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아빠가 많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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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아빠가 많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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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아빠가 많이 사랑해
2023.03.03.
일주일 전, 힐로샤인.
“하아아암…… 오늘따라 처지는 기분이로군.”
기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힐로샤인은 대부분 평화로웠다.
헤일린이 납치당한 이후로 수비 병력을 늘렸지만, 평화가 지속되면 망각이 오는 법이다.
그들은 과거의 일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지속됐으면 좋겠군.”
풀벌레 우는 소리가 경쾌하게 정원을 채웠다.
“다음 순찰조는 언제 들어온다고?”
“아, 저기에 오고 있군. 이제 잠을 잘 수 있겠어. 신입!”
기사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신입이라고?”
“응. 그냥저냥 검을 쓸 줄 아는 자라고 하던데. 요새 힐로샤인이 병력을 보충하고 있지 않나. 이 작자, 저 작자 다 몰려들고 있잖아. 그중에 검을 쓸 줄 아는 자들이 꽤 섞여 있었던 모양이야.”
“흠. 그거 위험한 거 아닌가? 검을 쓸 줄 안다는 건…….”
“그래서 중한 임무는 못 떠넘기고 이런 순찰이나 시키는 거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니까.”
“어느 정도는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거로군.”
기사들이 한담을 주고받는 사이 교대조가 도착했다.
신입이라고 불린 기사가 씩씩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어, 어. 이렇게 보니 반갑군그래. 잠은 좀 자고 나온 건가?”
“네!”
의욕으로 활활 불타는 남자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어설프기는 했지만 검을 잡아보기는 했는지 몸에 근육이 딱 잡혀 있었다.
“자네 짝꿍은? 혼자 순찰을 돌진 않을 거 아냐.”
“아, 화장실을 다녀오느라고 조금 늦는다고…….”
“그렇군. 배탈이라도 난 모양이야.”
“하하하하…….”
“그러면 수고하게.”
선배 기사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동료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청년이 긴장한 얼굴로 검을 움켜쥐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는 전에 일어난 사달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요새에서 사람이 납치당했다.
살벌한 살기가 맴돌던 그날을 어찌 잊을까.
다시는 그런 걸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대단한 영웅이 되고자 기사단에 지원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적당히 돈을 벌어서 괜찮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소박한 꿈이었다.
“아, 왜 이렇게 안 와.”
청년이 긴장감에 다리를 떨면서 중얼거렸다.
혼자 있으니 더 무서운 것 같다.
우거진 수풀 속에서, 혹은 담장을 웃돌게 자란 나무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청년의 상상력이 자꾸만 가지를 뻗어나갔다.
“맥주 좀 적당히 마시라니까.”
불만을 토해낸 청년이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억센 팔이 그의 목을 휘어 감았다.
“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청년의 목이 옆으로 꺾였다.
단시간에 절명한 청년을 바닥으로 밀어낸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후우.”
힐로샤인의 경비는 탄탄했다.
한 시간도 비는 시간이 없었다.
그러면 어쩔 수 있나. 틈을 만드는 수밖에.
그나마 어리숙해 보이는 이들을 골라서 잠입해 들어온 것이다.
“다른 놈은?”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또 다른 남자가 물었다.
“몰라. 안 보이는데. 얼른 움직이지. 교대 시간도 짧은 거 알잖아!”
신경질적으로 뇌까린 남자가 동료의 팔을 당겼다.
“이거 숨 끊어진 거 맞지?”
“어! 나를 못 믿나?”
남자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지.”
유들유들하게 말한 남자가 죽은 청년의 뺨을 툭툭 쳤다.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자리를 떠난 자리에는 축 늘어진, 작은 꿈을 가졌던 청년 기사만이 남았다.
꿈을 잃어버린 채로.
***
브릭스턴은 늦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눈이 뻑뻑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브릭스턴을 쿡쿡 찔러댔다.
브릭스턴이 한숨을 내쉬고는 서류를 뒤적였다.
힐로샤인은 정말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자체 생산으로 만들어진 무기들과 갑옷들은 판매하지 않고 창고에 쌓아가고 있었다.
대장간에서 무기만 만드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질 좋은 농기구들은 다른 영지로 팔아 수익을 올렸다.
기사들을 새로 고용하면서 기사단의 덩치가 불었고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이족들도 한몫했다.
이족들과 힐로샤인 사람들은 다행히 잘 녹아 들어가고 있었지만…….
브릭스턴이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족의 수장.
이 여자가 문제였다.
“살아남은 왕족이 있었다니…….”
어쩐지. 이족들이 와해되지 않고 한곳에 모여 살고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거였다.
고고한 표정으로 브릭스턴을 보던 중년의 여자는 꽤 인상적이었다.
“이걸 어떻게 하나.”
브릭스턴이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브릭스턴이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는 아이의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사벨라는 너무 빠르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요새는 검을 배우고 있다던데, 아이는 힘든 내색 한번 하질 않는다.
헤일린의 빈자리 때문일까.
브릭스턴이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브릭스턴이 거침없이 아이의 방문을 열려는 순간.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문이 열리질 않았다.
브릭스턴이 문을 거세게 밀었다.
“제기랄.”
그 안에서 절대로 들려서는 안 되는,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브릭스턴이 검을 빠르게 뽑았다.
검에 밀린 문이 부서지고 그 안의 정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빠아!!”
이사벨라가 바들바들 떨면서 검을 쥐고 있었다.
둥근 얼굴이 상처투성이다.
“이 쥐새끼 같은 게!”
“언제까지 시간 끌 거야!!”
괴한 하나가 브릭스턴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브릭스턴이 그것을 맞받아쳤다.
분명 이런 일에 특화된 자들이다.
브릭스턴의 근육이 곤두섰다.
긴장감과 불안감이 방 안에 가득 찼다.
“아가, 이사벨라! 조금만 버텨다오!!”
브릭스턴이 빠른 속도로 괴한을 몰아붙였다.
브릭스턴은 본디 쾌검으로 유명한 자였다.
전쟁터에서도 그만큼 검을 쓰는 속도가 빠른 자를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브릭스턴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검에는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
챙!
브릭스턴의 검과 맞부딪힌 괴한의 검이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제 검을 본 괴한이 이를 악물고 브릭스턴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하압!”
브릭스턴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촤악-! 피가 흩뿌려졌다.
브릭스턴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
“이사벨라!!!”
브릭스턴이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멈추는 게 좋을 텐데!”
남자가 씨근덕거리며 외쳤다.
그의 손에는 이사벨라가 들려 있었다.
아이의 손에서 떨어진 검이 바닥을 굴렀다.
눈이 퉁퉁 부은 아이가 발버둥을 쳤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악에 받친 이사벨라를 괴한이 단단히 붙들었다.
남자가 아이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는 것을 본 순간 브릭스턴이 제 검을 떨어뜨렸다.
저자가 바라는 거야 당연했다.
“좋아, 그렇게 말을 들어야지.”
“아빠아…… 그러지 마세요. 흐으…….”
이사벨라가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흘렸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애통함이 잔뜩 서려 있었다.
“누가 보낸 자냐.”
브릭스턴이 고요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중요할까.”
“중요해. 네가 이곳에서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힐로샤인은 끝까지 널 쫓을 거다. 그런데 네가 네 배후를 밝힌다면? 우리의 검은 그놈을 향하겠지.”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둘 중 하나라도 살아나가지 못한다면 말이 샐 걱정도 없을 텐데?”
“그렇다면 자비를 베푼다고 생각해. 왜 죽는지 이유는 알아야 하니까.”
브릭스턴이 아이의 눈을 응시했다.
이사벨라가 흐린 시야로 브릭스턴을 보았다.
그 순간.
이사벨라의 머릿속에 브릭스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사벨라, 누구나 방심하는 순간은 있단다. 네가 위험한 순간이 온다면…… 물론, 그러질 않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그 순간을 노려야 해.’
이사벨라가 눈을 깜빡였다.
그 생각이 맞다는 듯이 브릭스턴이 눈을 깜빡였다.
이사벨라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방비하게 서 있는 브릭스턴이 불안하다.
이사벨라의 작은 심장이 파닥파닥 가파른 박동을 시작했다.
“자비? 그래, 좋아. 헨리라는 작자를 아나? 눈이 안 보이는 것 같던데.”
브릭스턴이 이를 아득 물었다.
“아주 악에 받쳐서 왔더군. 이 꼬맹이를 죽이는 걸 조건으로 거액을 걸었어. 용병들이 목숨을 걸고 달려들 만한 액수였다고.”
결국, 불안했던 씨앗이 싹을 틔웠다. 헨리.
‘빌어먹을 종자.’
품을 수밖에 없었던 렉서스의 종자가 그들을 배신했다.
분명 이 소란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헬레나와 제인이 항상 아이의 근처에 머물고 있으니 금세 사람들을 몰고 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그 돈을 내가 주는 건 어때. 아이를 놓아주고 조용히 돌아가는 조건으로 말이야. 아니, 제시받은 금액의 2배를 주지.”
“이 업계에도 신뢰라는 게 있어. 그런 짓을 했다가는 추격당하게 된다고?”
“3배.”
남자의 눈이 흔들렸다.
그 돈이면 해외로 도망쳐서 평생 놀고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를 하나 사서 결혼을 할 수도 있을 거고…….
“3배……?”
“그래. 지금이라도 지불할 수 있어. 요새 힐로샤인에 돈이 고이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지 않나.”
“그렇긴 하지.”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브릭스턴이 눈을 한 번 더 깜빡였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이사벨라가 팔꿈치로 거세게 남자의 명치를 찍었다.
“흐억! 이 망할 꼬맹이가!!!”
남자가 악귀 같은 손을 이사벨라를 향해 뻗었다.
“아가!!”
브릭스턴이 이사벨라를 감싸 안는 것과 괴한이 검을 휘두르는 것은 동시에 일어났다.
브릭스턴은 저 검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브릭스턴이 이사벨라를 품에 안은 채로 몸을 돌렸다.
등을 내어준 채로 아이를 지킨 것이다.
“흡!!”
브릭스턴이 신음을 거칠게 참았다.
이사벨라가 품 안에 있었다.
등을 쪼개는 통증이 그를 괴롭혔지만 입 한 번 열지 못했다.
“이런 미친. 그래, 네놈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
괴한이 다시 검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저놈을 당장 잡아요!!!”
제인의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기사들이 몰려 들어왔다.
브릭스턴이 까맣게 바랜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아가. 괜찮지?”
“……아, 아빠…… 아빠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덜덜 떠는 이사벨라를 브릭스턴이 꼭 끌어안았다.
지켜냈다. 다행히 그의 보물은 멀쩡했다.
이번에야말로, 지켜낸 것이다.
브릭스턴이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사랑한다, 이사벨라…… 아빠가 많이 사랑해.”
브릭스턴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