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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체크메이트 (100/135)


100화. 체크메이트
2023.03.14.



 
카나리아가 까맣게 죽은 얼굴로 요람을 힐끔 보았다.

바바라는 황제의 기사들에게 끌려갔다.

결국 그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렉서스는 레니샤와 같은 자비가 있는 이가 아니었다.

카나리아가 의혹을 벗지 못한다면 바바라는 죽는다.

하지만, 카나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오히려 카나리아는 바바라의 배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바바라는 참을성이 짧다.

전에도 바바라는 자신의 고통이 두려워 금세 진실을 털어놓았었다.

카나리아가 꺼먼 눈을 깜빡였다.


‘그때 죽였어야 했어.’

이 황성에서는 파리 한 마리의 목숨만큼이나 사람의 목숨도 쉽지 않던가.

카나리아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바바라가 카나리아의 부정에 대해서 렉서스에게 털어놓는다면?

카나리아의 몸이 두려움에 떨렸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오갔다.

렉서스가 검을 들고 쫓아와 그녀를 죽일 것 같았다.

당장 저 문이 열리면…… 카나리아가 침을 삼켰다.


“싫어…….”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랬다.

살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렉서스의 눈에 띄고, 그와 밤을 보내고 나서는 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었다.

탐내선 안 되는 것을 욕심냈다는 것은 안다.

카나리아의 눈커풀이 파르르 떨렸다.


“살고 싶어…….”

카나리아가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뱁새는 황새가 될 수 없는 건가?

카나리아의 숨이 느려졌다.

그녀는 꿈에서 좀 더 젊은 시절의 렉서스를 보았다.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눈에 띄었던 바로 그날이.

***



“제시카! 얼른 가서 물 떠 와. 황후 폐하께서 곧 주무실 것 같단 말이야.”

투정 섞인 재촉에 제시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종일 황후궁을 단장한 건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꽤 특별한 날이었다.

레니샤와 렉서스의 결혼기념일 아니던가.

오늘은 어쩌면 레니샤와 렉서스 사이가 회복될지도 모른다.

황후궁의 하녀들은 그런 꿈에 부풀어 있었다.

레니샤가 적합한 후계자를 낳고 부부 사이가 회복되면……!

바람 앞 촛불 같은 지금 이 상황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황후궁의 하녀들은 언제 불지 모르는 피바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녀들이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니는 건 그런 이유였다.

제시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제시카는 그런 거에 별 관심이 없었다. 시키니 하는 것이지…….


‘내가 사는 게 힘든데, 남 일이 무슨 상관이람.’

길거리에서 아비에게 얻어맞고 있다가 로테라 공작에게 거둬졌다.

주정뱅이 아비는 금화 몇 개에 제시카를 팔아넘겼다.

로테라 공작은 연민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제시카에게 ‘우리 딸과 나이가 비슷하구나. 꿈을 꿔야 할 나이에 이런 일을 당하고 있다니.’라고 말했다.

제시카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 따스한 손길을 잊지 못하리라.

그리고 제시카는 레니샤를 돌보는 하녀가 되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레니샤의 발을 닦는 일을 떠맡게 되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맞지 않게 되었음에 안도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따뜻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에 감사했다.

이제는…….


“부러워. 나랑 저 여자랑 다른 게 뭐가 있다고.”

제시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떤 아비 밑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운명이 갈리다니.

제시카가 신경질적으로 걸었다. 물을 떠오라고 했으니 해야지.

그러다가도 이내 기분이 나아진 제시카가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제시카가 레니샤보다 나은 것 중의 하나다.

제시카는 노래를 아주 잘하는 편이었다. 동료들도 그것만큼은 인정했다.

노래를 부르니 기분이 더 좋아졌다.

제시카의 맑은 고음이 복도에 느리게 퍼졌다.

동료들이 눈을 샐쭉하게 흘겼지만 그런 건 무시했다.

제시카가 제 기분에 빠져 걷고 있을 때였다.


“너는 무얼 하는 하녀냐?”

뭔가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시카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복도에 홀로 기대 있는 렉서스가 보였다.


“흡!!! 폐, 폐하…… 언제, 언제…….”

제시카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렉서스의 악명에 대해서는 말단 하녀도 전부 안다.

렉서스는 악몽 그 자체였다.


“아까부터 있었지. 나의 친애하는 신하들이 등을 떠밀더군. 오늘이 무슨 날인지 귀에 딱지가 박히도록 들었지.”

렉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루 종일 두통이 끊이질 않았어. 다 죽여버리고 싶었지.”

음습하게 뇌까린 렉서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방금 아주 기분이 괜찮았거든.”

렉서스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제시카의 턱을 치켜올린 렉서스가 말했다.


“네 노랫소리가 나쁘지 않더라고. 계속 노래해보겠느냐?”

제시카의 눈이 떨렸다.

기저에 잠들어 있었던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 기회야, 제시카! 이 남자는 황제잖아. 네가 바라는 건 뭐든 줄 수 있다고!’

제시카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러면 제게 무엇을 주실 건가요?”

“뭣?”

렉서스가 눈을 홉떴다.

이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렉서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가까이에서 본 렉서스는 대단한 미남자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망나니처럼 검을 휘두를 것 같지도 않았다.

그가 지나간 길을 따라 피가 흐른다는 말도 어쩌면 과장된 말일지도 모른다.

제시카가 침을 삼켰다.


“저, 저를 거둬주세요…… 평생 노래를 불러드리겠습니다. 폐하의 곁에서 살게 해주세요.”

제시카가 대단한 용기를 끌어 올렸다.


“저는 할 수 있는 게 많습니다. 폐하께서 바라시는 건 무엇이든…….”

“네가 무슨 일을 하는 하녀라고 했지?”

제시카의 말을 잘라낸 렉서스가 물었다.

그 보랏빛 눈동자에 담긴 광기를 제시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 저는 황후의 발을 닦는 하녀입니다.”

“아하.”

렉서스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무엇보다 그게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네?”

렉서스가 제시카의 손목을 휘어 감아 일으켰다.

렉서스가 빈방을 찾아 제시카를 밀어 넣었다.

침대에 엎어진 제시카가 앞으로 기었다.


“폐, 폐하!”

렉서스가 몸을 일으키려는 제시카를 억눌렀다.


“네가 바란 일 아니냐?”

“하, 하지만 오늘은…….”

“그래, 오늘이라서 나는 네가 더 좋다는 말을 알아듣겠느냐?”

제시카가 고개를 돌려 렉서스를 보았다.

그제야 제시카는 렉서스가 바라는 그녀의 역할을 알아차렸다.

렉서스는 제시카를 이용해서 레니샤를 욕보이려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종일 들볶인 건 렉서스뿐만이 아니었다.

레니샤 또한 황제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시녀들에게 하루 종일 들들 볶여야 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던 레니샤를 기억한다.

그녀를 이루고 있는 값비싼 것들도 기억한다.

로테라 공작은 레니샤에게 최고의 것만 쥐여주었다.

남편 또한 그랬다.

제시카에게 가장 좋은 혼처는 마구간지기의 아들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레니샤는 황제를 움켜쥐고도 행복한 줄 몰랐다.


‘나는 달라!’

제시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 저도 좋습니다. 제게 새 이름을 주셔요.”

“새 이름?”

“네. 발 닦는 하녀의 이름은 저도 싫습니다. 황제 폐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서 새 이름도 주세요.”

“바라는 게 많군. 발칙하긴.”

렉서스가 제시카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래도 이 종알거리는 여자가 귀찮지 않은 것은 짜증 나던 두통이 물러간 덕분이리라.

렉서스는 기분대로 상을 내렸다.


“카나리아, 너는 이제부터 카나리아라고 불리게 될 게다. 나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는 새.”

황제의 손에 앞치마가 뜯겨 나갔다.

제시카가 환희에 찬 미소를 지었다.

카나리아!

그게 바로 제시카의 새 이름이었다.

***

모든 건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소란에 억지로 꿈에서 깨어난 카나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방 안으로 하녀들이 몰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헤치고 시녀장이 맨 앞에 섰다.


“죄인은 와서 황명을 받들라!”

죄인.

카나리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바바라가 자백했나?”

시녀장이 카나리아를 무감한 눈으로 응시했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황성에 불길을 몰고 온 여자였다.

이번 일로 또 몇 명의 목이 떨어지게 될지.

이래서 자격이 없는 이가 과한 것을 가져선 안 되는 건데!


“바바라는 아이가 친부가 따로 있음을 자백하였다.”

“……바바라는 어떻게 됐지?”

“금일, 사형에 처해질 예정이다.”

딱딱한 선언에 카나리아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카나리아가 눈을 내리감았다. 눈물이 흘렀다.

이제야 후회가 든다.

그날 렉서스의 손을 잡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래봐야 새장 속 새밖에 못 되는 신세였는데 무엇을 그리 욕심냈나.

평범한 하녀로 살았다면 카나리아에게 이런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카나리아가 고개를 떨궜다.


“죄인은 지금 부로 지하 감옥으로 간다. 그리고 죄인의 아들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신전에서 지내게 될 예정이다!”

“진실이 밝혀지다니……?”

“이미 자백이 있었으나 황족의 핏줄일 수도 있는 일! 신전의 판단에 따라 아이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카나리아가 피식 웃었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너무 아등바등 살았다.

지금 카나리아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의 곁으로 돌아가는 길 또한 외로우리라.


“……아이만큼은 살려주시게.”

시녀장이 차갑게 턱짓했다.

측근 하녀가 아이를 안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앙알거리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카나리아의 가슴에 맺혔다.

이 모든 건 그녀의 죄였다.

***

카나리아가 지하 감옥에 갇혔다.

레니샤가 체스판을 응시했다.

그녀의 손을 구르던 체스말 하나가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레니샤 님.”

헤일린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투리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니샤의 뺨을 타고 눈물이 떨어진 까닭이었다.


“……슬프신 겁니까?”

“글쎄. 무엇이 슬픈 건지 모르겠군.”

레니샤가 담담히 눈물을 닦아냈다.

카나리아는 그곳에서 비참한 마지막을 맞이할 것이다.

렉서스가 그를 기만한 카나리아를 용서할 리 없었다.

배신감이 더 컸겠지.

레니샤와 달리 카나리아는 그의 의지로 곁에 두고, 황후로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여태까지 카나리아를 죽이지 않고 끼고 돌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겠지.

렉서스는 그 또한 잃게 된 것이다.


“카나리아가 가엽다고 생각하십니까?”

투리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카나리아를 처음 만났던 날을 레니샤도 기억하고 있었다.

멍투성이의 어린 소녀를.

구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던 소녀의 눈은 레니샤를 탐욕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속을 감추지 못하던 아이였다.

하녀로 태어나 그런 눈빛을 가졌으니 무슨 일이든 저지를 것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으니 그 욕심은 채워졌으려나.

레니샤가 설핏 웃었다.


“그 애가 아니라 그 애의 인생이 안쓰럽네.”

레니샤가 바닥에 떨어진 말을 주워 제자리에 놓았다.


“체크메이트.”

레니샤의 분홍빛 입술을 움직였다.


“퀸을 잡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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