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레니샤가 있어야 할 곳 (108/135)


108화. 레니샤가 있어야 할 곳
2023.04.11.



 


“그러는 자네는 황제 폐하를 마음에 두었는가?”

“그러지 않고서야 이곳에 들어올 리가 없겠지요. 다른 남자의 아내로 황성에 들어오신 레니샤 님과 제가 같습니까?”

렐라인이 까르륵 웃었다.

레니샤는 렐라인의 눈동자에 가득 들어찬 경멸과 우월감을 읽었다.


“물론, 모든 기회는 레니샤 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이지요. 황제 폐하의 아이를 낳지 못하셨으니……. 그렇지 않니? 너희도 레니샤 님께 감사하도록 해.”

렐라인이 제 옆에 있는 후궁들을 부추겼다.

레니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들 이렇게 앞뒤 분간 못하는 치들이 많은 건지.

레니샤에게 저들은 사자 꼬리에 맴도는 파리보다도 못한 존재들이었다.

레니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 했나?”

“네?”

렐라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치욕스러울 만도 한데 레니샤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렐라인의 입술이 오기로 파르르 떨렸다.

레니샤는 황제의 후계자를 낳지 못했다.

무엇이 도화선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치욕스러운 이유로 내쫓겼다.

그러다가 지금은 황성에 붙잡힌 인질 신세 아니던가.

황제가 로테라를 지독히 미워하지 않고서는 이럴 수는 없었다.

분명 기가 죽어 있어야 하는데 뭐가 저렇게 기고만장한 건지.

렐라인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니요! 아직 할 말이 남았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한동안 제 침실에만 들르실 겁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레니샤 님하고는 천지 차…….”

“쉿.”

레니샤가 나긋하게 검지를 입술 위에 얹었다.


“머리가 울려서 말이야. 자네의 가치는 거기에 있나 보군. 황제의 아이를 낳는 것.”

렐라인이 입을 벙긋거렸다.

갑자기 훅 들어온 반박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이다.

렐라인은 그간 황제에게 핍박받던 레니샤만 보았다.

그러다 보니 그 속의 진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플랜스 백작은 분명 레니샤를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렐라인은 그게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했었다.


“내 가치는 그런 사소한 데 두지 않아서 말이야. 황제의 아이를 낳는 건 내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니야, 렐라인.”

레니샤가 깍지를 낀 손을 배 위에 얹었다.

그 나태로움이 렐라인의 눈동자에 비쳤다.

레니샤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가녀린 몸으로 이 황실에 충분히 맞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렐라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건 착시 현상이다. 레니샤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게 무슨 무례한 말씀이십니까? 아이를 낳는 것은 황성에 들어온 여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나는 황제의 여자가 아니야. 그런 작은 그릇에 나를 가두지 말게.”

레니샤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두 번째.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있어.”

“…….”

“황제를 스쳐 갔었던 여자 중에는 죽은 이들도 한둘이 아니지. 비참하게 쫓겨난 자들은 더 많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곳에, 이렇게, 멀쩡하게 있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레니샤가 입술을 늘어뜨렸다.

그 미소가 렐라인의 눈동자에 찌르듯이 박혔다.

레니샤의 발밑에 고인 어둠이 그녀를 떠받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같은 높이의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데도 레니샤가 있는 자리만 높아 보인다.

렐라인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황제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는 의미지. 그리고 내가 설사 이 자리에서 자네를 죽인다고 해도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레니샤가 웃음을 흘렸다.

정말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렉서스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레니샤를 괴롭혔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레니샤를 괴롭히는 건 용납하지 못한다.


“그, 그걸 어떻게 단언하십니까?”

“한번 시험해볼까?”

렐라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레니샤는 지금 렐라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 위압감에 렐라인이 움츠러들었다.


‘아버지 말씀이 맞았어……!’

황제에게 끌려다니던 레니샤의 모습은 단면에 불과했다.

레니샤는 제 혼자서도 충분히 황성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여자였다.

게다가 레니샤의 말은 틀린 부분이 없었다.

렉서스는 그간 레니샤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고 있었음에도 그녀를 죽이지 못했다.

로테라를 도륙내고, 레니샤를 쫓아냈음에도.

오히려 황성에 붙들어두고…….


‘빼앗기기 싫은 것처럼…….

렐라인이 제 아둔함을 깨달았다.

이 기이한 황성의 비밀을 알아차린 것이다.

렉서스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 속에 누구를 품고 있는지 말이다.

렐라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렐라인이 허둥거리며 줄행랑을 놓았다.

레니샤가 그 뒷모습을 보며 혀를 짧게 찼다.


“죽이는 게 나았을까?”

“플랜스를 비롯한 다른 가문들의 반발을 사셨을 겁니다.”

“그래도 우습게 보이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지.”

레니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나를 배반한 사냥개들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충분한 본보기가 되었을 텐데.”

레니샤가 화사하게 웃었다.


“……루나.”

“왜.”

“오늘 밤, 저 여자의 머리를 잘라와.”

“뭐????”

루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그렇게 놀라? 그러면 내가 이대로 당하고 있을 줄 알았어?”

레니샤의 아름다운 분홍빛 눈동자가 사늘한 빛으로 물들었다.

루나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

플랜스 백작이 레니샤가 보낸 편지 봉투를 뜯었다.

왠지 마음이 섬뜩했다.

황제의 손을 잡은 것은 더 높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욕심이 있어서였다.

황제의 조부.

그 자리가 탐났다.

이 제국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싶은 야망이 플랜스 백작을 들쑤셨다.

레니샤의 이름이 박힌 편지 봉투에 목뒤가 서늘했다.


“뭐야, 이게.”

편지지는 보이질 않는다.

플랜스 백작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봉투를 탈탈 털었다.

후드득.

그 속에 들어 있었던 것들이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쏟아졌다.


“으악! 이, 이, 이게…… 뭐야!!!”

플랜스 백작이 비명을 질렀다.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은 황성으로 들어간 렐라인의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이 꿈틀거리며 되살아나 플랜스 백작을 향해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내는 것 같은 환상이 일었다.

플랜스 백작이 테이블을 밀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플랜스 백작이 소리쳤다.


“다, 당장 황성에 사람을 보내서 렐라인의 생사를 확인하게!!!”

잊고 있었다.

레니샤가 로테라의 핏줄이라는 것을.

선대 공작의 차가운 눈빛이 플랜스 백작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충신들에게는 자비롭고 배신한 자들에게는 잔혹했었던 그의 전주인이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플랜스 백작이 비틀거렸다.


“……내가 미쳤었지…….”

그럼에도 되돌아갈 길은 없었다. 그저 직진뿐.


 

***

렐라인을 죽이진 않았다.

그저, 황성의 매서움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렐라인은 공포를 호소하며 렉서스에게 레니샤를 고발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렐라인은 자신의 주제를 깨달았다.


“……이렇게 주제를 알려줘야만 알아듣는다니.”

레니샤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렐라인이 보내온 사과 편지를 바닥에 내던진 레니샤가 방 안을 서성거렸다.

레니샤가 렐라인을 공격한 건 플랜스 백작을 자극하기 위함도 있었다.

플랜스 백작은 위협을 느끼고 기사들을 내놓았다.

레니샤가 창밖의 달을 응시했다.

운명이 움직이는 소리가 귀에 고스란히 들리는 듯했다.

카시우스가 찾아온 건 그날 새벽이었다.

레니샤는 잠들지 못했다.

레니샤는 렉서스의 등을 떠밀었다.

황자가 레니샤의 손에 있다는 걸 렉서스가 모를 리가 없지.

이쯤 되면 렉서스도 레니샤가 바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놈은 멍청한 게 아니다.

그저 뒤에서 관망하며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레니샤가 짙은 어둠을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바스락.

수풀 사이에서 붉은 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카시우스.”

레니샤의 속에 고여 있었던 긴장감이 고스란히 흩어지는 것 같았다.

레니샤가 숨을 터뜨렸다.

차가운 새벽 바람을 고스란히 품고 들어온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끌어안았다.

카시우스가 숨을 몰아쉬었다.

렉서스의 군대가 움직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숨도 쉬지 못하고 달려왔다.

끔찍한 상상들이 줄을 이었다.

레니샤는 렉서스와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레니샤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레니샤가 머무는 처소를 중심으로 기사들이 깔려 있었다.

카시우스는 레니샤를 품에 안은 다음에야 숨을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카시우스가 몇 번의 심호흡 끝에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레니샤, 황성을 떠나야 합니다.”

“……렉서스가 움직였나요?”

“황성에서 출발한 기사들이 힐로샤인으로 말 머리를 돌렸습니다. 로테라 공작가를 중심으로 암살자들이 배치됐어요. 여기 주변에도 기사들이 깔렸습니다. 도망쳐야 해요.”

레니샤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오히려 레니샤가 바라던 바다.

이 전쟁에서 레니샤가 이긴다면 렉서스는 충신을 도륙한 황제가 될 것이다.

그 핍박에 못 이겨 검을 들고, 제국을 구한 영웅이 되겠지.

이 썩어빠진 황성에서 렉서스를 도려내는 거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등을 마주 안았다.


“드디어…… 시작이군요.”

그 목소리에는 옅은 희열이 서려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먼저 검을 꺼내는 건 렉서스여야 했다.

지금을 위해서 공을 들여 렉서스를 압박하지 않았던가.

카나리아의 죽음과 플랜스 백작의 결심은 렉서스를 움직이는 마지막 스위치가 되었을 것이다.

가진 것을 놓치기 싫다면 움직여야지, 렉서스.


“도망쳐야 해요.”

카시우스가 간절하게 말했다.


“카시우스, 나는 여기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레니샤가 고개를 들었다.

레니샤는 어느 때보다도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나가 나를 지킬 거고……. 전에 말했던 대로 너무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면 루나와 함께 탈출할 거예요.”

카시우스는 그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레니샤…….”

“투리엘과 나, 루나. 이렇게 세 사람이 몰래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해요. 오늘 이곳에서 나가는 건…….”

레니샤와 투리엘의 눈이 마주쳤다.

투리엘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지만, 레니샤가 빨랐다.


“투리엘이에요. 카시우스, 투리엘을 데리고 나가줘요.”

오늘 카시우스가 찾아오는 것도 레니샤의 계산 속에 있었다.


“렉서스는 나를 죽이지 못해요. 하지만, 투리엘은 죽일 수 있어요. 오늘 나가야 하는 건 투리엘이지 내가 아니에요.”

레니샤가 다시 한번 말했다.

카시우스가 입을 벙긋 벌렸다가 다물었다.

레니샤는 고집스러웠다.


“내가 원하는 건 다 해준다고 했잖아요.”

레니샤가 카시우스이 뺨을 쓰다듬었다.


“나를 위해서 해줄 거죠?”

절대로 거절은 듣지 않겠다는 눈빛이다.

카시우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검을 들고 내게로 와요.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레니샤가 그녀의 길을 결정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