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키스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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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키스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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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키스해 줘
2023.02.17.
카시우스가 황제의 기사들에게 붙들리자, 렉서스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렉서스와 카시우스의 눈이 마주쳤다.
카시우스는 저놈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놓여난다면 망설이지 않고 저놈의 여릿한 몸을 꺾으리라! 다시는 레니샤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폐하.”
레니샤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렉서스를 불렀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제가 어떤 신분으로 참석한 것인지 잊지 마십시오. 대륙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힐로샤인과의 갈등을 드러내실 요량이십니까? 내전이라도 벌이실 건가요?”
차분하게 말하고 있지만, 레니샤는 조급했다. 잘못했다가는 카시우스까지 죽이겠다고 날뛸지도 모른다.
“카시우스는 만민의 영웅입니다. 제국민이 모두 지켜보고 있습니다. 카시우스는 쵸르파 평야에서 불가능할 거라고 여겨졌었던 승리를 이끌어냈고 제국을 구해냈습니다.”
“그래서, 저놈이 내 머리 위에 있다던가?”
“그런 의미가 아니지요.”
레니샤가 렉서스의 손을 쳐냈다. 턱이 얼얼했다. 이 미친놈. 만약, 카시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렉서스는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이 자리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제가 말씀드리는 건 폐하의 명예입니다. 저들이 폐하를 보는 시선이요. 아무리 히엔트리가 대제국이라고는 하나 저들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지요.”
렉서스가 느리게 미소 지었다.
“그들은 황제의 머리 위에 있다던가?”
하는 말마다 비꼬는 꼴이 혐오스럽다. 저런 놈하고 말을 섞고 있어야 하는 지금 이 상황도 매우 지탄스럽고.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 바라시는 대로 하십시오. 저들이 보는 앞에서 카시우스의 목을 치고, 저를 망가뜨리십시오. 저들은 살판이 나겠군요. 먹음직스러운 히엔트리에 내전이 터졌으니 개나 소나 국경을 탐할 겁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지요. 지금 여기서 마무리 지으신다면, 저들은 모든 화살을 카나리아에게 돌릴 겁니다.”
레니샤의 분홍빛 눈동자가 찬 서리를 머금었다.
렉서스의 시선이 레니샤의 얼굴을 훑었다. 레니샤는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고귀했다.
렉서스가 범접할 수 없는 어딘가에 올라서 있는 것처럼. 레니샤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것처럼 느껴진다. 카시우스를 포함하여 렉서스조차도!
렉서스조차 저 발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발을 핥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이 항상 렉서스의 열등감과 질투심을 자극하곤 했다.
분명 비참한 방법으로 내쫓았는데도 불구하고 레니샤는 어째서 여전한가?
‘타고난 게 다르잖아.’
렉서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 딸은 네깟 거하고 타고난 게 다르지 않나. 너는 내가 만든 황제지. 하지만, 내 딸은 태어날 때부터 고귀했어. 그 누구도 레니샤가 귀한 공녀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지 않았지. 그것과 그것이 같나?’
유령이 렉서스와 레니샤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너는 끊임없이 네 자질을 증명해야 했지. 하지만, 내 딸은? 그저 존재만으로도 인정받아. 그게 차이다, 이 멍청한 놈아!’
렉서스가 이를 아득 갈았다.
무력한 쥐새끼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 화가 나는 건 레니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거다. 게일을 이 자리에 끌어낸 것도 분명 레니샤이리라. 그런데 증거가 없으니 레니샤를 추궁하지도 못한다.
게다가 렉서스는 은연중 알고 있었다. 레니샤가 이렇게까지 일을 벌였다는 건.
‘증거가 있는 거야.’
렉서스가 레니샤의 아름다운 얼굴을 홀린 듯이 응시했다. 결국 렉서스 또한 레니샤의 뜻대로 움직이는 망령일 뿐이다.
“……그렇지. 항상 너는 틀리지 않았어.”
렉서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공을 풀어 줘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방금 있었던 일들을 전부 잊은 것처럼 평온했다. 카시우스의 거친 숨소리가 홀을 울렸다.
렉서스가 기계적으로 몸을 돌렸다.
머릿속이 들쑤셔진 기분이었다. 빈 카나리아의 자리가 렉서스를 후벼팠다.
“……이 자리에서 만찬을 시작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것 같군. 시종장. 쓸 수 있는 홀이 있나?”
“예, 폐하!”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자리를 옮길 것이다. 손님들을 정중하게 모시도록.”
“예!”
첫 번째 막이 내렸다.
레니샤가 렉서스의 뒤에 가려진 채로 입술을 늘어뜨렸다.
참, 아이러니하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나. 레니샤는 항상 참아야 했다. 전쟁터를 전전하고 있는 부모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뒤집혔다.
“풉.”
레니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렉서스의 주먹이 쥐어지는 게 보였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
“무엇이 그렇게 즐겁습니까?”
카시우스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카시우스는 조금도 즐겁지 않은 모양이군요.”
레니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들 홀로 이동하고 레니샤와 카시우스만이 남았다. 카시우스가 단숨에 단 위로 올라와 레니샤의 손을 낚아챘다.
“레니샤를 악어의 아가리 앞에 들이민 기분이었습니다. 렉서스가 레니샤에게 해코지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것도 아무 상관 없었던 겁니까?”
레니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렉서스가 지핀 분노는 카시우스의 안에서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카시우스는 치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순간 온갖 상상을 다 했습니다. 저는 황제를 몇 번이고 도륙했지요. 하지만, 현실의 저는 아무것도 못 하고 당신을 보고만…… 있더군요. 계속해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겁니까? 그 전에도, 지금도! 루나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쉿.”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을 반대로 붙들었다.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손에서 느리게 힘이 풀렸다. 카시우스가 숨을 들이마셨다.
“화내지 말아요, 카시우스. 그 모든 순간으로부터 당신이 나를 구해냈잖아요.”
레니샤가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카시우스의 말대로 레니샤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렉서스는 광인이었다. 언제든 수틀리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루나가 옆에 있어요. 지켜본 바에 의하면 루나는 뛰어난 검사임과 동시에.”
“…….”
“사리분별을 잘 하지 못하는 짐승과 다를 바 없더군요.”
레니샤가 신랄하게 평을 내렸다.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루나는 렉서스를 죽일 것 같던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은 채였다. 물론,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레니샤가 막겠지만. 루나와는 적당하게 기절을 시키는 방향으로 합의를 해 두었다. 렉서스가 아무도 없는 밤에 찾아올 경우를 대비해서.
“……그에 반해 렉서스는 살인자에 지나지 않아요. 제대로 검을 쥐는 법도 잊었을 거예요.”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을 가만가만 흔들었다. 카시우스가 참고 있었던 숨을 탁하고 터뜨렸다. 막혀 있었던 것들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카시우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레니샤는 다친 곳 없이 멀쩡하다.
“루나라면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저녁에 있을 연회에는 루나도 동행할 거예요. 이 자리에는 데리고 올 수 없었죠.”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손등에 느리게 입을 맞췄다. 레니샤가 무엇을 하는지 전부 볼 수 있도록.
카시우스의 손등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아직도 나한테 화가 나?”
레니샤가 속삭이듯 물었다.
“……화를 내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알아요.”
“당신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어요.”
“나도 알아요.”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향해 팔을 뻗었다. 카시우스가 순순히 몸을 굽혔다. 가까워진 그의 목을 레니샤가 휘어 감았다. 휘청이며 흔들린 카시우스가 레니샤가 앉은 의자의 손잡이를 짚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끌어안은 채로 말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
“키스해 줘, 카시우스.”
카시우스의 눈이 흔들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지켜보는 눈이 많았던 곳이었다.
레니샤의 곁에는 렉서스가 앉아 있었고 각국의 사신들과 히엔트리의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게다가 언제든지 사용인들이 들어와 그들을 찾을지도 모른다.
“얼른.”
배덕감이 카시우스를 휘어 감았다. 레니샤가 붉어진 목덜미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보고만 있을 거야?”
레니샤가 은근하게 카시우스에게 몸을 붙였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동자가 요사스럽다. 뱃사공을 홀리는 세이렌도 이만큼 유혹적이진 않으리라. 레니샤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카시우스를 돋궜다.
결국 함락당한 쪽은 카시우스였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으응…….”
원하던 것을 얻은 레니샤가 기분 좋은 소리를 흘렸다.
만족감이 짙게 차올랐다. 이곳에서 누구도 레니샤를 끌어내지 못하리라. 렉서스조차도.
***
레니샤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한 번도 흐트러진 적 없었던 것처럼. 카시우스가 갑갑한 탓에 타이를 만지작거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과 어울리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기질 않는다.
마담 투리엘이 데리고 온 사람들이 레니샤를 다시 치장을 해 주는 순간에도 그녀는 당당했다.
어찌 되었든 식사는 이어졌다. 도나타 공주는 더 이상 렉서스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고 있었다.
대신 다른 목표를 찾겠다는 듯이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리고 갤러스 공주는 레니샤를 고른 자신의 선택이 퍽 만족스러운 듯했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던 가운데,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사실, 히엔트리의 황제를 만나는 날을 고대하고 있었던 자들은 이 침묵을 견딜 수 없었으리라.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황제 폐하.”
렉서스가 차가운 눈을 들어 올렸다.
“저는 그동안 황제 폐하를 뵙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일리안에서 온 왕자였다. 일리안의 왕세자는 기반이 굳건한 적통 왕자였다.
그리고 이곳에 온 네릴 왕자는 정부 소생으로 태어나 왕비에게 입적된 경우였다. 거의 인질처럼 붙잡혀 있었던 터라, 아무 뒷배도 없었다.
레니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릴 왕자가 타국으로 망명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었나.’
덴버스 후작은 급변하고 있는 대륙의 정세를 모두 파악하여 가지고 왔다. 레니샤는 덴버스 후작의 그런 눈치 빠름을 높이 사고 있었다. 시류를 읽는 눈이 제국 내에서 가장 확실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이왕이면 제국이 낫겠지.’
저자가 무슨 말을 꺼낼지 궁금했다. 어느 쪽에 붙을지도.
“황제 폐하께서는 좋은 아내를 고르시는 눈이 탁월하신 것 같습니다.”
네릴 왕자가 레니샤와 카나리아의 빈자리를 번갈아 보았다.
“흠?”
“정치적으로나, 사교적으로나 뛰어난 레니샤 님과 아이를 낳아 주시는 황후 폐하라니. 이처럼 완벽한 조합이 어디 있겠습니까?”
레니샤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몇 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방금의 지옥이 생각나지도 않는 건가? 근처에 있었다는 죄로 게일의 피를 뒤집어썼었던 귀족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여기 미친 놈이 하나 더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