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나처럼 되고 싶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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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나처럼 되고 싶잖아
2023.02.03.
힐로샤인에 사람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거리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음식점과 술집들이 우후죽순으로 문을 열었다.
이방인들의 수도 늘었다.
대부분 힐로샤인이 발전하기 시작하니 돈 냄새를 맡고 모여든 자들이었다.
여관 사업도 성행하기 시작했고 정보 길드도 들어섰다.
힐로샤인에 돈줄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개중에는 정체가 모호한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전에 왔을 땐 황무지였는데, 정말로 사람들이 많이 늘기는 했군. 게다가 어떻게 한 건지 나무가 자라던데.”
“쯧.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리는 할 일만 하면 되는걸.”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데 한 사람이 더 끼어들었다.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덥수룩한 수염 위에 물방울이 맺혔다.
“밖을 돌아보고 왔는데 확실히 검 쓰는 자들도 많이 모였더군. 이번에 힐로샤인에서 새롭게 기사들을 뽑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더군.”
“기사를 뽑아? 그게 합법인가?”
“그럴 리가. 공작이 뭔가를 꾸미고 있는 모양이지. 알음알음 퍼진 소문이라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던데.”
“과거 로테라에 서약했었던 기사들도 몰려오고 있다더군. 로테라의 핏줄이 그들을 찾고 있다나 봐.”
“허. 하늘이 우리를 돕는 건가. 로테라의 기사로 위장하면 들어가기 쉬운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로테라의 검법을 흉내라도 낼 수 있으면 들어가는 거고 아니면 의심을 받는 거고.”
“어쨌든 성으로 들어갈 길이 열렸다는 거 아냐.”
세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목표는 저 견고한 성안에 있었다.
새로 증축해서 낡은 곳도 없어 파고들 개구멍 하나 없었다.
“쯧. 괜한 의뢰를 받은 거 아냐?”
“돈을 생각해. 그 늙은이 돈은 많아 보였다고. 남은 잔금까지 받으면 5년은 그냥 먹고 놀 수 있어.”
“좋아.”
그들이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앉아만 있어서는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넘어야 하는 성문은 너무 높았다.
***
레니샤는 루나가 퍽 흥미로웠다.
분명 카시우스를 마음에 담은 게 훤히 보이는데 행동하는 건…….
‘마치 어린 시절에 좋아하는 아이 괴롭히는 것 같군.’
루나의 이력을 들어보니 노예 검투사로 지냈다가 이족들에게 돌아갔다고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족들과 함께 도망자로 살았다.
루나가 퉁명스럽게 제가 입은 드레스를 이리저리 들춰보았다.
아무래도 루나가 시녀의 신분으로 들어오다 보니 드레스는 필수였다.
투리엘은 루나의 신분을 잘도 위장해서 데리고 들어왔다.
“루나.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니?”
레니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아아니…… 아니요.”
루나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편하게 대답해도 좋다. 내가 허락했으니.”
루나가 레니샤의 눈치를 보았다.
이상하게 레니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검도 잡지 못하는 여자인 게 분명한데 무서웠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레니샤가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정말?”
“그래, 정말.”
헤일린은 궁중 예법도 모르는 루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한숨만 쉬고 말았다.
레니샤에게 제멋대로 반말하면서도 루나는 그게 잘못된 것인지 모른다.
레니샤는 루나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 드레스 너무 싫어. 이 색깔도 싫고, 레이스도 싫어.”
“아아.”
레니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심심한 궁 생활에 재밌는 장난 거리를 찾은 듯했다.
“그러면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고르게 해줘야지.”
“투리엘을 오라고 할까요?”
“좋아요, 헤일린.”
“그 여자는 싫어! 정말 독사 같단 말이야! 너보다……!”
“내가 말조심하라고 했었지, 루나?”
레니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 정도 선은 지켜줘야 이쪽도 봐줄 생각이 드는 거지.
루나가 입을 합 하고 다물었다.
“……레니샤 님보다 무섭단 말이에요.”
세상에는 검을 들지는 못해도 강자들이 참 많은 것 같다.
루나의 어깨가 축 처졌다.
레니샤가 피식 웃고는 헤일린에게 말했다.
“투리엘에게 들어오라고 전해줘요. 그 김에 가져올 것들도 있으면 가져오라고.”
“네, 레니샤.”
헤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고귀한 공작 부인이 될 운명이었는데 지금은 레니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일개 시녀처럼.
하지만, 이런 것도 괜찮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못 하겠는가.
헤일린이 덤덤한 표정으로 레니샤의 침실을 나갔다.
***
“지금 뭐라고 했나.”
“황자님은 데리고 가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 폐하.”
클라우드 공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정중한 예를 취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든 알 수 있었으리라.
렉서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렉서스가 고개를 기울이고는 클라우드 공작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렉서스보다 한 뼘은 작은 공작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의 뒤에는 카나리아의 궁이 있었다.
“내 황후가 공작에게 들러붙었나?”
“황후 폐하를 상대로 너무 무례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아직도 자네가 가르쳐야 할 어린애로 보이나 보지?”
렉서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클라우드 공작을 위시한 귀족들이 그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클라우드 공작에게 함부로 못 하는 것도 맞다.
렉서스가 이를 뿌득 갈았다.
오랜만에 카나리아가 제대로 머리를 썼다.
노래나 부르라고 새장에 들였더니 주인을 쪼는 새라니.
“자네는 카나리아로부터 무엇을 약속받았지? 아, 내 아들의 옆자리? 장래에 이 제국을 손에 쥐어보기라도 하려고? 그 아이가 정말로 황제가 될 수 있다더냐?”
“폐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폐하께서 이렇게 건강하신데요. 그리고 순리대로라면 나중에 황자님이 황제 폐하의 뒤를 이으시겠지요. 당연하게.”
“그 당연한 일을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클라우드 공작, 너무 이른 선택을 한 건 아니고?”
“폐하, 어린애처럼 굴지 마십시오.”
클라우드 공작이 뾰족한 턱을 치켜들었다.
여기서 밀리면 평생 밀리게 된다.
보는 이들이 많아 양보할 수가 없었다.
그간 클라우드 공작의 권력은 렉서스로부터 나왔다.
렉서스가 그에게는 한 수 접어주었기에. 지금도 그래야 한다.
클라우드 공작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내가 어린애로 보이면 그런 거고. 저 애가 황제가 될 것 같다고 여기면 그런 거겠지. 그렇지, 클라우드 공작?”
“…….”
“내가 자네를 내 스승으로 데리고 온 것은 로테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는데. 지금 보니 나를 무는 사냥개로 키운 꼴이로군.”
렉서스가 몸을 바로 폈다.
카나리아로부터 아이를 앗아오기 위해 온 것인데 목표는 실패했다.
렉서스가 피식 웃었다.
“황자의 이름은 내리지 않겠다. 아무도 그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지 말라. 레니샤를 제외하고는!”
이것만큼은 클라우드 공작도 막을 수 없었다.
직계 황족의 이름은 황제나 황제가 허락한 자만이 지을 수 있었으므로.
클라우드 공작이 못마땅한 얼굴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황제가 여기서 물러서는 게 어디인가.
렉서스가 몸을 거칠게 돌렸다.
카나리아. 그를 배반한 새에게는 무슨 벌을 줘야 할까.
그의 눈동자가 분노로 빛났다.
진득한 보랏빛으로.
***
“투리엘, 소식은 들었겠지. 클라우드 공작이 카나리아의 궁에 버티고 있다는군.”
“네, 들었습니다. 그 궁에 클라우드 공작의 사병들이 가득하다지요.”
“클라우드 공작이 대놓고 렉서스에게 칼을 빼든 셈이지. 렉서스는 그래도 클라우드 공작을 버리진 않을 거야. 더 이상 잡을 손이 있어야지.”
투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레니샤를 만난 투리엘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간 잘 지내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황궁에 들어가시고 나서는 얼마나 걱정이었는지…….”
투리엘이 이를 갈았다.
레니샤가 헤일린을 구하기 위해서 황성에 들어간다고 할 때는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카시우스가 영 생각이 없는 건 아닌지 루나를 데리고 왔다.
검을 능숙하게 쓸 수 있으니 유사시에 도움이 될 거라고 말이다.
황성은 물론이고 그녀가 만든 드레스에도 어울리지 않는 루나였지만 레니샤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참을 수 있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헤일린도 있었다. 투리엘이 포섭한 자들도 있었고.
“만약 불편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레니샤 님.”
“아니. 지금은 잘 지내고 있어. 루나, 옷을 다 갈아입었니?”
“아, 이거 정말 싫어!”
루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투리엘이 데리고 들어온 자들의 손에 이끌려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루나의 비명에 투리엘의 웃음에 금이 갔다.
“그 드레스가 얼만 줄 알고!”
투리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다른 드레스를 입어보게 해. 전부 다!”
“으아악! 나는 인형이 아니야!”
결국 엉망진창으로 뛰어나온 루나가 고개를 저었다.
황성이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절대로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카시우스에게 속았다.
“루나. 나처럼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니?”
“뭐?”
“네 표정이 딱 그랬는데.”
레니샤가 후후, 웃음을 흘렸다.
미소 지으며 휘어진 분홍빛 눈동자가 루나를 향했다.
루나가 흠칫했다.
레니샤처럼 되고 싶었느냐고?
물론 그랬다.
카시우스가 레니샤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드레스를 입으면 루나도 그렇게 예뻐질 수 있을 줄 알았다. 레니샤보다 더!
“모든 일에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야, 루나. 나처럼 행동하고 말하려면 평생이 걸리지. 네가 검을 잡는 것처럼 나는 이 모습을 이뤄낸 거야.”
“……검을 잡는 게 더 힘들어. 아주 오랫동안 수련해야 한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루나. 평생을 수련했지. 이 손짓, 눈빛.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과 말하는 것까지. 그러니 너도 나처럼 되려면 노력해야지.”
루나가 볼을 부풀렸다.
“그러지 않아도 돼!”
“아니. 내가 필요해졌어, 루나. 이제 삼 일 남았나. 세 뱀 신을 기리는 축제 말이야. 황제는 나를 그곳에 데려갈 생각이지.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기꺼이 참석할 거야. 나를 혼자 보낼 생각이야?”
레니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이번에는 천진한 어린 소녀 같았다.
루나가 이를 바득 갈았다.
루나는 이곳에 오면서 카시우스와 약속했다.
반드시 레니샤를 지켜주겠다고.
어디든 레니샤를 혼자 보내지 않겠다고.
레니샤가 그 자리에 홀로 가게 되면 약속을 어기는 게 된다.
“……아니. 절대로 아니!”
“좋아. 그럼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고르도록 해. 이왕이면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루나가 발을 쿵 하고 구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레니샤가 우아한 모습으로 차를 마셨다.
왠지 말괄량이 동생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꽤 귀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