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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새로운 국면 (87/135)


87화. 새로운 국면
2023.01.27.



 


“황제 폐하, 축하드립니다!”

렉서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어제 마신 술이 속을 진탕 쳐놓는 것 같았다.

레니샤의 침실에서 도망치듯 나오고 나서 술을 더 마셨었다.

머리를 까맣게 태우는 것 같은 분노가 그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무슨 소리야.”

렉서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의 침대를 중심으로 시종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뭘 축하한다고?”

그럴 만한 일이 있었나.

요새 들어 렉서스의 인생은 늪처럼 끈적끈적하기만 한데.

렉서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술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다.

고개를 흔들어도 정신이 드는 것보다는 뇌가 흔들렸다.

어제 마신 술이 넘어오는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뜬 렉서스가 시종장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서 내려왔다.


“……고하게.”

“카나리아 황후 폐하께서 아이를 출산하셨습니다. 히엔트리 황가에 황자님이 태어나셨어요!”

시종장의 격앙된 목소리에 렉서스가 멈칫했다.

아이가 태어나?

렉서스가 손바닥에서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렉서스가 창백한 얼굴로 시종장에게 되물었다.


“카나리아가 아이를 낳았다고?”

“네, 그렇습니다!”

분명히 기쁜 일이었다.

후계가 없던 황가에 후계가 생겼고 렉서스에게 황제로서의 명분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니 말이다.

그런데 기쁘기는커녕 불쾌했다.

무언가 놓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처음 카나리아가 아이를 가졌을 때도 그랬다.

카나리아의 임신 소식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아.’

렉서스가 스스로를 향해 실소를 흘렸다.

이 말도 안 되는 감정의 발로야 뻔했다.

과거 렉서스는 레니샤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꿈꿨었다.

렉서스와 레니샤를 반절씩 닮은 귀여운 아이.

그런 달콤한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고 렉서스와 레니샤 사이는 악화되기만 했었다.

어제처럼.

렉서스가 레니샤를 해치기라도 할 것처럼 경계하던 그녀가 떠오른다.

렉서스를 피해서 달아나기만 하던 레니샤가.

본부인인 황후가 아이를 낳았다는 지금 떠올리는 거라고는 전부인뿐이라니.

스스로의 짓거리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봐도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닌가.


“……누구를 닮았다더냐.”

레니샤를 닮았으면 좋겠다.

그녀를 닮은 분홍빛 눈동자에 따스한 금발을 지녔으면 좋겠다.

레니샤처럼 단단한 아이였으면 좋겠다.


“황제 폐하와 카나리아 황후 폐하를 반씩 닮았다고 들었습니다. 은발에 녹안을 가진 황자님이라더군요.”

렉서스가 눈을 깜빡였다.


“……황자를 레니샤에게 데려다줘.”

“네?”

“황자의 훈육을 레니샤에게 맡기겠다는 말이다. 카나리아가 무엇을 알겠나. 그런 이에게 배우는 것보다 레니샤에게 배우는 것이 나아.‘”

“하, 하지만…….”

시종장의 얼굴이 흐려졌다.

기상천외한 명령을 받은 탓이다.

현부인이 낳은 아이를 전부인이 키우게 하라니.

렉서스만이 할 수 있는 발상이리라.

아무리 창피한 게 없는 황제라지만, 이게 맞나 싶었다.

시종장이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이를 낳고 이제야 몸을 추스르고 있는 카나리아에게 이런 소식을 전해야 한다니.

차라리 도망치고 싶었다.


“……안 가보십니까? 황후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어떤 황후?”

“카나리아 황후 폐하요.”

“하하…….”

렉서스가 비틀거리며 시종들 사이를 걸었다.

속에 든 것이 정말로 넘어올 것 같았다.

레니샤의 발이나 닦던 하녀 제시카가 황후 카나리아가 되었다니.

이만큼 웃기는 희극이 어디 있으랴.

정신을 차릴 때마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곳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렉서스는 그의 이름으로 많은 명령을 내렸는데 개중 반절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렉서스, 렉서스.

계속해서 망하는 짓을 하는 이유는 뭐지?

황위를 이어받은 이후로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 자체가 힘겨웠다.

관의 무게가 렉서스를 짓누르고 있었다.


“레니샤에게 아이를 데려다줘.”

렉서스가 입술을 짓씹었다.


“아이는 레니샤와 함께 보겠다.”

“예, 페하.”

시종장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

카나리아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화사한 은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아이였다.

정확히 렉서스를 반절 닮았다.

카나리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나리아가 한숨 자고 깨어났을 때, 그녀는 바바라와 단둘이 남겨져 있었다.

어제의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카나리아가 아이의 작은 손을 붙든 채로 흔들었다.


“……이 아이는 황제 폐하의 아이야. 바바라, 폐하를 꼭 닮은 것 같지 않니?”

“맞습니다, 황후 폐하.”

“이 아이가…… 다음 대 황제가 될 거야.”

카나리아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었다.

그동안 가져본 적 없었던 모성애가 샘솟는 것 같았다.

카나리아는 버림받은 고아였다.

길거리에서 자랐고 어쩌다 보니 기회를 얻어 입궁했다.

레니샤의 하녀에서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쓸모없다고 여겼었던 노래 실력과 괜히 예쁘장한 외모가 빛을 발했다.

카나리아는 고귀한 황태후가 될 것이다.

이 아이가 자라 무사히 황제가 되고 나면!

그 모든 과정을 클라우드 공작과…….

아이 아버지가 아닌 클라우드 공작과.

카나리아가 뜨거운 침을 삼켰다.

그녀의 마음속에 이런 용기가 숨어 있을 거라고는 스스로도 생각지 못했었다.


“내가 지켜줄게, 아가.”

아이가 태어나고도 오지 않는 렉서스를 대신해서.


“내가 어떡해서든 지켜줄게.”

이 아이는 렉서스의 아이가 아니라 카나리아의 아이였다.

오로지 카나리아의 아이.

카나리아가 바바라에게 명령했다.


“렉서스가 무슨 짓을 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어. 지금 당장 클라우드 공작에게 연락해, 바바라.”

“네!”

바바라가 기쁜 얼굴로 침실을 나갔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바바라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모든 게 뜻대로 될 거라고 믿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바바라가 가지고 온 것은 그리 행복한 소식은 아니었다.


“폐하.”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돌아온 바바라가 고개를 숙였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카나리아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황제 폐하께서 황자님을 레니샤 님한테 보내라고…… 부인이 더 잘 키워주실 거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곧 황제 폐하의 시녀들이 올 거예요.”

카나리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라고?”

“아이를 황후 폐하께…….”

역시 렉서스는 개자식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이 아이는 카나리아의 아이였다.

씨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카나리아의 아이!


“클라우드 공작을 불러와, 얼른!”

“네!”

아이를 낳고 일주일 동안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그 관례를 깬 것은 수호자여야 할 렉서스였다.

렉서스가 반칙이었다.

카나리아가 아이를 안은 채로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

클라우드 공작의 지팡이 소리가 카나리아의 궁을 울렸다.

다행히 클라우드 공작이 렉서스의 시녀들보다 먼저 도착했다.

바바라가 몰래 가서 상황을 살펴보니 렉서스가 숙취를 심하게 앓고 있어 시녀들이 정신없다고 했었다.

흐느적거리며 속에 든 것을 게워내고 열이 바짝 오르고 있다나.

벌 받는 거다.

카나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잘됐다 싶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카나리아는 클라우드 공작을 들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공작. 어서 오시게. 아직은 내 꼴이 말이 아니로군. 양해하시게.”

카나리아가 목숨줄처럼 잠든 아이를 끌어안은 채로 말했다.

누렇게 뜨고 입술은 희었다.

막 아이를 낳은 임산부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카나리아는 공작에 대한 예의로 스스로를 최대한 가다듬었다.


“……괜찮습니다. 품 안에 그분이 바로 황자님이시로군요.”

“맞네. 클라우드 공작, 렉서스가 이 아이를 레니샤에게로 보내려고 해.”

클라우드 공작이 멈칫했다.


“공작이 이 아이를 지켜주게.”

클라우드 공작이 그 순간 떠올린 것은 레니샤였다.

누구보다 관이 잘 어울리는 여자.

렉서스가 이 아이를 레니샤에게 데려가라고 한 것은 오랜만에 잘한 선택이었다.

그 누구도 아이를 건드리지 못하게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클라우드 공작이 독점하는 게 훨씬 좋았다.

카나리아는 그에게로 완전히 노선을 튼 것 같았다.


“제 목숨을 다하곘습니다. 황후 폐하. 이 황자님은 반드시 황제가 되실 거예요.”

“물론, 그래야겠지.”

카나리아가 느리게 중얼거렸다.

잠든 아이의 발간 뺨이 카나리아의 눈시울을 자극했다.


“아버지는 이 아이를 지켜주지 않을 테니 나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나.”

“그렇습니다, 폐하.”

“이 아이는 레니샤에게 가면 안 돼. 그 여자가 뭘 할 줄 알고?”

“맞습니다. 그러니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저와 제 사람들이 항상 이곳에 있을 겁니다. 폐하께서는 황자 전하께만 신경 쓰시면 됩니다.”

클라우드 공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레니샤가 웃음 지었다.


“오랜만에 카나리아가 똑똑했군.”

“우리로서는 불편해진 것 아닌가요?”

“지금 당장으로서는 그렇지요. 클라우드 공작이 황성으로 들어왔으니까. 렉서스가 대단히 화를 냈다던데, 그 아이가 이름이나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레니샤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클라우드 공작이 카나리아와 손을 잡았으니 잘되었습니다. 그 늙은 여우를 함께 쳐낼 수 있게 됐어요.”

“이 일로 클라우드 공작하고 렉서스 황제 사이에 금이 갔을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애초에 두 사람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어요. 서로를 필요로 했을 뿐이지. 클라우드 공작은 천한 핏줄을 타고난 렉서스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렉서스는 그런 클라우드 공작을 증오하니까요. 그들이 손을 잡은 건 철저한 이해관계 덕분이에요.”

카나리아가 클라우드 공작의 사병들을 그녀의 궁에 들였다.

그건 황제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였다.

카나리아는 누군가가 그녀의 아이를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카나리아에게는 친정이 없으니 클라우드 공작의 힘을 빌어야겠다고.

그리고 클라우드 공작은 카나리아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린 황자와 제 손녀의 결혼을 원했다.

모든 것을 틀어쥐려 하고 있었다.

카나리아를 딸로 들여 그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어린 황자와의 결혼으로 미래를 손에 쥐려는 것이다.

지금 이 일에서 레니샤는 그저 방관자였다.


“황제가 분노해서 이름도 붙여주지 않겠다고 했다던데. 아이만 불쌍하게 됐군요.”

게일이 전면에 나섰을 때, 그리고 그녀가 숲지기를 끌어냈을 때 클라우드 공작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된다.

모든 건 운명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레니샤에게 카시우스가 보낸 선물이 도착했다.


“……오랜만이야.”

퉁명스러운 얼굴로 예의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여자가.


“살아 있었네.”

루나가 황성으로 왔다.

이건 또 무슨 바람을 불어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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