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헤일린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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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헤일린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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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헤일린의 무게
2023.03.07.
힐로샤인에는 공작 대리를 맡을 만한 이가 없었다.
브릭스턴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이사벨라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테리언은 이런 일을 맡기에는 아직 경험이 일천했다.
결국 메테오가 아주 잠시 동안 공작 대리를 맡게 되었다.
겉으로는 테리언을 내세우고 내실은 메테오가 보게 된 것이다.
메테오가 지하 감옥에 모습을 드러냈다.
혹독한 고문을 받은 남자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다.
브릭스턴을 해하고 도망치려던 자를 힐로샤인의 기사들이 붙들어 온 것이다.
메테오는 이자를 통해서 얻으려는 게 있었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상황을 이롭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지 않겠나.
사지가 결박된 남자의 앞에 메테오가 쭈그리고 앉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할 거야.”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차, 차라리 죽이시오…….”
끔찍한 고통이 남자를 갉아먹고 있었다.
힐로샤인은, 그리고 메테오는 브릭스턴을 끌어내린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자네는 힐로샤인의 기사를 죽인 걸로도 모자라 브릭스턴 로테라를 죽이려 한 혐의를 받고 있네. 브릭스턴 로테라는 언제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지.”
“자, 잘못했습니다…….”
남자가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메테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말이나 듣자고 이러고 있는 게 아니다.
메테오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우리가 바라는 게 있네. 시키는 대로 잘만 해주면 바라는 대로 해주지. 약속하겠네.”
메테오가 부드럽게 남자를 얼렀다.
남자가 두려움에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메테오는 상황 판단이 빠른 편이었다.
그리고 무엇이 레니샤에게 도움이 될지 빠르게 계산해냈다.
이 남자는 헨리에 의해서 고용된 자였다.
그리고 헨리는 황제의 사람이었다.
이 모든 연결고리가 명확히 드러났으니 메테오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자네는 지금부터 증인이 되는 걸세.”
“…….”
고통으로 혼미한 남자가 고개를 거칠게 끄덕였다.
메테오가 느리게 미소 지었다.
충신을 배척하는 군주는 환영받지 못한다.
게다가 만민의 영웅, 카시우스를 배척하는 군주는 더더욱 환영받지 못한다.
민심이 등을 돌리면 황제도 힘을 잃기 마련이었다.
메테오가 입술을 벌렸다.
***
“그렇게 된 일입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카시우스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카시우스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헤일린 님을 빼돌리고 이 이야기를 레니샤 님께 전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말을 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레니샤는 새로운 판을 준비할 것이다.
레니샤가 지금껏 숨을 죽인 채로 음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민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들을 레니샤의 편으로 만들 명분이 필요해서.
이거라면 레니샤는 명분을 얻고 로테라의 죽음을 앞세워 민심을 선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카시우스 공작만 믿겠습니다. 저는 헤일린 님을 모셔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아요. 테리언이 혼자 일을 도맡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카시우스가 한숨을 흘렸다.
테리언의 한계는 카시우스도 잘 알고 있었다.
공작가의 큰 살림을 돌보기엔 테리언은 아직 부족하다.
지금 힐로샤인은 전쟁터나 다름없을 터였다.
카시우스가 사람을 불러들였다.
***
스스슥-.
이제는 익숙해진 소리에 레니샤가 고개를 들었다.
창가에 나타난 붉은 뱀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카시우스다.
지금 이 상황이 낯선 건…….
‘아직 밝은 낮이야.’
저렇게 시리도록 붉은색은 어디서든 눈에 띄길 마련이었다.
카시우스도 그것을 알아 밤에만 모습을 드러냈었던 거였고.
카시우스가 이렇게 위험을 무릅쓴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레니샤가 루나에게 손짓했다.
“문을 닫고 밖에서 망을 보도록 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오가서는 안 된다. 알았니?”
“……응.”
루나가 불만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스를 질질 끌면서 밖으로 나가는 루나를 확인하고는 레니샤가 발코니를 열었다.
귀여운 붉은 뱀이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왔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발밑을 맴돌았다.
그간 카시우스는 레니샤 앞에서 한 번도 인간화를 한 적이 없었다.
카시우스는 그거야말로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알몸이라니!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부끄러움으로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카시우스가 딱 한 바퀴만 더 돌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카시우스가 얼른 등을 돌렸다.
레니샤를 등지고 선 카시우스가 욕실로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레니샤는 숨을 죽인 채로 카시우스에게 시간을 내주었다.
새빨간 목덜미를 본 탓이었다.
“다 입었어요?”
가운을 걸친 카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얼굴색이 돌아온 채였다.
레니샤가 작게 웃었다.
“이래서 안 보여주려고 했구나?”
“그건……!”
레니샤에게 말려들어 갈 뻔한 카시우스가 고개를 얼른 저었다.
지금은 이런 논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곱씹을 때가 아니었고.
“레니샤, 전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카시우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레니샤가 한숨을 삼키곤 소파에 앉았다.
이 시간에 카시우스가 나타났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다.
심장이 저렸다.
레니샤가 손바닥으로 입술을 쓸었다.
레니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죠?”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건너편에 앉았다.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카시우스가 느린 한숨을 흘렸다.
“……브릭스턴의 목숨이 위험합니다.”
레니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음습한 불안이 레니샤의 발목을 휘어감았다.
“도망친 헨리가 용병을 고용했고 힐로샤인을 공격했습니다. 이사벨라를 노린 습격이었지요. 그리고 브릭스턴은 이사벨라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카시우스를 발견한 순간부터 그녀를 향해 입을 벌리던 새까만 두려움이었다.
레니샤가 잠시 눈을 감은 채로 두려움을 이겨냈다.
“……아직 살아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메테오 왕자의 말에 따르면 위험하니…… 이사벨라를 위해서라도 헤일린 님의 귀환이 시급하다 합니다.”
브릭스턴이 죽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거였다.
카시우스가 망설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레니샤의 옆으로 옮겨 앉은 카시우스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브릭스턴을 잃을 위기에 쳐한 건 이사벨라와 헤일린뿐만이 아니었다.
레니샤도 마찬가지다.
레니샤가 가족들에게 가지고 있는 애착을 카시우스도 알고 있었다.
그 저변에 깔린 죄책감도.
“브릭스턴은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 누구도.”
레니샤가 감정을 추스렸다.
“……브릭스턴을 살려야겠어요.”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홀로 버티는 대신에 카시우스의 온기로부터 위안을 얻기를 선택한 것이다.
레니샤는 카시우스와 발맞춰 걷는 법을 점차 익혀가고 있었다.
“브릭스턴의 피에는 검은 뱀의 영혼이 깃들어 있어요. 그 숨이 끊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도 그곳이 힐로샤인이기 때문일 거예요.”
“……브릭스턴을 식물인간 상태로 유도해서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같은 맥락의 이야기예요.”
레니샤가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브릭스턴이 바랄 일인지는 모르겠다.
이건 목숨을 건 도박임과 동시에 아주 긴 기다림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깎여나갈 감정들은 짐작도 가질 않는다.
“검은 뱀의 영혼이 브릭스턴을 보호해줄 거예요. 언젠가…… 브릭스턴이 깨어나게 될지도 모르죠. 10년이 걸릴지, 1년이 걸릴지는 누구도 몰라요. 그래도 시도는 해보고 싶어요.”
“그렇게 해요.”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 어떤 말도 지금의 레니샤를 위로하지 못하리라.
무너지는 대신에 일어서는 그녀를 카시우스는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헤일린과 이야기해볼게요.”
카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우스의 품에서 고개를 드는 레니샤의 얼굴은 매끈했다.
방금 전, 절망을 짊어지고 침잠했던 이답지 않게.
***
헤일린의 눈동자가 테이블을 훑었다.
심장이 뛰었다. 저도 모르게 체온이 오르는 것 같았다.
“브릭스턴이…….”
“헤일린.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당신에게는 시간이 없어요. 이사벨라는 결정을 내릴 만한 나이가 안 돼요. 그리고 만약, 우리가 늦어 이사벨라가 홀로 남겨진다면 그 애는…….”
헤일린이 침을 삼켰다.
심장 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다. 머리는 멍멍하고 어지러웠다.
브릭스턴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죽음은 항상 곁에서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헤일린이 겪었던 고통이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브릭스턴을…….”
“그이가 바랄까요?”
헤일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새까맣게 바래버린 눈동자가 레니샤를 향했다.
그 안에 고인 절망이 레니샤도 끌어당기는 듯했다.
“브릭스턴은 자긍심이 높은 사람이에요, 레니샤.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죠. 그런 브릭스턴을 무력하게, 그런 상태로…… 그건 내 이기심이 아닐까요?”
“브릭스턴은 헤일린과 이사벨라를 두고 떠나는 걸 더 두려워할 거예요.”
레니샤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헤일린에게는 버팀목이 필요해 보였다.
레니샤도 다리가 떨리고 힘이 들어간 손이 아플 지경이었다.
“명예롭지 못하더라도 브릭스턴은 우리 곁에 머물기 바랄 거예요.”
혼란스럽다.
이게 진실인지, 헤일린의 말대로 이기심인지도 판단이 서질 않는다.
하지만, 레니샤는 브릭스턴의 다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모두를 지키겠어. 내 목숨을 다해, 평생.’
브릭스턴이 우릴 떠날 리 없다. 그런 선택을 할 리 없었다.
“헤일린, 마음 단단히 먹어요. 메테오 왕자가 밖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 온 거죠. 그리고 힐로샤인으로 가게 되면 메테오 왕자와 함께 힐로샤인을 다스리게 될 거예요.”
“메테오 왕자……?”
“우리의 친구죠. 메테오의 도움을 받아 힐로샤인을 장악해야 해요. 지금 힐로샤인에는 별별 세력들이 다 몰려들고 있어요. 브릭스턴과 내가 의도했던 대로죠.”
헤일린의 눈동자가 떨렸다.
“브릭스턴은 힐로샤인을 로테라의 근거지로 삼고 나아가 제2의 수도로 만들 야망을 품고 있었어요.”
“제2의 수도?”
“우리 히엔트리는 새로운 출발을 할 준비를 하고 있죠. 히엔트리는 로테라에게로 황좌가 옮겨갈 거예요. 사실 히엔트리의 수도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요.”
“그럼…….”
“게다가 중앙에서 벗어나 있죠. 너무 남쪽으로 치우쳐 있어요. 차라리 힐로샤인이 중앙에 가깝죠.”
레니샤가 들려주는 원대한 이야기를 헤일린도 이해했다.
지금 그들은 힐로샤인을 제국의 수도로 만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긴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우리 다음 세대가 이루어야 할 꿈일 수도 있죠. 그 기틀은 우리가 닦아야 해요. 헤일린, 당신이 거기에 보탬이 되는 거예요.”
헤일린에게는 브릭스턴의 부상만이 던져진 게 아니었다.
그것만큼이나 무거운 숙제가 헤일린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