거대한 요새는 그 누구도 넘지 못할 것처럼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뿌우우웅.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어두운 숲속에 숨어 있었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들의 투레질 소리와 갑옷들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기습이다!”

성루도 깨어났다.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던 기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동료의 손에 떠밀린 기사가 성루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대리 영주님, 대리 영주님을 뵈어야 합니다! 기습입니다! 황제의 기사들이 힐로샤인을……!”

그의 고함에 잠들어 있었던 동료들도 뛰어나왔다.

그때, 성루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적의 침입을 알리는 쨍한 종소리였다.


“힐로샤인의 임시 영주, 로테라의 대리는 들으라! 로테라는 황명을 거역하고 반역을 꾀하였다! 감히 역심을 품고 황자 전하를 납치하는 죄를 지었다! 폐하께서는 힐로샤인에 정당한 죄를 물으려 한다! 지금 당장 죄를 인정하고 항복하라!”

우렁우렁한 남자의 목소리가 힐로샤인을 완전히 깨웠다.

헤일린도 그 소리를 들었다.

헤일린이 어두운 미소를 머금었다.

잠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헤일린도 마찬가지였다.


“반역이라.”

“저렇게 사전 경고도 없이 찾아온 것으로 볼 때 이건 공식적인 기습은 아닙니다. 아무런 전조도 없었습니다.”

“렉서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어. 그렇다고 이대로 두 손 들기 위해서 여태까지 준비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

헤일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갈라진 목소리 끝에는 감추지 못하는 증오와 분노가 진득하게 붙어 있었다.

헤일린이 눈을 깜빡였다.

빛무리가 점멸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 미약한 빛은 브릭스턴의 생명만큼이나 애틋했다.

헤일린이 다시는 잡지 못할지도 모르는 빛이었다.

헤일린의 치맛자락을 이사벨라가 붙들었다.

돌아온 이후로 헤일린은 이사벨라를 품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사벨라가 불안한 얼굴로 헤일린을 응시했다.


“어머니…….”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이사벨라.”

헤일린이 이사벨라를 꼭 끌어안았다.

이사벨라가 그런 게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전쟁은 계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 훨씬 더 참혹하고 잔인하다구요.’

이사벨라가 하지 못한 말을 꾹 삼켰다.

지금은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브릭스턴이 사경을 헤매고 있고 헤일린의 몸에는 알지 못했던 흉터가 늘었다.

전쟁은 이미 힐로샤인 전역에 스며 있었다.


“기사들을 준비 시키세요. 이족들의 수장을 들게 하고 전사들도 배치하도록. 여태까지 우리가 훈련한 대로.”

렉서스의 아기가 이곳에 당도했을 때부터 이 순간을 예감하고 있었다.

레니샤는 더 이상의 소요를 참지 못하고 렉서스의 등을 떠민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쟁의 시작을 알린 건 렉서스가 아니라 레니샤였다.

그렇다면 응해줄 수밖에.


“……네, 헤일린 님.”

테리언이 고개를 숙였다.

쵸르파 평야에서 끝났다고 생각했었던 전쟁이 다시 이곳에 도래했다.

테리언이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수많이 이들이 죽고 살았던 끔찍한 지옥이……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렉서스!’

놈의 목을 죽은 기사들의 영전 앞에 바치고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고야 말리라.

***

창가에 서서 커튼 너머를 살펴본 루나가 볼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사들이 쫙 깔렸어. 저놈들 전부 다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거야?”

“아마도.”

레니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겁도 없네. 무섭지도 않아?”

루나가 피식 웃었다.

레니샤가 대담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이 되어서도 저렇게 태연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렉서스와 나는 한 대씩 주고받았어. 더 이상 그런 장난 같은 짓은 싫은 거겠지.”

“저게 장난이라고? 저들은 언제든지 당신을 죽일 수 있어!”

“아마도 그렇겠지.”

레니샤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게 무서워서는 아무것도 못 해.”

레니샤가 눈을 반짝였다.

렉서스의 등을 떠밀 때부터 지금을 짐작하고 있었다.

레니샤가 황자를 훔쳤는데도 가만히 있으면 렉서스가 미친 거거나, 아니면 기력을 잃고 죽어버렸거나 둘 중 하나겠지.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이건 예견된 전쟁이었어. 이제 문제는 누가 이기느냐야. 렉서스는 힐로샤인을 끌고 와서 내 앞에 무릎 꿇리고 다시 나를 꿇리려고 들겠지.”

전에도 그랬듯이 말이다.

레니샤를 꿇리기 위해서 로테라를 꿇렸고 그녀를 망가뜨리기 위해서 로테라 공작을 죽였다.

렉서스는 하나밖에 모르니 이번에도 그 방법을 쓸 것이 분명했다.


“카시우스도 이 전쟁에 충분히 대비했을까?”

“뭐?”

루나가 레니샤를 홱 하고 돌아보았다.


“망할 황제가 카시우스도 공격할 거란 이야기야?”

“그놈은 카시우스를 가장 먼저 노릴걸.”

“어째서!!”

“카시우스가 나를 가졌으니까. 우습지만 그래. 종종 남자의 질투는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거든.”

레니샤가 생긋 미소 지었다.


“너…….”

“이 상황을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레니샤가 나긋하게 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레니샤는 조금도 동요를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루나가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레니샤는 카시우스의 등을 떠밀어 저 난장판으로 내몰았다.

루나의 마음이 부글부글 끓었다.

카시우스는 이런 여자라는 걸 알면서도…….


“렉서스의 목이 필요해, 루나.”

루나가 숨을 삼켰다.


“그놈의 목이 꺾여야 이 모든 게 끝난다는 거야.”

“너…… 이곳에 남은 이유가…….”

“이곳에서 렉서스를 끝내기 위함이지. 황성에는 수많은 비밀 통로가 있어.”

레니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접실 벽의 태피스트리가 걸린 곳으로 간 레니샤가 벽을 톡톡 쳤다.

벽돌 위를 몇 개 짚자 드드득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루나가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렇게 멍청하게 보기만 할 거야?”

루나가 고개를 저었다.


“카시우스를 구하러 가야지.”

레니샤가 손을 내밀었다.

간결하게 차려입은 드레스 위에 후드를 눌러쓰고 있었다.

레니샤는 이미 지금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나는 도망치려는 건 줄 알았지!’

하여튼 상상을 넘는 여자 같으니라고.

게다가 카시우스를 구하러 간다고?


‘이 망할 X.’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게 누군데!

그런데 루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설렘을 느꼈다.

레니샤의 손을 잡고 이족들의 원수, 렉서스의 목을 따러 가는 것이다.

레니샤는 루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루나가 레니샤의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너는 정말 미쳤어.”

레니샤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

카시우스가 저택을 일깨웠다.

카시우스가 점처럼 뿌려놓은 자들로부터 신호가 오고 있었다.


“지금 황제의 군대가 램버튼 다리를 건넜습니다!”

“황제의 군대가 8번 스트리트를 넘었습니다!”

연달아 도착한 보고에 카시우스의 신경이 곤두섰다.

렉서스는 검을 빼 들었다.

레니샤는 카시우스가 그 검을 맞받아치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하여 로테라 저택을 지켜내고 황성으로 오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렉서스가 먼저 힐로샤인과 로테라를 공격했다.

명분은 충분했다.


“먼저 첫 번째 전략에 따라 움직인다.”

카시우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뒤를 돌아보는 카시우스의 눈동자에는 적빛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노인과 여자, 어린아이들은 모두 지하로 피신시키고 나머지는 검을 들고 맞서 싸우게 하라. 내가 가장 선두에 설 것이다.”

“네, 각하!”

카시우스가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레니샤가 그를 위해서 벼려준 검이었다.

마치 검이 렉서스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고!

카시우스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팔등을 따라 붉은 비늘이 돋아났다.

슈르륵, 슈르륵.

신으로부터 훔쳐 온 힘이 렉서스를 휘어 감았다.

저택의 병력은 총 둘로 나뉘었다.

그들이 좌우를 책임질 것이다.

그리고 중앙은 카시우스, 그 혼자면 충분했다.

황제의 기사들은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카시우스는 투리엘을 통해서 인근에 기거하고 있는 제국민들에게 충분히 고지를 해두었다.

덕분에 거리는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잔혹한 밤이 몰려오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숨을 몰아쉬었다.

저택의 문은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

기사들을 동원해서 장작을 그 앞에 쌓아놓았으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곧 무너진다. 이 저택의 최고 전력은 카시우스였다.

그가 이 모든 것을 막아내야 했다.

검을 손에 쥔 카시우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내게로 와요, 카시우스.’

레니샤가 속삭였던 목소리가 귀에서 눌어붙어 있었다.

카시우스가 검을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아아! 문을 부수고 반역자들을 처단하라!!!”

“황제 폐하의 명이시다! 카시우스 공작을 생포하여 오는 자에게는 충분한 포상금을 줄 것이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맨 앞에 서 있던 클라우드 공작이 뒤로 몸을 뺐다.

기사들이 카시우스의 주변으로 일렁거리는 붉은 기운을 보고는 멈칫했다.

카시우스의 위로 새빨간 뱀이 고개를 치켜들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환각이 보였다.


‘카시우스 공작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지? 학살자래.’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더라!’

‘죽은 자의 피를 마시고 가죽을 벗겼다던데!’

‘뱀이 되면 이지를 잃고 사람들을 집어삼킨대!’

거리에 떠돌았던 소문들이 그들의 발목을 붙들었다.

뒤에 빠져 있던 클라우드 공작이 고함을 질렀다.


“망설이는 자는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군법에 따라 처형하겠다! 당장 저놈의 목을……!”

그 순간, 클라우드 공작과 카시우스의 눈이 마주쳤다.

클라우드 공작이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큼! 저놈의 목을 내게 가져와라! 평생 먹고살 수 있는 재산을 줄 것이다!”

평생 먹고살 수 있는 재산.

그것 또한 살아 있어야 효용이 있는 것을.

망설이는 기사들의 등을 클라우드 공작이 마구잡이로 떠밀었다.


“죽고 싶은 게냐!”

앞에는 들개가 도사리고 있었고 눈앞에는 그들을 죽일 신이, 붉은 뱀이 기다리고 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한 기사들 중에는 검을 버리고 탈주하는 자들도 있었다.

귀로만 전해 들었던 쵸르파 평야의 전설이 눈앞에 재현되고 있었다.


“이, 이, 이!! 이 빌어먹을 것들이!”

클라우드 공작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기세 좋게 밀고 들어올 땐 언제고!

클라우드 공작이 검을 들어 제 옆에 서 있던 기사의 목을 베었다.


“공작 각하!!”

“당장 가서 카시우스의 목을 가져와!!”

악귀처럼 피를 흘리고 선 클라우드 공작이 기사들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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