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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나락으로 굴러가는 운명 (85/135)


85화. 나락으로 굴러가는 운명
2023.01.20.



“더 이상은 못 하겠소!”

멈춘 마차 문을 열어젖힌 마부가 모자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헨리가 입술을 잘근 물었다.

그가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더듬더듬 움직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지금 애석하게도 헨리가 기댈 수 있는 건 지난 며칠간 동행한 저 남자뿐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서 도망쳤길래 사방에서 쫓아오느냔 말이오! 내가 아무리 돈을 받고 일한다지만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거였소?”

“위험수당을 쳐주겠네. 약속한 돈의 배 이상을 약속하지.”

헨리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적힌 주소로만 데려다주면 돼!”

“무슨 원한을 샀길래 이 난리인지는 알아야겠소. 대체 왜 쫓기는 거요?”

남자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쫓기는 자들에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위험한 일에 얽히고 싶지는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헨리에 대한 연민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단한 의리가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걸 꼭 알아야겠나? 위험해질 일은 없을 걸세. 그 주소에 무사히 도착만 한다면 말이야!”

헨리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로테라 공작가에 쫓기고 있다는 걸 알면 마부가 손을 털고 떠날 것 같았다.


“지금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죽자 살자 쫓아오는데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힘들단 말이오! 나는 이제 그만하고 싶소. 그래도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을 이런 숲에다 버릴 수는 없으니 인근 마을까지는 데려다주겠소. 그다음은 알아서 하시오!”

마부가 문을 거세게 닫았다.

헨리의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눈이 안 보이고 이런 꼴이 되니 이렇게까지 무시를 당한다.

이게 전부 다 레니샤 때문이다.

그 여자가 황성에서 쫓겨나지만 않았어도.

황제에게 조금만 굽혔다면 그런 일이 벌어졌겠는가.

황제가 말은 안 해도 레니샤를 마음에 담고 있었는데.

모든 것을 레니샤의 탓으로 돌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헨리가 욕설을 짓씹으며 주먹으로 의자를 내리쳤다.

여기에서 붙잡히고 나면 모든 게 도루묵이 된다.

최소한 브릭스턴과 헤일린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헨리가 복수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헨리가 흐릿한 형체만 보이는 눈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제기랄!”

덜컹거리며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헨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왠지 더 나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만 든다.

***

결국 마부는 헨리를 두고 떠났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길에 버려졌을 때 헨리는 한 가지를 결심했다.

어차피 죽게 될 거라면 어떻게서든 복수는 해야겠다고.

그 복수의 방법이 더럽고 치사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레니샤의 마음을 찢어놓으면 그것으로 족할 것 같았다.

헨리는 길거리에서 심부름하는 아이를 구했고 그 손을 빌어 새로운 목적지로 향했다.

황제가 헨리의 복수를 대신해주지 않는다면 또 다른 사람을 구해야지.


“여기가 용병을 살 수 있는 곳이오?”

헨리가 최대한 고개를 꼿꼿하게 치켜세우고 당당하게 말했다.

가게 안에 있던 거친 행색의 남자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헨리를 부축하고 있던 아이가 몸을 움츠렸다.

이런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곳에 온 건 아이도 처음이었다.

헨리가 아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어깨를 움켜쥐었다.


“의뢰할 일이 있어서 왔소.”

“돈이 있어야 할 텐데? 우리를 사는 데 드는 돈은 비싸.”

헨리가 이를 악물었다.

그간 헨리가 모아둔 돈을 물처럼 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별다른 미련이 없었다.

헨리에게는 건사해야 할 가족도 없었고 그 한 몸만 지킬 수 있으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그조차 잃었으니 돈을 길바닥에 뿌린다고 해도 헨리가 목적한 바를 이룰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헨리가 오기 전에 은행에 들러 찾아온 돈의 일부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이 정도 돈이면 되겠소?”

남자들이 묵직한 주머니를 확인했다.


“……무슨 일을 의뢰하려고 이만한 돈을 들고 오셨나, 그래.”

“사람 하나를 죽여줘야겠소.”

“흐이익!”

헨리에게 붙들려 있던 아이가 비명을 질렀지만, 헨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떠는 아이를 용병들이 힐끗 응시했다.

길거리에서 사는 아이 같았는데 돈 몇 푼 벌겠다고 이곳에 끌려온 것 같았다.

그들이 알 바는 아니었지만.


“우리 같은 자들은 받은 만큼 일하지. 대가를 지불했으니 바라는 바를 명확히 말하시오. 죽여줬으면 하는 게 누구지? 이 꼬맹이는 아닐 테고.”

“힐로샤인의 성에 살고 있는 요만한 꼬맹이요. 나이는 13살쯤 되었고 이름은 이사벨라. 이사벨라 로테라가 이름이지.”

“귀족 아이를 죽여달라는 거요?”

“성공만 한다면 이 돈의 2배를 더 주지. 이건 그냥 착수금이야.”

헨리가 날카롭게 눈을 번뜩였다.

가장 귀한 것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을 반드시 느끼게 해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헨리는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자들을 위해서.


 

***

클라우드 공작이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였다.

그를 찾아온 귀한 손님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건 클라우드 공작의 엉덩이뿐만이 아니다.

클라우드 공작가의 문 또한 그만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집사장이 문을 열어주었을 때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황후 폐하?”

아무리 바깥출입을 삼가고 있다고는 하나 여자의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새로 즉위한 황후, 카나리아였다.

삐쩍 마른 카나리아는 배만 둥그렇게 부풀어 있는 기형적인 모습이었다.

카나리아는 어딘가 주눅 들어 보였고 그 옆에 서 있는 시녀가 오히려 더 기세등등해 보였다.

클라우드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카나리아에게 자리를 권했다.


“귀한 걸음을 해주셨군요. 저를 찾으셨다면 직접 찾아뵈었을 것을요.”

“……아니오, 공작. 부탁할 게 있는 사람이 움직여야지.”

“부탁이라…….”

“나를 살려주시오, 공작.”

카나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황성에는 레니샤가 돌아와 있소. 그 악독한 여자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몰라!”

대뜸 던져진 말에 클라우드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감정을 대놓고 표출하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무형적인 것들은 은밀하게 감출수록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레니샤 님이 황성으로 들어가신 것은 알고 있으나 그건 황제 폐하의 뜻에 따른 일. 그분이 황후 폐하께 무슨 짓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카나리아가 파르르 떨었다.

레니샤가 아무것도 못 한다고?

그 여자는 사막에 던져놔도 악귀처럼 살아 돌아와서 카나리아의 목을 조를 여자였다.

레니샤가 정말로 카나리아를 용서했다면 그날 그렇게 바바라를 데려가서는 안 됐다.

카나리아의 비밀을 실토할 때까지 식사를 굶겨서도 안 됐다.

결국 레니샤는 카나리아의 목줄을 움켜쥐지 않았던가.

레니샤는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건가? 레니샤가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말이야!”

“글쎄요. 그분의 마음은 저도 알 수 없는지라.”

“나는 지금 내 아이를 황제로 만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야.”

카나리아가 뒤를 힐끔 보았다.

바바라가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바라는 클라우드 공작이 마지막으로 남은 끈이라고 강조했었다.

이것마저 놓치고 나면 카나리아에게는 무엇도 남지 않는다고.

카나리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나는 자네가 그렇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네.”

“……순리대로라면 황제 폐하의 핏줄이 황위에 오를 겁니다.”

“나는 순리를 말하는 게 아닐세!”

카나리아가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나는 순리를 거스르고자 하네. 나는 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황제가 되길 원해. 이 아이가 나를 지켜줄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다는 말일세!”

클라우드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카나리아가 불안한 얼굴로 찾아왔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황제가 자신의 아이를 가진 황후를 박대한다는 이야기는 귀족들 사이에도 퍼져 있었다.

황제가 정말로 미쳤거나 이상한 성벽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돌고 있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클라우드 공작은 히엔트리의 핏줄이 황위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 부류였다.

그 법칙이 깨어지면 혼란이 야기된다.

이 거대한 제국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이다.

클라우드 공작이 턱을 쓸었다.

목적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카나리아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아이를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목숨을 도모하겠다는 것 아닌가.

황제의 아이를 데리고 외국으로 도망가는 것보다 이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황실에서 아이를 포기할 리 있겠는가.

그렇다면 클라우드 공작이 고려해야 할 것은 이 전쟁에 뛰어들 가치가 있느냐다.

순리대로 기다려도 아이를 지켜내기만 한다면 무사히 황제가 될 것이다.

같잖게 날뛰는 레니샤도 그때가 되면 수그러들 수밖에 없을 거였다.

굳이 아이를 지금 황제로 만들고 렉서스를 죽여야 한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정확히는 클라우드 공작이 그를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황후께서는 거래의 기본이 무엇인지 모르시는 것 같군요.”

“아닐세! 만약, 내 아이가 황제가 된다면 그대의 딸이나 조카, 혹은 손주를 황후로 삼겠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식을 치러도 상관없네!”

카나리아가 얼른 준비해온 패를 꺼내들었다.

외국으로 도망가는 일을 포기하고 클라우드 공작가로 찾아왔을 땐 그만한 각오를 한 상태였다.

바바라의 제안에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그다음에는 더한 유혹이 카나리아를 찾아왔다.

그녀가 꿈꿨던 대로 황제의 어머니가 되는 거다.

그 누구도 카나리아를 꺾지 못하리라.

고고한 레니샤도 카나리아가 바란다면 그 궁을 내놓아야 할 거다.

달콤한 유혹이 공포를 이겼다.

클라우드 공작이 간절한 카나리아를 보며 실소를 흘렸다.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클라우드 공작이 덧붙였다.


“로테라 공작이 가지고 있었던 병권. 그것을 제게 주십시오.”

근본 없는 노예 기사가 가지고 있는 그 병권이 탐났다.

그 힘만 있으면 황제와 카나리아, 그리고 이 제국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무를 수 있을 것이다.

선대 로테라 공작만 보아도 그 힘으로 렉서스를 황제로 만들지 않았던가.

딸을 위해서 그 힘과 함께 자멸한 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아이는 다시 낳을 수 있지만, 목숨과 권력은 아닐 텐데 말이다.


“이것도 약속해주신다면 바라시는 일을 해보도록 노력하지요.”

클라우드 공작이 숨기고 있었던 야심을 드러냈다.

늘그막에 귀한 걸 손에 넣을지도 모르겠다.

히엔트리를 흔들 수 있는 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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