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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돌아오지 않을 결심 (99/135)


99화. 돌아오지 않을 결심
2023.03.10.



 


“……나를 어떻게 내보낼 생각인 거죠? 레니샤가 말한 대로 한다고 해도 나는 황제에게 붙잡힌 몸이에요. 무슨 수로 이곳을 나갈 수 있겠어요. 황제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헤일린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결국 헤일린은 이곳에서 암초에 부딪힌 배처럼 침몰할 수밖에 없으리라.

브릭스턴의 곁을 지키지도, 이사벨라를 안아주지도 못 하리라.

헤일린이 달아나면 대신해서 고초를 겪을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눈앞의 레니샤를 포함해서.

레니샤는 그들이 가는 길의 지표였다.

레니샤가 있어야 그들이 하는 일에도 가치가 생긴다.

헤일린은 브릭스턴이 바라던 것들을 망칠 수 없었다.

브릭스턴이 떠날지 모르는데, 그가 바라던 것이라도 이루어줄 수 있다면…….

최소한 헤일린은 그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황제는 레니샤를 다치게 할 수도 있어요.”

헤일린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나갈 수 없어요.”

레니샤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에요.”

레니샤가 이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여전히 레니샤의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그것은 풍성한 치마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니 레니샤의 두려움과 절망은 들키지 않았다.

그러니 계속 들키지 않으면 되는 거다.

레니샤가 주먹에 힘을 주었다. 안간힘을 다해서 버티고 섰다.


“렉서스에게 필요한 건 나를 붙들어둘 인질이에요. 애석하게도 렉서스는 내게 집착하고 있으니.”

“…….”

헤일린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렉서스 또한 힐로샤인의 변고에 대해서 전해 들었을 거예요. 내가 움직일 걸 감안하고 있겠지요. 내가 인질을 바꿔치기한다고 해도 내게 위협을 가하진 않을 겁니다.”

“……바꿔치기할 인질이라는 건…….”

“그 부분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말아요. 언제나 답은 찾는 방법이 있으니.”

레니샤가 느리게 미소 지었다.

헤일린이 불안한 얼굴로 레니샤를 응시했다.


“헤일린을 대신해서 투리엘이 들어올 거예요.”

헤일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담 투리엘과는 이야기가 된 부분인가요?”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헤일린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헤일린을 떠나보낸 레니샤가 스산한 표정을 지었다.


‘헨리…….’

그 종자가 언젠가는 그들을 배신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황성에서 지낼 적에도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버리지 못했었다.


“빌어먹을.”

레니샤가 짓씹었다.

레니샤가 알고 있는 온갖 욕설이 머릿속을 배회했다.

헨리는 이번에도 그다운 짓을 저질렀다.

가장 어리고 약한 이를 공격한 것이다.

처음부터 강한 이들은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레니샤가 소파에 주저앉았다.

감추고 있었던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들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브릭스턴.”

사실은 헤일린의 뒤를 따라가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브릭스턴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형제의 얼굴을 눈에 담고 싶었다.

레니샤의 어깨가 들썩였다. 소리 없는 울음이 입 안을 맴돌았다.


“제발…… 죽지 마.”

레니샤의 음성이 축축이 젖었다.


“부탁이야…….”

 

***



“아가씨는 괜찮으신가? 식사는 하셨나?”

테리언이 희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입을 다물고 서 있던 헬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헬레나. 왜 자네가 죽어가는 얼굴인지 모르겠군. 아가씨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건가.”

그것도 사실이지만, 헬레나를 들쑤셔대는 감정은 다른 것이었다.


“……이 일의 배후가 정말로 헨리 집사장입니까?”

그녀가 까끌한 목소리로 물었다.

곁에 서 있던 제인이 헬레나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래.”

“하. 정말 그랬군요.”

헬레나가 고개를 숙였다.

이전보다 확연하게 마른 헬레나의 목덜미가 드러났다.

제인이 헬레나의 손을 붙들었다.

요새 헬레나는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테리언 경, 만약…… 만약에 헨리 집사장이 두 눈을 잃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요.”

헬레나를 대신해서 제인이 물었다. 제인은 불안한 낯빛이었다.


“헨리 집사장이 힐로샤인에 앙심을 품은 이유가 혹…….”

“알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확실한 건 헨리 집사장은 지금이 아니라 언제든 우리를 배신했을 거라는 거야. 본질이 그런 사람이니 어떡하겠나.”

테리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헬레나의 탓이 아니야.”

헬레나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들 저렇게 듣기 좋은 말로 헬레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브릭스턴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후로부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모든 게 헬레나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 같았다.

헬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황성으로 가게 해주세요.”

“헬레나!”

“레니샤 님 곁으로 보내주세요, 테리언 경.”

헬레나가 침을 삼켰다.

브릭스턴이 지니고 있었던 책임감이 헬레나에게로 전염되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저는 레니샤 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제대로 다하지 못했습니다.”

헬레나가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제인이 헬레나를 붙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반드시 이사벨라 아가씨를 지켜달라고 하셨었지요. 그분을 부탁하신다고. 그런데 저는 여태 한 번도 그분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제도에 가면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가?”

헬레나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보다는 쓰임을 다할 곳이 있지 않을까요?”

“헬레나!”

제인이 새된 목소리로 헬레나를 불렀다.

지금 헬레나는 죽으러 가려는 것이다.

제가 바라는 대로 속 편하게 죽기 위해서……! 제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러지 마. 보내지 마세요, 테리언 경. 헬레나는 저 없으면 안 돼요…….”

“……가고 싶다면 가야지.”

하지만, 테리언은 제인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제도로 보내주마, 헬레나. 네가 말한 대로 바라는 쓰임을 찾아.”

“네, 감사합니다.”

헬레나가 덤덤히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죽을 것 같던 죄책감이 덜어지는 듯했다.

제인이 울면서 매달렸지만 별 소용 없었다.

또 다른 수레바퀴가 소리를 내며 굴렀다.

***



“아가씨.”

헬레나의 부름에도 이사벨라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채로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저렇게 굳어버린 듯했다.

오르고 내리는 작은 등만이 이사벨라의 생존을 알렸다.


“저는 제도로 가요.”

헬레나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곳에 가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 해요. 이 쓸모없는 몸뚱어리도 어딘가에는 쓰일 수 있지 않겠어요?”

이사벨라가 눈을 깜빡였다.

이제는 눈물이 말라붙어서 나오질 않는다.

이 방 밖을 나가면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브릭스턴과 텅 비어 버린 저택.

금세 돌아온다던 레니샤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고 헤일린은…….


‘끔찍해.’

전쟁터보다 이곳이 더 끔찍했다.

창밖에서는 활기찬 시가지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사벨라는 끌어안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데 세상은 잘만 움직였다.

이사벨라가 대단한 무언가를 바랐던가.

그저 사랑하는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아가씨가 잘못하신 게 아니에요.”

이사벨라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이사벨라를 살리기 위해서 헤일린은 납치당했고,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 브릭스턴은 죽어가고 있었다.

모든 게 그녀의 잘못처럼 느껴졌다.

먹을 수도 없고,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브릭스턴마저 떠날까 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제가 잘못한 거예요.”

헬레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가씨, 제가 다 해결할게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어떻게?”

이사벨라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답지 않게 퀭한 표정으로 이사벨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헬레나가 아버지를 살려줄 수 있어? 아니면, 어머니를…….”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뿌리 뽑을 거예요.”

“……근본적인 문제?”

“모든 건 황제 때문이에요.”

헬레나의 눈동자에는 증오가 가득했다.

헬레나는 이 모든 것의 원인을 황제에게 돌리기로 했다.

레니샤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것도, 헨리가 자유로운 망아지처럼 밖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도, 이사벨라가 이렇게 된 것도.

그 밖의 이 모든 일들은 렉서스로부터 비롯된 거였다.


“황제……? 어떻게 할 건데?”

이사벨라가 불안정하게 물었다.

바닥을 기어 온 이사벨라가 헬레나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아이의 악력에 끌려 바닥에 주저앉은 헬레나가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어떻게 할 건지 내게 말해줘.”

이사벨라의 눈동자만큼은 찬란한 생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게 할게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모님도 아직 하지 못하신 일이야.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데? 그 대단한 고모님도 여태 손을 놓고 보고만 있잖아.”

“레니샤 님은 그다음을 생각하셔야 하는 분이시니까요. 그분께서는 제국의 미래가 되실 분이세요. 하지만, 저 같은 건 없어져도 괜찮아요.”

“……그건 아니야. 나는 그런 걸 바라진 않아.”

“착하신 분.”

헬레나가 이사벨라를 끌어안았다.

마른 장작 같은 아이의 몸에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아이를 이렇게 만든 게 그녀라는 생각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헬레나가 이사벨라의 이마에 키스했다.


“세 뱀 신의 수호가 아가씨와 함께하시길.”

헬레나가 몸을 일으켰다.


“건강히 잘 지내셔야 해요, 아가씨.”

헬레나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사벨라는 도저히 헬레나를 붙잡지 못했다.

그 마음을 이사벨라도 알 것 같았다.

무력하게 사랑하는 이들이 다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는 건 이사벨라도 마찬가지였다.

전쟁터에서는 어린아이도 검을 들고 싸운다.

이사벨라 또한 그랬다.

그녀는 분명 기사들의 보호를 받기는 했지만, 위급한 상황이 찾아오면 스스로 탈출해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사벨라는 너무나 무력했다.


“싫어…….”

이사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헬레나를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헬레나가 가려는 길에 이사벨라는 오히려 방해물이 될 뿐이다.

이사벨라가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 아이에게 구원이 찾아왔다.


“아가씨, 아가씨!”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이사벨라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 들려왔다.


“헤일린 님이 돌아오셨어요! 지금 아가씨를 찾고 계세요.”

“어머니가……?”

“네에, 네. 어머니가 돌아오셨어요.”

제인이었다.

이사벨라의 방문이 열렸다.

제인이 바닥에 엎어진 이사벨라를 보고는 눈물을 터뜨렸다.

정말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제인이 이사벨라를 부축해 일으켰다.


“헬레나가 떠났어요.”

“……알아.”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알아…….”

이사벨라를 끌어안은 채로 제인은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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