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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확인해야 할 것 (91/135)


91화. 확인해야 할 것
2023.02.10.



 
핏줄을 부정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징한 증거가 필요했다.

신전이나 어느 귀족도 반발하지 못하도록.

민심을 설득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히엔트리는 제국에서 오랫동안 황가로 존재해왔다.

여태 후계가 없었던 황제가, 그 어미의 출신이 한미하다고는 한들 황자를 보았다.

제국민들 또한 술렁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드디어 제국의 미래가 튼튼해졌다고 생각했다.

카나리아가 낳은 황자가 유일한 적통 황자로서 미래의 제국을 이어받게 될 거라고.

물론, 일각에서는 렉서스에게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있다는 게 확인되었으니 고귀한 태를 빌어 새로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그 ‘고귀한 태’가 레니샤가 되길 바라는 자들도 많았다.

렉서스는 하자가 많은 결혼 시장의 매물이었다.

인성과 광기, 그리고 레니샤와 카나리아까지.

제정신 박힌 부모라면 딸자식을 그 자리로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적법한 후계자를 남편이 있는 정부에게서 볼 순 없었다.

그러다 보니 머리가 굳어버린 노귀족들 대다수는 레니샤가 이대로 황성에 머물며 아이를 낳기를 바라고 있었다.

모두의 욕망이 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레니샤가 테이블을 굽어살폈다.


‘여전들 하군.’

이기적인 족속들이다.

타인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거나, 타인의 불이익은 생각하지 않고 제가 지켜야 할 기준을 들이미는 거나.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이래야 제도지.

정말로 제도로 돌아온 실감이 났다.

타국의 사신단들은 이 테이블에 오가는 오묘한 분위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정상적인 자들은 혼란을 금치 못했다.

황후가 아닌 폐황후와 나란히 앉은 황제와 그 아랫단에 앉은 황후라니.

새빨갛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카나리아를 우리에 갇힌 원숭이처럼 구경하는 자들도 있었다.


‘정말 가관이로군.’

이 자리를 원한 건 레니샤이긴 했지만…….

덴버스 후작은 이 자리를 레니샤에게 내어주기 위해서 간교한 말로 카나리아와 황제 사이를 이간질했다.

카나리아는 클라우드 공작을 부추겨 자신을 비호하도록 했고…….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데에는 덴버스 후작의 역할이 컸다.

귀여운 바바라는 모든 게 자신의 계략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도 이 모든 것은 촘촘하게 짜여진 거미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끝을 붙들고 있는 건 레니샤고.

레니샤가 비스듬하게 미소 지었다.


“다들 먼 길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소. 세 뱀 신 축제를 맞이하여 대륙의 모두가 이 자리에 모인 것 같아 나의 마음도 기쁘오.”

오랜만에 정상적인 어투였다.

렉서스의 기분은 한껏 고조되었다.

아니, 사실은 폭풍 속에 조용히 침잠해 있는 상태라고 보면 옳았다.

레니샤가 그런 말을 던졌을 때는 분명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말이니 렉서스를 들쑤셨을 테고, 곧 그것은 구체화 되어 렉서스를 후려치겠지.

렉서스도 그간 레니샤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히엔트리는 세 뱀 신의 본거지라고 해도 옳았다.

세 뱀 신은 히엔트리로부터 태어나 세상을 창조하였다.

하여, 히엔트리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많았다.

그런 히엔트리가 직접 주도하여 벌이는 축제다.

설마 레니샤가 이곳에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레니샤를 카시우스의 옆에 앉게 두고 싶지 않았다.


“히엔트리는 세 뱀 신을 잉태하고 낳은 모국으로서 이번에도 그 막중한 무게를 다하겠소. 즐기다 가시구려. 펜터시 공국에서도 귀한 손님이 와주셨군!”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몇 안 되는 여성 대표였다.

그녀는 펜터시 공국의 공주였다.

왕위계승권을 지니고는 있지만, 공주의 위로 쟁쟁한 오빠가 여럿이라 실상은 무용지물이었다.

공주가 생긋 미소 지었다.


“이야기로만 듣던 황제 폐하의 위용을 실제로 뵙게 되니 설렙니다. 마치 사춘기 소녀가 된 듯하군요.”

레니샤가 코웃음을 쳤다.

카나리아는 불안한 얼굴로 잘도 웃어대는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나리아는 이제야 안 듯했다.

렉서스가 아무리 미쳤다고는 해도, 그리고 히엔트리가 저물어가는 중이라고는 해도 세상 단둘밖에 안 되는 제국이었다.

제국이 망해도 이번 대에 망하겠는가.

렉서스는 죽을 때까지 황제일 것이다.

게다가 히엔트리는 세 뱀 신의 모국이라고 하여 타국보다 좀 더 올려치는 경향이 있었다.

말하자면, 히엔트리는 어느 정도는 신성국으로서의 지위도 가지고 있었다.

렉서스를 노리는 여자는 많았다.

아직 후계 자리도 결정되지 않았고 겉보기에는 미남자다.

기행을 일삼는다고는 하지만, 타국 군주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겪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타국의 군주들에게 렉서스의 이야기는 그냥 듣기 좋은 가십거리에 불과했으니.

딸들이 겪게 될 불행에 대해서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폐하, 시간이 나실 적에 저를 불러주세요. 히엔트리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습니다.”

그래도 저렇게 싸구려처럼 굴지는 몰랐지.

레니샤가 혀를 작게 찼다.

펜터시 공국이라면 그래도 무기를 팔아 부를 축적했다.

가진 돈이 있다는 거다.

공주가 저렇게 적극적일 때는 그 내부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어, 후계 전쟁.


‘안 그래도 펜터시 공왕이 죽을 때가 됐었지.’

백발 성성한 노인네가 죽기 직전까지 젊은 여자를 찾았다는 이야기는 레니샤도 들어 알고 있었다.

공주 위로 아들이 다섯이었으니, 그들 사이에 어떤 피바람이 불지는 모를 일이다.

카나리아는 이 모든 이해관계를 알고 있을까?


“나보다는 레니샤가 낫겠소. 도나타 공주, 아무래도 레니샤가 황성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거든. 게다가 나보다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좋은 상대지.”

도나타 공주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녀에게 레니샤는 라이벌에 불과했다.

도나타 공주는 직접 자원하여 이 자리에 왔다.

발 닦는 하녀 따위가 황후가 되었다길래, 그다음은 도나타 공주가 되어 보기 위해서.

비천한 것도 황후가 되었는데 도나타가 왜 못 하겠는가.

그런데 황성에는 버젓이 폐황후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미친 히엔트리.

그래도 그 자리가 탐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도나타가 지지했던 3왕자가 완전히 실각했다.

그렇다면 도나타에게 남은 것은 실권을 잡은 2왕자의 불벼락뿐이었다.

이곳에 뼈를 박아야 한다.

도나타가 심기일전해서 렉서스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건넸다.


“하지만, 저는 폐하가 더 좋습니다.”

“하하.”

렉서스가 눈을 접으며 웃음을 흘렸다.

여기에 미친 인간이 하나 더 있군.


“무슨 이유로? 내 소문을 듣지 못했소? 레니샤가 훨씬 더 대하기 편할 텐데.”

“황제 폐하의 위용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위를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정말로 소문 속의 그분이 맞는지.”

꽤 용감한 공주로군.

그리고 레니샤로서도 반길 일이었다.


“공주께서 바라신다니 폐하께서 시간을 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하군요.”

레니샤가 렉서스의 마음을 긁어내리며 생긋 웃었다.

이 미친 곳에서 레니샤의 시선과 마음을 진심으로 끌어당기는 건 단 하나다.

카시우스.

레니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그녀의 기사.

카시우스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밀린 귀족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생쥐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사실 렉서스와 레니샤, 카나리아의 구도만으로도 숨이 막힐 만한데 몸집이 일반 문인들보다 2배는 되는 카시우스라니.

이곳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 오랜만입니다. 갤러스 공주.”

“저를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레니샤 님.”

애매한 레니샤의 위치로 인해서 호칭에 문제가 있는지 갤러스가 말끝을 살짝 흐렸다.


“그냥 로레타 부인이면 충분합니다. 제가 어떠한 이유로 이 자리에 있던 몸담은 곳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네, 레니샤 공작 부인.”

갤러스가 힘주어 발음했다.

이 자리에서 배척받는 사람은 둘 있었다.

자격도 안 되면서 부른 배를 끌어안고 황후가 된 카나리아와 분위기가 흉흉한, 노예 출신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카시우스.

레니샤는 그게 꽤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카시우스에게 눈독 들이는 자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카시우스는 이족인 히샴의 후계자로 태어났다.

왕위계승권도 없는 일부 귀족들보다 오히려 귀한 태생이었던 것이다.

거기서 오는 자신감인지 카시우스는 타인의 시선에 별반 상처받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다.

레니샤는 카시우스로부터 찌르듯이 쏘아지는 시선을 즐겼다.


 
레니샤의 한마디에 울고 웃는 남자다.


“갤러스 공주가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니, 세 뱀 신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왕께서는 편안하십니까?”

“물론입니다.”

갤러스 공주가 눈을 빛냈다.


“왕자 시절에 뵌 공작 부인을 잊지 못하고 계시지요. 얼뜨기 청년처럼 고백했었던 일은 제발 잊어달라고 전해달라셨는데.”

당시에 일어났던 그 사건은 아주 유명했다.

갤러스의 오빠이자 이제는 국왕이 된 캠더슨 왕세자가 히엔트리의 황후에게 반해 열렬한 사랑시를 낭송했다는 것은 히엔트리의 귀족들이면 다 알고 있었다.

당시 캠더슨은 고작 18살이었다. 지금은 22살 언저리 되었나.

어린 시절의 치기라 모두가 웃어넘겼지만 렉서스는 그렇지 못했었다.

광증이 도진 렉서스는 캠더슨을 죽이겠다고 날뛰었고 그를 살려 내보내기 위해서 레니샤가 그녀의 사비를 털어 도주로를 마련해주는 해프닝도 있었다.

갤러스는 그 이야기를 용감하게 꺼낸 것이다.

레니샤는 갤러스 공주의 눈동자에서 반짝이는 호의를 보았다.

그렇다면 캠더슨 왕의 호의도 함께하고 있다고 해도 옳았다.

레니샤가 이 자리에 참석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카나리아를 밟아주기 위해서?

아니. 레니샤가 뿌린 씨앗이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레니샤는 지난 세월 동안 사신단들을 직접 접대해왔다.

그들은 레니샤의 든든한 우방이었으며, 지지자여야 한다.

레니샤가 히엔트리의 황제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외부의 지지도 필요했다.

아무도 대접해주지 않는 황제는 황제가 아니다.

레니샤는 이곳에서 그들의 마음이 여전한지 확인하고 그들이 돌아가기 전에.


‘못을 박아야지.’

물론, 일부 중에는 도나타처럼 렉서스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인 자들도 있었지만 확실하게 레니샤의 노선인 자들도 있었다.

레니샤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렉서스를 보았다.

제비꽃을 닮은 보랏빛 눈동자가 레니샤를 쏘아보고 있었다.


“레니샤. 여전히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군. 그러면 그것도 기억하나? 내가 그 애송이를 어떻게 혼쭐내줬는지 말이야.”

렉서스의 눈빛이 이번엔 카시우스를 향했다.

날 선 독점욕이 성성했다.

지가 왜?

레니샤가 실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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