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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비루한 누군가의 마지막 (106/135)


106화. 비루한 누군가의 마지막
2023.04.04.



 
렉서스는 후궁을 뽑는다는 은밀한 편지를 발송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이미 카나리아의 황자는 실각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황제가 그 아이의 핏줄을 인정하고 황적에 올렸지만, 그 아이의 꼬리표는 평생 갈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이, 제국민들이, 더해서 신전에서 그 아이가 황제의 자리에 앉는 것을 두고 보겠는가.

개떼처럼 몰려들어서 물어뜯겠지.

그렇다면 결국 새로운 후계자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내 딸이, 조카가, 손녀가 황제의 후계자를 낳는다면?

이 욕심이 레니샤의 손을 잡은 이들의 마음까지 흔들었다.

물론, 이것은 렉서스의 집권이 이어져 성공적으로 후계자가 물려받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했다.

망설이던 이들에게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이번엔 레니샤로부터 온 초대장이었다.

초대장을 받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하실에 모였다.

거대한 홀로 조성된 지하실에는 불이 밝게 밝혀져 있었다.

지상과 전혀 다를 게 없게.


“……오늘 레니샤 님께서 무슨 일로 우리를 모으신 것 같소?”

“그야.”

덴버스 후작이 생긋 웃었다.


“헛된 생각을 하는 작자들이 있어서 그러신 것 아니겠습니까?”

덴버스 후작이 날카롭게 덧붙였다.


“믿고 따르면 될 것을 항상 이렇게 문제를 만드는 자들이 있지요.”

“커흠. 후작께선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고 그러나.”

모두들 얼굴을 붉히곤 고개를 돌렸다.

덴버스 후작이 헛웃음을 지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지금 딱 그 짝 아니던가.

갈대처럼 흔들리는 저들의 충성심이 한심스러웠다.

덴버스 후작이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무슨 일인지 짐작해보고자 했던 이들이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는 제도 자체가 살얼음판 같았다.

카나리아가 벌인 일도 그렇지만, 기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변방의 영주들도 술렁이고 있었다.

개혁을 성공해서 공신이 되느냐, 아니면 개혁을 실패해서 반역자가 되느냐.

아니면 지금에 머물러 있다가 개죽음을 당하느냐, 그도 아니면…….

그 덕에 조마조마하게 하루하루를 나고 있었다.

덴버스 후작이 손에 쥐고 있던 증표를 만지작거렸다.

레니샤가 내어준 이 증표를 나눠 가졌던 이들 중에 한 사람이 떠났다.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덴버스 후작이 이토록 외로운데 레니샤는 또 얼마나 외로울까.

그렇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였다.

끼이익-.

지하실의 문이 열렸다.

카시우스와 후드를 쓰고 있던 두 명이 들어왔다.

카시우스의 바로 뒤에 서서 후드를 쓰고 있던 여자가 제 정체를 드러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인물인데.”

저도 모르게 말을 토해낸 남자가 입을 틀어막았다.

고요함 속에 제 목소리만 울린 탓이다.

카시우스가 입을 열었다.


“황성에서 나온 사람이네. 레니샤를 옆에서 시중들고 있는 이이지.”

루나가 불만을 담아 카시우스를 노려보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루나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리고 이쪽은.”

카시우스의 손짓에 나머지 사람이 후드를 벗었다.


“황제의 주치의……!”

“카멜 자작 아니시오!”

황제의 주치의가 황성에 감금되다시피 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카멜 자작은 황제의 건강을 맡게 된 이후로 황성 밖 구경을 한 적이 없었다.

렉서스는 의심이 많은 자였고 그의 주치의도 믿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랬었던 카멜 자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악했다.


“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황제의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오?”

“혹, 그 낭설이 사실이었던 건가?”

질문이 빗발쳤다.

카멜 자작이 안경을 쓱 밀어 올렸다.

어느새 주름진 얼굴에 딱딱한 미소가 걸렸다.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레니샤 님의 부름을 받아 이곳에 왔습니다. 제가 전해드려야 할 이야기는 한 가지.”

카멜 자작이 한숨을 내뱉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뱀독으로 인해서 아기를 가지지 못하는 몸이 되셨소.”

“헉!!”

“그게 무슨……!”

“이미 오래된 일이며 황제 폐하께서도 이 일에 대해서는 모르고 계시오.”

귀족들이 입 안을 혀로 쓸었다.

침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황제.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여태까지 아무 내색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레니샤 님께서 밝히길 바라지 않으셨으니까.”

카멜 자작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분의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오.”

카멜 자작이 주머니에서 그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증표를 꺼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실 이가 있겠지.”

카멜 자작의 눈이 덴버스 후작을 향했다.

덴버스 후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레니샤의 증표다. 덴버스 후작이 증표와 카멜 자작을 번갈아 보았다.


“……저자의 말은 믿을 수 있소. 레니샤 님을 믿는다면 말이오.”

그 말이 마법이라도 된 것처럼 소란스럽던 이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는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없소. 그러니, 지금 태어난 황자도 황제의 아이가 아니오.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아이가 태어날 일도 없을 것이오.”

귀족들이 침음을 삼켰다.

레니샤는 그들의 망설임에 못을 박아 넣었다.

렉서스를 따르다가는 미래가 없을 거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플랜스 백작의 딸이 이번에 후궁에 들기로 했다던데…….”

누군가 탄식처럼 터뜨렸다.


“욕심에 눈이 먼 작자들까지 레니샤 님께서 안고 가실 이유는 없지.”

덴버스가 입술을 비뚤게 끌어 올렸다.


“나는 이 자리에서 레니샤를 대신해 그대들로부터 맹세를 받고자 하오.”

카시우스가 손에 들고 있었던 양피지를 내려놓았다.

책상 위를 굴리니 반대편 끝까지 펼쳐졌다.


“각자의 이름을 적고 인장을 찍으시오.”

여기에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으면 더 이상 갈팡질팡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 배를 탄 사이가 될 테니까.

펜을 들기를 망설이는 자들을 보며 카시우스가 비웃었다.


“그대들이 큰 착각을 하나 하고 있는 듯한데. 자네들만 레니샤의 손을 놓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리도 자네들의 손을 놓을 수 있네. 오늘 서명하지 않는 자는 우리의 손을 놓은 것으로 간주하겠네. 더 이상 함께하지 않게 되는 거야.”

카시우스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이 이유 없이 번뜩였다.

마치 여기에 앉은 자들의 목을 베기라도 할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카시우스는 팔짱을 끼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서늘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던 이들이 느림보처럼 펜을 꺼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는 게 보였다.


‘머리 굴리는 게 여기까지 보이는군.’

저들을 다 버리고 가면 참 좋을 것이나 그렇게는 제국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없었다.

저들의 존재는 필요악이었다.

***

후궁에는 총 셋이 들었다.

렉서스가 직접 고른 가문들의 영애였다.

개중에 둘은 레니샤의 사람들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변경 영주의 딸이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변경 영주의 딸, 렐라인과의 합궁일이었다.

렉서스가 달콤한 꿀을 탄 물로 입을 적셨다.

머리가 아릴 정도의 단맛이었다. 렉서스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렐라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모래바람에도 조금도 상하지 않은 고운 피부와 약간의 주근깨가 뺨에 박혀 있었다.

짙은 녹안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렐라인.”

“네, 폐하.”

“너는 이 황성에서 무엇을 하고 싶으냐?”

렉서스가 부드럽게 물었다.

렐라인이 눈을 굴렸다.

렉서스는 위험한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경고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 렐라인이 마주한 렉서스는 아름답고 몸도 좋은 남자였다.

거기에 황제이니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렐라인이 볼을 붉혔다.


“저는…… 황제 폐하를 보필하여 황실을 튼튼하게 하고 싶습니다.”

“아이도 낳고?”

“네, 아이도 낳고요.”

렉서스가 피식 웃었다.

그러기 위해서 들인 여자였다.

그리고 이 여자의 아비가 렉서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못마땅한 건지.

이 여자는 조금도 레니샤를 닮지 않았다.

레니샤와 연관이라고는 뺨에 돋은 솜털만큼도 없으리라.

렉서스가 아름다운 미소를 그렸다.


“등 돌려.”

“네?”

“얼굴을 보이지 말라고. 못 알아듣나?”

하얗게 질린 렐라인이 느릿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렉서스가 렐라인의 팔을 붙들었다.

***

카나리아가 아이를 끌어안은 채로 침대 위에 웅크렸다.

렉서스가 다녀갈 때를 제외하고는 카나리아는 내내 아이만 끌어안고 있었다.

아이가 카나리아를 지켜줄 것이다.

이 아이만이 카나리아의 빛이다!

렉서스를 믿고 까불었었던 예전의 카나리아는 없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작은 소음에도 화들짝 놀라고 문이 닫히고 열리는 소리에 극도로 예민해졌다.

카나리아는 바랐던 대로 레니샤를 밀어내고 황후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처지는 예전만도 못하다.

레니샤는 여전히 고고한 황후처럼 황실에 기거하고 있었으며, 카나리아는 하찮은 벌레 같은 신세가 되었다.


“왜 나한테만……. 나한테만 그래…….”

카나리아가 아이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잠들었었던 아기가 천진한 눈을 떴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카나리아가 아이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나를 살려주세요, 황자……. 두렵고 무섭습니다…… 이 어미를 살려주세요.”

카나리아가 중얼거렸다.


“뺘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기가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눈물이 또 한 번 터져 나왔다.


“나 어떡하지…….”

카나리아가 덜덜 떨었다.

또다시 한기가 카나리아에게 스며들었다.


“어떡하지, 아가…….”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끼이익.

창문이 열리는 소리에 카나리아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 커튼만 휘날렸다.

카나리아가 벽 쪽에 몸을 좀 더 붙였다.

경계심이 가득한 들짐승처럼 웅크린 채로 입을 꾹 닫았다.

카나리아가 어둠을 노려볼 때였다.


“……죽을 걸 알고 있었나?”

“누, 누구야!!”

카나리아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어느새 그녀는 카나리아의 앞에 와 있었다.

달빛에 그 정체가 드러났다.


“비루한 쥐새끼 같군.”

카나리아의 불청객, 루나가 중얼거렸다.

루나의 시선에 아이를 끌어안고 떨고 있는 카나리아가 비쳤다.


“나, 나를 죽이러 온 거지! 나를 죽일 거면 아이도 죽여야 할 거다! 이 아기가 나를 지키고 있어!!”

생명줄처럼 아기를 끌어안고 카나리아가 외쳤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크게 터졌다.

카나리아가 끌어안은 팔이 아픈 듯했다.

그 꼴을 보면서 루나가 혀를 찼다.


 


“끝까지 비참하구만.”

저런다고 갓난쟁이 하나 피하지 못할까.

루나가 손을 뻗었다.

카나리아를 그대로 품으로 끌어안음과 동시에 단검을 질러 넣었다.


“꺼어억!”

카나리아의 입을 틀어막은 루나가 단검을 느리게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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