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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스스로의 의지로 (105/135)


105화. 스스로의 의지로
2023.03.31.



 
캘리엇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이 자리의 위태로움에 대해서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캘리엇 백작이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를 받아들인 이유는 단 하나. 귀족이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을 기사로 살았다.

실력도 뛰어나고, 다른 이들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검을 수련했고 밤잠도 줄여 가며 몸을 단련했다. 선선대 캘리엇 백작도, 그의 첫 상관도, 그의 검술을 칭찬했다.

하지만 신분의 한계는 뚜렷했고, 그 벽은 노력으로 넘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신분만 뒷받침된다면 승승장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 기회가 올 모양이다.


“지금 제도에 있는 병력의 수는 보병 3천, 기병 1천입니다.”

렉서스의 눈빛이 깊어졌다.

저들은 실전에서 싸워 본 적이 없다. 반면에 카시우스의 기사들은 실전에서 싸워 온 베테랑 들이었다.

게다가 힐로샤인에 로테라의 부산물들이 모여들고 있다지? 그들 또한 선대 로테라 공작과 함께 전쟁터를 누비던 진정한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쵸르파 평야를 렉서스에게 가져다준 승리자들이기도 했다.


‘나에 대한 원한도 깊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렉서스가 미간을 꾹 눌렀다. 오랜 기간 복용해 온 약과 술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환상에 홀려 지금까지 왔다.

여전히 후회는 하지 않는다. 렉서스는 그 안에서 안식을 찾았으니까. 이 지독한 두통도 잊을 수 있었다. 렉서스가 처음 약과 술을 시작한 계기도 바로 이 두통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격렬한 통증에 렉서스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지금 렉서스에게 닥친 이 문제는 술과 약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로테라가 렉서스에게 검을 반대로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네는 그들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된다고 보나.”

“어떤 전쟁이냐에 따라 다를 것이옵니다.”

캘리엇 백작이 정확한 답변을 피했다. 렉서스가 실소를 흘렸다. 저 말은 결국 제도의 기사들은 전쟁 경험이 없어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렉서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가 느리게 눈을 치켜떴다.


“그렇다면 정확히 묻지. 그들이 로테라의 기사들을 이길 확률은 얼마나 되지?”

캘리엇 백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제야 이 회담의 목적을 깨달은 것이다. 황제는 귀족들의 버릇을 고치려는 선에서 일을 벌이려는 게 아니다. 게다가 힐로샤인의 로테라라니.

기사들이라면 그곳의 소문을 전부 알고 있었다.

힐로샤인이 닥치는 대로 뛰어난 검잡이들을 모으고 있다지? 힐로샤인이 그 검을 어디로 겨누느냐를 두고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고 의심하면서도 로테라의 충심을 믿었다.


“……힐로샤인이 반역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자네는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야. 생각은 내가 할 테니 자네는 대답만 하면 돼.”

“지금으로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4천 명의 기사들은 제대로 된 전쟁터에 가 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힐로샤인의 기사들은 최전선에 있었던 자들이지요. 그 차이는 큽니다.”

캘리엇 백작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돌아올 대가가 크다고는 하나, 먹어서는 안 되는 걸 집어먹었다가는 후폭풍에 휩싸일 것이다.


“만약 힐로샤인을 이기고자 하신다면…….”

렉서스가 귀를 기울였다. 이번 전쟁에서 이기고, 다시 한번 로테라를 꺾는 거다.

사실 좀 더 쉬운 방법도 있었다. 지금 황성에 구금되어 있는 레니샤의 목만 꺾어도 저들의 사기는 사그라들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지만’이 렉서스의 발목을 잡았다.

이번에도……. 렉서스는 레니샤를 죽이지 못했다.

***

황제의 궁에 캘리엇 백작이 들었다. 렉서스는 카나리아를 황후로 복권시켰으며, 그의 아이에게 이름을 내리고 황자의 자리에 앉혔다. 신전은 레니샤의 뒤통수를 때리고 아이의 혈통에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다.

레니샤가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황제가 보통 사람은 아니지.”

애초에 쉬울 거였으면 이렇게 고전할 필요도 없었다. 레니샤와 함께 시종장의 보고를 듣고 있던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미친놈으로 보였는데.”

“그런 놈이면 지금까지 집권하지도 못해. 수고했네, 시종장.”

시종장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돈 주머니를 받아 든 그가 레니샤의 침실에서 나갔다.

레니샤가 몸을 일으켰다. 렉서스는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렉서스의 독함은 여기서 발휘되었다. 몇 년 동안 중독되어 있었던 약물에서 손을 완전히 뗀 것이다.


‘미친 새끼.’

예로부터 그런 말이 있지. 담배나 약을 끊는 사람이랑은 상종해서는 안 된다고. 그만큼 독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 이젠 어떻게 해?”

레니샤가 입술을 살짝 물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범위 안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레니샤도 다음 수를 놓아야겠지.


“황실의 주치의를 들게 하게.”

렉서스가 부정한다면 다시 한번 의혹을 불러일으켜야 하지 않겠나.

황제의 주치의 자리에는 아무나 앉히지 않는다. 실력도 뛰어나야 하지만 눈치도 빨라야 하고, 입도 무거워야 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정국이 바뀌기 때문이었다.


“네, 레니샤 님.”

투리엘이 환하게 웃었다.


“헤일린에게 전쟁 준비를 서두르라고 전하고 공격에 대비하도록 하게. 그리고…….”

레니샤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덴버스 후작에게 말을 전하게. 로테라 타운하우스 지하에 사람들을 모으라고.”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후궁을 들인다고 하더군, 투리엘. 놈이 무슨 생각을 할 것 같나.”

“……레니샤 님의 사람들을 붙잡아 두려 하겠군요.”

“바로 그거야.”

다음 대 황제를 제 딸이 낳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그들에게 심어 주는 것이다. 렉서스는 역시 멍청한 놈이 아니었다. 가장 확실한 수를 패로 들고 사람들을 유혹하는 나비였다.


“그러니 주치의의 일을 서둘러야겠지.”

“이해했습니다.”

“로테라의 지하에 사람들을 모으고 주치의를 데리고 가게. 그들에게 렉서스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몸임을 증명하게 해. 우리의 손을 놓지 못하도록.”

“네, 레니샤 님.”

레니샤는 이 황성에 앉아서 천 미터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루나.”

“응?”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그게 뭔데?”

레니샤의 눈빛이 깊어졌다. 레니샤는 렉서스의 주변부터 좀먹어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 혼자 고립될 수 있도록. 그 첫 번째가 클라우드였으니 그다음은.


“카나리아를 죽이고 그 아이를 데려와.”

레니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것 또한 정해진 결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꿈꾸었던 상황.

렉서스에게는 카나리아와 그 아이가 필요하다. 그래야 후궁 자리를 빌미로 귀족들을 설득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레니샤는 그 모든 걸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레니샤가 루나를 응시했다.

귀염성 있는 외모에 드레스를 입혀 놓은 지 꽤 되었다 보니 제법 태가 났다. 말괄량이 귀족 영애 같달까. 저 정도면 아무도 루나에게 경계심을 갖지 못하리라.


“……들키면 어떻게 되는데?”

“죽겠지. 그런데 하지 않아도 죽어. 내가 싸움에서 지면 렉서스는 힐로샤인을 잿더미로 만들 거거든.”

루나가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레니샤의 말에 동의한다. 렉서스의 눈에 담겨 있었던 그 광기는 진실이었다. 루나가 침을 삼켰다.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거잖아.”

레니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좀 더 이기기 쉬워지겠지.”

루나가 퉁명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죽으면 꼭 카시우스 옆에 묻어 줘.”

“안 죽겠다는 말로 들리네. 들개 밥이 되기는 싫을 테니까.”

레니샤와 루나가 서로 눈을 마주치고 생긋 웃었다.

레니샤는 다음 수를 두었다. 자, 이다음은 또 어떻게 될까?

***

카시우스가 어둠 속에 잠긴 채로 창밖을 응시했다.


“……감시하는 이들이 늘어났어.”

린데이가 카시우스에게 물 잔을 건넸다.


“네.”

“레니샤가 뭔가를 하려는 거로군.”

카시우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얼마 전에 레니샤는 카시우스에게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로테라 저택을 지켜 달라.’고 말했다. 그건 레니샤가 언제까지고 굳건하다는 상징적인 의미라고 말이다.

전쟁에서도 상징적인 깃발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쟁을 이끄는 지휘관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의 사기를 좌우할 수도 있었다.

카시우스는 그 깃발을 쥔 기사가 되는 거다.

제도의 타운하우스는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레니샤가 사라지면 렉서스는 레니샤를 잡기 위해서 이 저택을 가장 먼저 칠 것이다.


“제도에 기거하고 있는 로테라의 기사들을 불러 모아야겠네. 린데이,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그러기 위해서 이곳에 남은 것이니 사명을 다하겠습니다.”

“이 제도에도 로테라를 그리워하는 자들이 남아 있을까?”

린데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로테라 공작이 죽고 멸문하면서, 그곳에서 일하던 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몇몇은 힐로샤인까지 들어가 로테라의 밑에 몸을 묻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을 것이다.


“많을 겁니다. 공작께서는 사용인들에게도 후하신 분이셨어요. 로테라에서 일하던 자들은 그것을 자부심으로 삼았습니다. 로테라의 명예도 자신들과 함께한다고 믿었지요.”

“그들을 믿을 수 있나?”

“믿을 수 있는 자들을 골라낼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을 모아야겠네. 검을 들게 하려는 게 아니야. 전쟁에는 정보도 중요하거든.”

카시우스가 눈을 번뜩였다.


“각 지점에서 눈이 되어 줄 자들이 필요하네. 황제의 기사들이 움직이면 먼저 신호를 보내 줘야 해.”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도 전역에 눈을 만들게. 그리고…….”

모자란 병력은 아무래도…….

카시우스가 목을 꺾었다. 슈르륵. 그의 움직임을 따라서 붉은 뱀의 비늘이 돋았다가 가라앉았다.


“황성에 파다하게 소문을 퍼뜨리게. 붉은 뱀의 위험성에 대해서 말이야. 붉은 뱀이 사람을 몇이나 죽였고, 얼마나 잔혹한지에 대해서. 자극적일수록 좋네. 우리가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만들어.”

은연중의 두려움은 사람들에게 망설임을 심어 준다.

그 망설임은 카시우스의 기회가 될 것이다.


“네, 공작님!”

린데이가 감격에 젖은 얼굴을 했다.

카시우스 또한 많이 성장했다. 그는 일전에 파란색 정장을 입고 쩔쩔매던 사람이 아니었다. 카시우스는 레니샤의 옆에서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카시우스는 레니샤를 위한 방패이자 검이 되었다. 카시우스가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마지막으로 저택의 사용인들,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해야 할 것 같네. 유사시에 쓸 수 있는 행동 지침이 필요해. 새벽에나 훈련이 가능할 것 같은데, 저택의 사용인들이 나를 따라 줄까?”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린데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카시우스와 린데이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니샤의 의지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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