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사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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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사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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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사랑하십니까?
2023.01.24.
레니샤에게는 매일 밤 기다리는 작은 손님이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소파에 기댄 레니샤가 미소 지었다. 곧 있으면 카시우스가 도착할 것이다.
카시우스의 그 작은 몸체를 손가락으로 슬슬 쓸고 있으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착각이 일곤 한다.
곧 있으면 세 뱀 신을 축복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 이제 3일. 3일밖에 남지 않았다. 사신단들이 속속들이 항구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레니샤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축제 연회에서 레니샤는 렉서스의 옆에 앉을 생각이었다.
카시우스는 그걸 어떻게 생각할까?
마음 깊은 곳에서 뾰족한 생각이 솟아올랐다.
속상해할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려나. 그게 아니면 렉서스를 향한 질투를 불태울까.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기대감이 솟았다. 레니샤가 입술을 혀로 훑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뱃속에서 피어 오른 더위가 레니샤를 뒤덮었다. 발코니 문을 밀어 열자 바람이 레니샤를 휘어 감았다.
오늘은 귀여운 카시우스를 달래 인간인 모습을 보고야 말 것이다. 레니샤가 새삼 다짐을 다졌다. 그녀가 발코니를 기대감 어린 발걸음으로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레니샤.”
문이 먼저 열렸다. 레니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간에 특히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다.
렉서스가 술기운이 가득한 얼굴로 문가에 서 있었다. 눈동자가 풀린 것으로 보아 약도 먹은 게 분명했다. 그 뒤쪽으로는 하얗게 질린 헤일린이 보였다.
아무도 렉서스를 막아설 수 없었을 거다.
렉서스가 비틀거리며 레니샤에게로 다가왔다. 레니샤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렉서스를 응시했다. 어째 조용하다 했지. 황성으로 다시 돌아온 게 실감이 났다.
레니샤가 한숨을 내쉬고 렉서스를 피해서 뒤로 물러섰다.
“내일 아침에 뵙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
“내가 내 아내의 침실에 오겠다는데 뭐가 문제가 되는 거지?”
렉서스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가락도 약에 취한 듯 흐물거리고 있었다. 레니샤가 경멸스럽게 그 모습을 응시했다.
“저는 더 이상 폐하와 어떤 사적인 관계도 맺고 있지 않습니다. 아내라니요. 저는 로테라 공작 부인이고, 제 남편은 카시우스 공작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폐하께서 무례를 저지르고 계신 상황이 맞습니다.”
레니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예의를 지켜 주세요, 폐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러지 마, 레니샤.”
렉서스가 레니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니샤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괜찮아.’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잖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레니샤가 스스로를 다독였다.
“저야말로 부탁드립니다, 폐하. 이러지 마십시오.”
렉서스가 눈을 깜빡였다. 분간이 잘 되지 않는 시야 너머로 창백한 레니샤가 보였다. 항상 당당하던 분홍빛 눈동자가 공포에 젖어 있었다. 그 눈동자에 비친 스스로가 보였다.
무엇 때문에?
렉서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니샤와 렉서스는 오랜 시간을 부부로 지냈다.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였고, 서로를 이해하지 않았었나. 레니샤는 렉서스를, 렉서스는 레니샤를.
렉서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두 사람이 부부로 보낸 시간이 레니샤가 카시우스와 보낸 시간보다 월등히 길었는데도.
“웃어 줘, 레니샤.”
렉서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카시우스를 마주 보고 환하게 웃던 레니샤의 모습이 자꾸만 렉서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렉서스는 레니샤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어깨를 움켜쥔 렉서스가 내뱉었다.
“웃어!”
레니샤가 몸을 비틀었다.
“놓아주십시오, 폐하.”
“웃으라고 말했잖아.”
단전에서부터 시작된 불꽃같은 분노가 화륵 불타올랐다.
“왜 너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지? 이 세상이 다 내 것인데, 왜 너는……!”
렉서스가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웃어, 레니샤. 내가 명령을 했으면 너는 들어야지. 살살 웃으면서 카나리아처럼 굴어 봐. 내 비위를 맞춰. 발을 핥으라면 핥고, 구르라면 구르고. 말 잘 듣는 개처럼.”
레니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제가 개입니까?”
“뭐?”
“저를 내내 그렇게 여기셨군요. 그러니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나셨던 겁니다.”
레니샤가 렉서스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저를 가족이나 동반자로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에. 폐하께서는 변하는 법을 모르시는 분이니 평생 그렇게 사십시오. 저 같은 거에게 신경 쓰지 마시고, 말 잘 듣고 착한 카나리아에게나 가십시오.”
“변하지 않는 건 너도 마찬가지야.”
렉서스가 이를 갈듯이 말했다.
“나는 황제인데, 항상 너희 로테라에게 짓밟힌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지. 오만하고 간교한 계집. 언제든지 나를 이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는 눈을 하고…….”
렉서스가 레니샤의 턱을 움켜쥐었다. 강한 악력에도 레니샤의 눈빛은 고요했다. 절대로 꺾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레니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렉서스가 무엇을 바라고 이러는 건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렉서스는 레니샤를 견뎌 내지 못한다.
렉서스가 이를 아득 갈고는 고개를 숙였다. 레니샤의 입술 앞에서 멈춰 선 렉서스가 술 냄새가 섞인 숨을 내쉬었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로테라가 싫으신 겁니까, 제가 싫으신 겁니까. 그게 아니면 황제라는 자리가 버거우신 겁니까.”
레니샤가 느리게 말했다. 렉서스의 심장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렉서스는 눈을 홉떴다. 흡사 날카로운 바늘로 가슴을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로테라 앞에 서면 평가당하는 기분이 드시는 겁니까? 숙제를 해 오지 않아 혼나는 어린아이의 심정이 되십니까?”
렉서스의 손이 미끄러졌다.
“칭찬을 해 드리면 됩니까? 잘하고 있다고 얼러 드려요?”
“닥쳐.”
렉서스가 이를 악물었다.
“입을 찢어 버리기 전에.”
“그러신다고 그 마음이 풀리시겠습니까. 차라리 죽이시면 편해질 겁니다. 더 이상 무엇도 폐하를 괴롭히지 못하겠지요.”
레니샤가 차가운 봄날의 눈동자를 렉서스에게 던졌다.
“그걸 바라시는 거라면, 예. 그렇게 하세요. 제가 죽어야 끝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제가 죽고 나면 제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도 멈추시겠지요.”
“…….”
오히려 렉서스가 뒤로 물러섰다. 불안한 얼굴로, 레니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머릿속이 엉켜들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레니샤를 죽인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었나. 몇 번이나 마음먹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다.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폐하.”
레니샤가 속삭였다.
“저를 사랑하십니까? 그래서 그렇게 애정을 갈구하는 얼굴로 저를 보시는 겁니까?”
렉서스가 숨을 멈췄다.
“차라리 사랑해 달라고 말씀해 보세요.”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렉서스의 눈앞이 하얗게 바랬다. 레니샤가 렉서스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형세는 뒤집혔다.
“발밑에 엎드려서 사랑을 구걸해 보세요. 혹시 압니까. 제가 마음이 변해 그렇게 해 드릴지도요.”
그 순간이었다.
레니샤와 렉서스 사이에 끼어든 붉고 매끈한 뱀이 몸집을 키웠다. 슈르륵. 새빨간 혀를 내보인 뱀이 아가리를 벌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금빛 눈이 번뜩였다.
‘카시우스!’
다시 공기가 변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밀린 채로 뒤로 물러섰다. 어디서부터 들은 거지?
레니샤는 눈가를 문질렀다. 오늘은 왜 이렇게 타이밍이 좋지 않은 건지. 렉서스를 몰아내고 나서 카시우스가 돌아왔다면, 계획했던 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카시우스가 렉서스를 위협했다.
정말 다행인 것은, 히엔트리에서는 뱀을 죽일 수 없었다.
렉서스의 표정도 변했다. 감정으로 휘몰아치던 표정이 가라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렉서스가 입술을 열었다. 레니샤가 긴장감에 숨을 삼켰다.
“빌어먹게 애달픈 사랑이로군. 사랑이라고 말했나, 레니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렉서스가 눈을 치켜떴다.
“나는 너를 증오해. 죽도록 증오해! 널 죽이지 못하는 나를 증오하고, 너를 버리지 못하는 나도 증오한다. 왜 내 앞에 나타나 나를 구했나. 그대로 죽게 뒀어야지!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 가두지 말았어야지. 그 문을 열지 말았어야지! 굶주린 놈에게 온기를 나눠 주지 말았어야지! 인간의 감정이 뭔지도 모르던 버러지에게 왜 그랬나!”
렉서스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카시우스 너머로 렉서스가 레니샤를 빳빳하게 응시했다.
“그러니 모두 다 네 탓이다. 로테라가 죽은 것도 네 탓이고, 너와 내가 반목하고 있는 것도 네 탓이고, 지금 이 모든 것도 네 탓이야!”
그래서 같이 불행 속에 서 있잖아. 레니샤가 비릿하게 웃었다.
“문을 열지 말았어야 했는데.”
레니샤의 나긋한 말에 렉서스가 어정쩡하게 굳었다.
“하…….”
“구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차가운 사형 선고였다. 렉서스의 지질하고 강렬한 고백은 단번에 내쳐졌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약 기운이 전부 증발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렉서스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방을 빠져나갔다. 폭풍이 휩쓴 것처럼 날 선 분위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시종장이 허둥거리며 문을 닫았다. 그러자 카시우스가 거대한 몸통을 움직여 레니샤의 주변을 감쌌다.
카시우스는 고개를 치켜든 채로 레니샤를 응시했다.
“……괜찮아요.”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카시우스.”
그제야 굳어 있던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바닥에 코를 댔다.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카시우스가 응답하듯 고개를 비볐다.
아무것도 아니다.
렉서스는 레니샤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정말로? 잔뜩 지친 얼굴로 레니샤가 느리게 웃었다.
“나 좀 안아 줘요. 여기는 너무 춥고 어두워.”
카시우스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명령이었다.
망설임과 부끄러움을 거두고 카시우스가 인간으로 돌아왔다. 헐벗은 그를 보고는 레니샤가 옅게 웃었다.
“이래서 부끄러워했구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향해 팔을 뻗었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몸이 레니샤를 안았다.
레니샤가 그 품 안에 고개를 떨궜다.
“잠시만 이렇게 있어요. 잠시면 돼요.”
***
늦은 밤, 운명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나리아의 산통이 시작되었다.
두 달이나 이른 진통이었다. 황궁의들은 초조한 얼굴로 그녀의 궁 앞을 서성였다.
모두의 초점이 이곳에 맞춰져 있었다.
황제의 시종장도 계속해서 카나리아의 방을 오갔다.
“아아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 산파와 의사의 다급한 목소리. 그에 뒤섞인 아기의 울음소리.
마지막으로.
“황자님이십니다! 아드님이 태어나셨습니다!”
격앙된 고함이 방문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모여 있던 모두에게 들렸다. 카나리아가 무사히 황자를 낳았다. 이 소식은 새벽 내 제도를 향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