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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황성에 온 세 여자 (107/135)


107화. 황성에 온 세 여자
2023.04.07.



 
레니샤가 황자를 품에 안았다.

렉서스가 이 아이에게 어떤 이름을 붙였던 그런 건 상관없었다.

레니샤가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축 늘어진 루나가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이전에는 사람을 죽여본 적 없었나?”

레니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루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해냈다.


“……해봤지. 하지만, 오늘처럼 진이 빠지는 건 또 처음이야. 이런 일에 갓난아기가 끼는 건 처음이거든.”

루나가 레니샤의 품에 안긴 아기를 힐끗 보았다.

평온하게 잠든 아기의 숨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아기는 아무것도 몰랐다.

제 운명이 소용돌이 속에 내던져진 것도, 제 어미의 죽음도.

루나가 고개를 돌렸다.

짙은 죄책감이 루나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 루나. 이 모든 건 내가 짊어질 거니까.”

레니샤가 나긋하게 말했다.


“그 아기는 어떻게 할 거야? 내일이면 난리가 날 텐데. 조금 있으면 동이 터. 설마 그 아기도…….”

“그 정도로 잔인한 사람은 아니야. 투리엘.”

“네, 폐하.”

역시 잠 못 이루고 있었던 투리엘이 대답했다.

레니샤가 아기를 투리엘의 품에 안겨주었다.

작은 입술을 벌려 하품한 아기가 작은 손으로 제 눈을 비볐다.


“어때. 렉서스를 닮은 것 같나?”

“……글쎄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 아이를 데려온 건 혹시나 싶어서야. 이 아기가 조금이라도 렉서스를 닮은 데가 있는지 궁금해서.”

레니샤가 아기의 뺨을 톡 하고 쳤다.

지금도 고민이었다.

이 아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카나리아는 죽었고 렉서스는 아기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

이 황성에 있어봤자 천덕꾸러기가 될 확률이 높았다.

렉서스는 100의 확률로 카나리아의 죽음을 침묵할 것이다.

지금 황성에 새롭게 들인 세 명의 후궁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그들의 두려움은 전염되어 그들의 아비에게까지 전달될 것이다.

그건 렉서스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렉서스는 아기가 실종된 것에 대해서도 침묵할 것이다.

이 또한 같은 이치였다.

오히려 제 손으로 죽이지 않아도 되니 속 시원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작은 확률로 아기가 자랄수록 렉서스와 점점 달라진다면?

의혹은 점점 커질 것이다.

렉서스는 이미 아기에게 손을 쓸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황성에 두는 것보다는 밖으로 보내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었다.


“이 아기가 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죽이시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요.”

투리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품에 안긴 온기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아기가 자라서 레니샤를 겨누는 검이 된다면?


“그럴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면 될 일이야. 이 아기를 힐로샤인으로 보내겠네.”

“네?”

투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힐로샤인의 아기로 키우겠다는 말일세. 헤일린이라면 이 아기를 받아들여 줄 거야.”

아기의 거처가 결정되었다.

이제 내일 아침의 해가 뜨기만을 기다리면 될 일이다.

렉서스, 너는 어떤 결정을 할 거지?

내가 예상한 대로 움직일 텐가, 아니면 반대로 움직일 텐가.

***

새 후궁의 침실에서 눈을 뜬 렉서스를 시종장이 흔들어 깨웠다.

무엄함도 잊은 손길이었다.

후궁이 이불을 끌어 올려 몸을 덮었다.


“이게 무슨 무례인가! 당장 밖으로 나……!”

“닥쳐.”

렉서스가 머리를 쓸어 넘기곤 후궁에게 베개를 던졌다.

머리가 울렸다.

렉서스가 시종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종장이 미리 준비해온 물과 약을 그 손 위에 올렸다.


“이렇게 찾아온 이유가 있겠지. 말해 봐.”

렉서스가 눈을 깜빡였다.

뒤에서 불만이 가득한 구시렁거림이 들렸다.

천천히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금단현상을 이겨내느라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시종장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무엄함을 용서하소서!”

시종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렉서스의 귀에 속삭였다.

뒤에 웅크리고 있는 후궁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황후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그리고 황자 전하께서도 사라지신 것으로 확인됩니다.”

“허.”

렉서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레니샤…….’

누구의 짓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범인은 찾을 수 없겠지. 아니 그런가?”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이 사건은 은폐하게. 아무도 알아서는 안 돼.”

렉서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레니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짐작 가능했다.

렉서스가 뒤쪽을 힐끗 보았다.

토라졌는지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는 저 후궁을, 그리고 다른 후궁들을 흔들기 위함이겠지.

고작 그런 말에 토라져서 저러고 있는 걸 보면 카나리아가 죽었다는 걸 알자마자 아비를 조를지도 모른다.


‘저 무서워요, 돌아가게 해주세요!’

레니샤가 바라는 것도 그것이겠지.


“네, 폐하……! 그러면 황자 전하는…….”

“그대로 두게.”

어딘가에는 살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렉서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렉서스는 그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황자가 렉서스가 성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증명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황자가 그 누구도 닮지 않았음을 드러낸다면?

결국 다시 렉서스는 논란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차라리 황자는 없는 편이 낫다.

렉서스가 다시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차피 그는 아기를 낳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몸이라는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카나리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도 기쁨보다는 의아함이 앞섰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멍청하고 비루한 카나리아가 렉서스를 배반했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안일했지. 밥 수저 들 힘만 있어도 제 이익 쫓아다니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을.’

오히려 이렇게 레니샤의 손을 빌려서 황성을 정리할 수 있으면 훨씬 나았다.

어차피 레니샤는 이 일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대대적인 수사가 들어갈 테고 레니샤는 잠정적 용의자로 지목될 테니.

카나리아의 죽음은…… 렉서스에게 어떤 감흥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저 조금 아쉬웠다.

다시는 카나리아의 노래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

모든 명령을 들은 시종장이 물러갔다.

그제야 렐라인이 이불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다 끝난 건가요?”

“그래.”

렉서스가 무심하게 대답하곤 침대 헤드보드에 기대앉았다.

약 기운이 돌 때까지는 가만히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렐라인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렐라인이 구렁이처럼 렉서스의 다리 위에 타고 앉았다.

렉서스가 눈을 찌푸린 채로 자극적인 장면을 응시했다.


“……이런 모습을 시종이나 시종장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요, 폐하.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렐라인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렉서스가 귀여움을 떠는 렐라인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렉서스가 손을 뻗었다. 렉서스가 렐라인의 뺨을 움켜쥐었다.


“아!”

“너는 나와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에?”

발음이 뭉개진 렐라인이 되물었다.


“너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 같으냐고 물었다. 연애? 사랑?”

렐라인의 청명한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렐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부부가 됐잖아요!”

“하하……. 렐라인, 계약하기 위해서 왔으면 계약만 해야지. 이렇게 헷갈리면 서로 곤란하지 않겠어?”

렐라인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렉서스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렐라인이 표독스럽게 렉서스를 노려보았다.


“그 여자 때문인가요?”

“뭐?”

“레니샤 로레타 말이에요! 황후도 아니면서 대체 왜 그 여자가 황후궁을 쓰고 있죠? 그 자리엔 카나리아 황후 폐하가……!”

렉서스가 렐라인의 턱을 잡아당겼다.


“아악!”

“레니샤의 이름을 그 입에 함부로 담아서는 안 되지. 그럴 수 있는 여자가 아니거든. 카나리아 황후 폐하라. 정말로 그 여자를 존중하는 게 아니잖아, 렐라인. 그 여자가 레니샤보다 쉬우니까 하는 말이겠지. 멍청한 척하는 것보다 차라리 솔직한 게 나아, 렐라인.”

렉서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렐라인의 눈에는 그런 렉서스가 악마처럼 비쳤다.

매우 매혹적인 악마.

은발 아래 보랏빛 눈동자가 묘한 빛으로 반짝였다.

렐라인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침을 삼켰다.


“저, 저는 정말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시겠지.”

“레니샤 님은……. 그러면 레니샤 님은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그분은 이곳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거죠? 가르쳐주세요.”

렐라인이 꼬리를 내렸다.

렉서스가 렐라인의 턱을 놓아주었다.

렉서스가 눈을 깜빡였다.

레니샤? 렉서스에게 있어서 레니샤는……. 레니샤는…….


“당연한 존재.”

“네?”

“당연한 존재라고. 그 자리에 있는 게 너무 당연한 존재.”

렉서스의 곁에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

그게 렉서스가 레니샤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레니샤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렐라인이 입을 벌렸다.

렉서스와 레니샤에 대해서는 그녀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렉서스가 레니샤에게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도 말이다.

그런데 당연한 존재라니. 그런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보다 렉서스의 안에서 레니샤의 존재가 큰 것 같았다.

렐라인이 볼을 부풀렸다.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쉽진 않을 것 같다.


“……제가 아침 인사를 어느 분께 드려야 할까요?”

렉서스가 눈을 굴렸다.

당연히.


“레니샤. 카나리아에겐 찾아갈 필요 없어.”

렉서스는 죽어 사라진 카나리아를 완전히 그렇게 은폐할 생각이었고, 렐라인은 이 황성에서 카나리아가 가진 위치가 그만큼 낮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동상이몽이었다.

***

레니샤가 헛웃음을 지었다.

후궁 셋이 나란히 몰려와 레니샤에게 아침 인사를 하겠다고 우겨댄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 명하셨습니다.”

렐라인 플랜스.

플랜스 변경백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제도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레니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 렐라인을 따라서…….”

“저도요. 저도 렐라인을 따라서 왔습니다.”

렐라인을 제외한 여자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레니샤를 보는 것 자체가 두렵다는 듯이.

저 오합지졸 속에서도 머리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 머리가 렐라인이고.


“아침부터 나를 찾아와줘서 고맙네.”

레니샤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벽 내 한잠도 자지 못했다.

황자가 무사히 떠나고 황성에 새벽공기가 스밀 때까지 레니샤는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맞이한 이 여자들이란.

레니샤가 피로함에 한숨을 삼켰다.


“황제 폐하께서 레니샤 님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깊으시더군요.”

렐라인이 생긋 웃었다.


“혹 황제 폐하를 마음에 두셨습니까?”

이것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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