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당신이 다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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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당신이 다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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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당신이 다치면?
2023.02.24.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보기 좋은 장관을 연출했다.
지금까지는 광대놀음과 같았다면 지금은 선남선녀가 황홀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덴버스 후작이 말을 흘렸다.
“보기 좋은 한 쌍이지요.”
모여 앉아 있던 자들이 덴버스 후작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감각을 곤두세웠다.
덴버스 후작은 제국 내에서도 세력이 큰 자였다.
덴버스 후작의 한마디에 여러 의도가 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히엔트리의 정치권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황제는 진실로 레니샤를 다시 황후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녀 출신 황후에게서는 아이를 보았으니 적자가 생겼고, 이제는 아이보다는 정치적 영향력을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닌가.
덴버스 후작은 집중된 관심을 부드러운 웃음으로 넘겼다.
“그간 히엔트리는 사실 레니샤 님의 은덕을 많이 입어왔지요. 황성은 레니샤 님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된 구실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히엔트리의 행정이 무너졌겠지요. 확실히 히엔트리는 레니샤 님이 필요합니다.”
레니샤를 다시 황후로 만들려고 하는구나!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사신단들의 시선이 플로워를 향했다.
카시우스의 손을 잡은 레니샤가 가볍게 뛰어올랐다.
장인들이 공을 들여서 짠 레이스가 그 순간 꽃잎처럼 펼쳐졌다가 오므라들었다.
불빛 아래에서 금사들이 화려한 빛을 발했다.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 신경을 쓴 태가 확실히 났다.
‘투리엘이 온 정성을 쏟았군.’
덴버스가 피식 웃었다. 적절한 연출이었다.
게다가 카시우스가 입은 옷도 투리엘의 작품이 분명했다.
레니샤의 옷에 들어간 레이스 짜임이 카시우스의 옷에도 은은하게 들어가 있었다.
“그…… 히엔트리 내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습니까? 사실 국제적으로도 가장 핫한 감자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외부의 시선과 히엔트리의 시선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 이쪽도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큼. 덴버스 후작께서는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직설적인 질문에 덴버스 후작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덴버스 또한 레니샤와 카시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왈츠가 끝나가고 있었다.
어둠을 가르는 샹들리에의 화려한 불빛이 미치도록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레니샤는 타고나길 주인공 체질이었다.
“다들 판에 박힌 생각만 하고 계시니 제가 뭐라 첨언하기도 어렵군요.”
“판에 박혔다라?”
“시선을 조금만 돌려도 새로운 게 보일 텐데, 참 아쉬운 일 아닙니까?”
“후작은 여태 중립을 지켜온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선택이 필요한 때이니까요.”
덴버스가 고개를 돌려 사신단을 둘러보았다.
각국의 왕자와 공작 혹은 그 외의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한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다면 아무리 무거운 엉덩이라도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덴버스 후작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편견을 깨라는 건 무슨 말이오?”
드디어 쓸 만한 질문이 나왔다.
덴버스 후작이 가라앉은 표정의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말 그대로 새로운 시각으로 상황을 보라는 말이지요. 저는 이미 답을 드렸습니다. 아, 일어날 시간이군요. 곡이 끝났으니 저도 물러가 보겠습니다. 피앙세가 기다리고 있군요.”
유들유들하게 몸을 일으킨 덴버스 후작이 자리에서 멀어졌다.
그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던 이들이 입을 열었다.
“저게 무슨 말인지 아시오?”
“왕자님께서는 짐작이 가십니까. 저는 짐작조차 가질 않습니다.”
“편견을 깨라. 히엔트리는 레니샤 님 없이는 굴러가질 않는다. 여태 덴버스 후작은 레니샤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꺼냈소. 그게 무슨 말인지 아직도 모르겠소?”
가장 유효한 질문을 던졌었던 이가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려움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지, 아니면 생각조차 못 하는 건지.
“덴버스 후작은 황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소.”
왕자가 황좌 위의 악마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지금 플로워에 오를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것은 렉서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렉서스의 눈에 띈 덕에 사달이 난 선례가 이미 있지 않은가.
“그건 덴버스 후작을 따르는 이들도 같을 거요. 내 정보원에 따르면 덴버스 후작은 중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물밑으로는 레니샤 측과 소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소? 덴버스 후작은 카나리아 황후와도 연줄이 있지 않소.”
“요즘 들어 덴버스 후작이 투리엘의 의상실을 이용하는 횟수가 늘었다고 하더군. 투리엘 마담이 레니샤와 한배를 탄 사이라는 건 다들 아는 사실 아닌가.”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아둔하긴.”
왕자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덴버스 후작은 레니샤를 황제로 만드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는 거요.”
“지금 그건……!”
“히엔트리의 성을 바꾸겠다는 거지.”
일시적인 침묵이 흘렀다.
너무나도 두려운 말이었다.
세 뱀 신의 근원이라고 여겨지는 히엔트리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와 권력은 대단했다.
겁에 질린 이들이 몸을 움츠렸다.
히엔트리의 성이 뒤바뀐다!
“황족에게 부여된 신성성을 부정하는 것이오. 신전에서 가만히 있겠소? 아무리 신권보다 황권이 앞서 있다지만 그들을 무시하지는 못하오. 황족의 신성이 사라지고 나면 그 누가 황제를 우러러보겠소! 지금의 황제가 광기에도 불구하고 집권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오? 세 뱀 신의 아들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오. 과거 히엔트리가 부여받은 신성성 때문에!”
쏘아붙인 이가 숨이 차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이 붉어져서는 분노와 함께 두려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최초의 발언자가 입을 열었다.
“……레니샤에게는 카시우스가 있지요. 카시우스가 노예 출신 기사이기는 하지만, 그가 어떻게 쵸르파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지 잊으셨습니까?”
“무슨 말을……?”
“카시우스는 붉은 뱀의 힘을 이어받았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레니샤의 태에서 카시우스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신성성을 획득하는 겁니다!”
남자가 두 손으로 팔을 끌어안았다.
모두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카시우스와 레니샤를 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쟁점을 똑바로 짚어낸 것이다.
카시우스의 아이는 새로운 신성성을 획득할 수 있다!
정말로 황족이 뒤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로테라 가문에도 히엔트리의 피가 흐르긴 합니다. 먼 과거에 황녀가 공작 부인이 되었던 이력이 있지요. 게다가 힐로샤인이 어떤 땅입니까. 그 땅은 본디 검은 뱀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황무지가 아니었습니까! 그 땅을 카시우스가 되살렸다는 소문이 팽배하니…… 그 무덤에 풀이 자란다지요? 세 뱀 신의 힘이 깨어날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번 침묵이 흘렀다.
편견은 깨어지고 가려졌던 눈앞이 밝게 뜨였다.
그들은 진실을 보았다. 알 속에 들어 있었던 알짜배기를 말이다.
덴버스 후작은 시기적절하게 그들을 일깨워주었다.
“……정말로 선택이 필요한 시기로군요. 히엔트리냐, 로테라냐.”
“호오…….”
탄식이 흘렀다.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영혼을 뒤흔드는 두려움이 그들을 휘어감았다.
장내에 흐르는 선율조차 그들을 찌르는 가시로 느껴진다.
문 밖을 지키고 선 황제의 기사들이 그들을 도륙 낼 것 같았다.
그리고 길고 긴 두 번째 음악이 시작되었다.
카시우스와 레니샤가 두 번째 춤을 시작했다.
빙글, 빙글.
현란하게 산재하는 빛들이 그들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카시우스와 레니샤! 완벽한 한 쌍이 아니던가!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
레니샤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오랜만에 사람들의 시선 속에 던져졌는데도 위화감은 없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나았다.
이전에는 레니샤를 연민하는 시선들이 팽배했다면 지금은 그녀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덴버스가 적절하게 폭탄을 던진 모양이다.
저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 전부 짐작이 가능했다.
레니샤가 맨 처음 황제의 의중을 파악했을 때.
그러니까,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짝이 된다는 걸 알았을 때.
레니샤는 직감했다.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릴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카시우스라니!
레니샤가 황제가 될 때 가장 큰 문제는 그녀에게 정통성과 신성성이 부족하다는 거였다.
하지만, 붉은 뱀의 힘을 품은 카시우스라면 그 모든 것이 해결된다.
정통성은 끼워 맞추면 그만이다.
그러나, 함부로 우기기도 힘든 신성성을 카시우스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그와 레니샤 사이의 아이를 후계자로 세움으로써!
헨리로부터 렉서스의 의중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구상했던 거였다. 이 모든 순간을.
레니샤가 야살스레 입술을 끌어 올렸다.
“기분이 좋습니까?”
“카시우스는 안 좋은가 봐요? 나랑 춤추고 있는데.”
“……이 세계는 정말로 이상합니다. 그런 일들이 줄지어 일어나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들로 춤을 추는군요.”
“보내줄 사람은 보내줘야지요.”
레니샤가 여릿하게 웃었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카시우스. 지금 중요한 건 카시우스와 나겠지요. 렉서스가 우리를 훼방 놓기 전에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건 어떨까요?”
레니샤가 카시우스와 연달아 춤을 추고 있는 것은 렉서스를 피하기 위함도 있었다.
아무리 무도한 황제라고는 해도 이 자리에서 카시우스와 레니샤를 어떻게 하겠는가.
“렉서스가 눈을 벌겋게 뜨고 있다고요.”
“……덴버스 후작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사람들을 일깨우고 있지요. 멍청하게 눈을 꾹 감고서 사건을 제대로 볼 생각을 못 하는 이들을.”
“그러면 나는 또 무엇을 하면 됩니까?”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허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저기서 당신을 끌어내고 싶은 걸 참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당신이 좀 더 빨리 나올 수 있겠습니까?”
“곧이에요, 카시우스.”
레니샤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렉서스가 양단의 결정을 하겠지요. 항복을 할지, 전쟁을 할지. 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지만, 클라우드 공작은 카나리아를 버리고 다시 렉서스를 택할 겁니다. 그런데 한 번 깨진 그릇이 다시 달라붙겠어요? 시간은 우리 편이에요, 카시우스.”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루나가 우리의 도주로를 확보해줄 거예요.”
“카나리아의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는 어떻게 밝혀냅니까?”
“신전에는 이미 손을 써두었어요. 이미 아이 아빠라고 나선 자가 있으니 사람들은 의심을 지우지 못할 거예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겠죠. 렉서스는 더 의심이 많은 자예요.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면…….”
“그러다가 당신이 다치면?”
카시우스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끌어당겼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들러붙은 몸 위로 서로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얇은 천으로는 숨겨지지 않는 그런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