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길
(84/135)
84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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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길
2023.01.17.
작은 뱀의 몸뚱이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 몸으로 변하는 건 생각보다 더 불편했다.
크기가 작다 보니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짧았다.
‘좀 더 크게 변할 걸 그랬나.’
카시우스가 작은 혓바닥을 내밀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그랬다가는 엄한 눈에 띄어서 험한 꼴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붉은 비늘은 사람들 눈에 띄기 쉬웠다.
카시우스가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그를 기다리는 이가 있을 것이다.
카시우스가 작고 앙증맞은 꼬리를 열심히 움직였다.
‘아!’
키엔이 약속대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대뜸 키엔의 다리를 휘어 감았다.
“으아악!”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키엔이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다리를 스멀거리며 기어 올라오고 있는 붉고 작은 뱀이 보였다.
“……가, 각하!”
키엔이 목이 졸린 목소리로 외쳤다.
“기척이라도……, 아니. 말씀이라도 하시고……. 아니!”
키엔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
생각해보니 지금 카시우스는 말을 하거나 인기척을 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카시우스가 불만스럽게 혀를 낼름거렸다.
그다음 작은 몸으로 키엔의 목을 휘어 감는 것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커흠! 아무튼 놀랐다는 말입니다…….”
카시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스스로 인간의 몸으로 변해서 홀로 움직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문제는 인간으로 돌아올 때였다.
뱀은 비늘 말고는 무엇도 몸 위에 걸치지 않는 동물이었다.
그에 반해서 인간은?
인간은…… 반드시 몸에 무언가를 걸쳐야 하는 동물이다.
뱀하고는 한참 달랐다.
그런 차이가 있다 보니 인간으로 돌아올 때 약간의 문제 사항이 있었다.
‘큼.’
카시우스가 키엔의 몸에 착 달라붙은 채로 고개를 늘어뜨렸다.
구시렁거리면서 숲에 숨겨둔 말을 찾아 올라탄 키엔이 출발했다.
빠르게 카시우스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그의 부끄러움을 감춰주었다.
레니샤는…… 레니샤는 아무것도 모른다.
‘카시우스. 인간으로 변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인간으로 돌아오는 게 더 이야기 나누기 편한 거 아닌가요?’
정말로 레니샤는 아무것도 모른다…….
‘음. 혹시 보여주면 안 되는 건가요?’
그 말간 눈동자 앞에서 흉한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카시우스가 몸을 배배 꼬았다.
그때의 부끄러움이 지금도 그를 붉게 물들이는 듯했다.
지금은 그의 비늘이 붉은색이라 정말, 정말 다행이었다.
카시우스가 나부끼는 바람에 그를 맡겼다.
‘레니샤, 당신은…… 바보야!’
***
레니샤가 카시우스가 떠난 발코니에 꽤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이런 깜찍한 생각은 카시우스밖에 하지 못하리라.
그 작은 몸뚱어리를 배배 꼬던 것이 아직도 눈에 밟힌다.
레니샤가 웃음기가 만연한 입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고작 몇 시간 만에 카시우스는 레니샤의 기분을 바꿔놓았다.
마치 마법사처럼.
카시우스에게 인간이 되어보라고 종용할 때마다 눈을 휙 하고 피하던 게 얼마나 귀엽던지.
“요조숙녀 같으니라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작은 혀만 날름거리던 것도 기억에 남았다.
카시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레니샤는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인간으로 돌아오면 아마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겠지.
요조숙녀 카시우스라면 충분히 부끄러워하고도 남았다.
레니샤와 카시우스는 너무 다른 부류였다.
레니샤였다면 오히려 그 사실을 이용해서 카시우스를 놀려 먹었을 텐데.
카시우스는 반대로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말고 숨어버렸다.
레니샤가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덕분에 우울함이 전부 날아가 버렸다.
카시우스 덕분에.
***
카시우스가 키엔과 루나를 불러들였다.
이족들과의 소통으로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던 이들이었다.
카시우스는 어제 다녀온 궁이 텅 비어 있었던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레니샤는 그곳에 혼자 있는 것이다.
물론, 헤일린과 함께 있긴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검이라고는 잡아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유사시에 몸을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나. 네게 부탁할 게 있어.”
키엔이 루나를 힐끗 보았다.
루나는 익살맞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필이면 왜 루나에게?
“한 번 들어나 보지.”
이제는 카시우스와 루나의 신분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절대로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키엔은 루나를 알 수가 없었다. 쟤는 왜 저렇게 제멋대로지?
“황성에 들어가서 레니샤의 곁에 있어 줄 수 있겠어?”
“뭐?”
그리고 그 여유도 레니샤의 이름 앞에서 깨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황성엘 왜 들어가? 그 거지 같은 핏줄이 흐르는 곳에 내가 왜? 이족들이 살아 돌아오기 전에는 절대로 그럴 일…….”
“이족들을 위한 일이기도 해.”
카시우스가 루나의 불평을 잘라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나는 내 운명과 함께 이족들의 운명을 레니샤에게 걸었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레니샤를 지키는 일이야. 그런데 지금 레니샤가 그 넓은 궁에 혼자 있어. 그 누구도 레니샤를 지켜주지 못하지.”
“……지금 네 여자를 나한테 떠넘기겠다는 거야?”
“황후궁에 머물 수 있는 건 여자뿐이야.”
카시우스가 날카롭게 말했다.
레니샤가 다시 황후궁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카시우스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당장 렉서스에게 달려가서 그 예쁘장한 머리를 똑 하고 꺾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감히, 레니샤를 다시 그곳으로 밀어 넣다니.
광기에 미친 렉서스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레니샤, 그 여자에게 가라고?”
루나가 자신을 손가락질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하…….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루나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헤집었다.
루나가 눈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카시우스를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결한 얼굴이다.
그렇다고 카시우스를 거역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족들의 수장은 카시우스에게 굴복했다.
원래 운명대로 히샴인 카시우스에게 이족들의 권리를 넘겼다.
그랬기 때문에 이족들이 카시우스의 영지인 힐로샤인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카시우스는 루나의 새로운 수장이 되었으니 루나는 그의 명을 따라야 했다.
“루나. 해줄 거지?”
카시우스가 무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루나가 이를 악물었다.
“무슨 수로 황성엘 들어가라는 건데?”
“그건 도와줄 사람이 있어.”
“……알았어. 그냥 들어가서 그 여자 옆에 있으면 되는 거잖아.”
“루나.”
카시우스가 낮은 목소리로 루나를 불렀다.
불만스럽게 바닥을 발끝으로 툭툭 치던 루나가 고개를 힐끗 들었다.
“무례하게 굴지 마. 마지막 경고야.”
루나의 눈가가 와락 일그러졌다.
루나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형의 힘에 그녀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안 그러면 되잖아!”
루나가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괜히 쿵쿵거리며 가는 그 모양새에 키엔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루나를 안으로 들여보내려고 하시는 겁니까?”
“자네하고 그 긴 거리를 오갔다는 건 그만큼 체력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검투사로 살았던 과거도 있으니 분명 검술도 뛰어날 거야. 레니샤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해. 내가 내내 곁에 있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자네가 루나를 투리엘에게 데려다주게.”
“……예, 각하.”
키엔이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그런데 정말 눈치가 없으시네요.”
“뭐?”
카시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키엔이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또 어디 가서 숨어 있으려나.
루나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살쾡이와 다를 게 없었다.
매번 불만이 생기면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카시우스만 보면 유독 퉁퉁거리는데 그걸 당사자는 알아주질 않는다.
물론, 카시우스가 그걸 알아준다고 해서 뭔가 대가가 있을 것도 아니지만…….
카시우스는 절대로 레니샤가 아닌 여자에게 여지를 내어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깜냥도 없고…….
키엔이 레니샤를 떠올리고는 부르르 떨었다.
루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을 상대로 골랐다.
키엔이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차고는 루나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루나! 루나! 어딨어!”
미운 정도 정인지. 그러고 나갔다고 또 신경이 쓰인다.
“베이커리 가서 너 좋아하는 빵 사줄게! 케이크 먹으러 갈까? 야!”
키엔의 목소리가 좀 더 커졌다.
저택의 나무 위에 숨은 루나의 귀에 닿을 때까지.
***
며칠 내내 방에서 나오지 않는 이사벨라 덕분에 힐로샤인 성은 먹구름에 휘어 감겼다.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온 이후로 항상 활기가 넘쳤던 성이 오랜만에 어둠 속에 잠긴 것이다.
굳게 닫힌 문을 대치하고 선 브릭스턴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이사벨라를 대하는 일이다.
납치당한 헤일린에 대한 걱정과 헨리를 추격하는 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그것보다 더한 걱정거리가 이사벨라였다.
브릭스턴도 사춘가 꼬마 숙녀를 키우는 일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저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나.”
“……지금 저한테 떠넘기시는 겁니까?”
테리언이 뒤로 물러섰다.
마치 대단한 적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브릭스턴을 노려보는 통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면 내가 불구대천 원수라도 되는 줄 알겠군.”
“방금 딱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테리언과 브릭스턴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부수지 못할 문이 없는 장정 둘이서 나무 문 앞을 서성거렸다.
마침내 브릭스턴이 심호흡하고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이, 이사벨라? 이사. 안에 있니?”
“…….”
“아빠가 이 문을 좀 열어도 될까?”
브릭스턴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흐윽……. 허어엉…….”
그리고 동시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브릭스턴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브릭스턴의 떨리는 눈동자와 테리언의 눈이 마주쳤다.
“오늘도 안 되겠지?”
“아무래…….”
테리언이 말을 끝맺기 전이었다.
며칠 동안 꿈쩍도 하지 않던 문이 열리고 이사벨라가 달려 나왔다.
브릭스턴의 다리에 매달린 아이가 울먹이며 두서없이 말했다.
“어, 엄마는 괜찮아요? 유모는요? 다 괜찮은 거예요?”
브릭스턴이 놀란 얼굴로 굳어 있다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이사벨라를 납치하려던 범인들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사벨라를 지키는 과정에서 두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유모와 헤일린.
유모는 이사벨라를 대신해서 칼을 맞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며 헤일린은 황제의 손에 사로잡혔다.
결국, 브릭스턴은 누구도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브릭스턴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 괜찮을 거야, 이사. 아빠가 모두 지켜줄 거야. 약속하마.”
브릭스턴이 뒤늦은 맹세를 했다.
굵은 눈물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이사벨라의 울음소리가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