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카나리아의 새로운 결정
(82/135)
82화. 카나리아의 새로운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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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카나리아의 새로운 결정
2023.01.10.
새하얀 제복에 붉은색 휘장, 흩날리는 은발 사이로 렉서스를 뜻하는 보랏빛 눈동자가 빛났다.
붉은 단 위에 선 렉서스는 고귀하고 동시에 천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레니샤가 그 앞에 느리게 무릎을 꿇었다.
그 누구도 잃지 않기 위한 결정이다.
‘후회하지 않아.’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렉서스 앞에 무릎을 꿇는 것 또한 조금도 치욕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이거 한 번으로 헤일린을 구해 낼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였다.
레니샤는 그녀의 무릎에 싼값을 매겼다.
목숨값에 비해서는 한없이 싸다고.
“황제 폐하.”
“잘 왔어, 레니샤.”
렉서스가 미소 지었다.
“나는 알고 있었어. 네가 나한테 돌아올 거라는 걸 말이야.”
마치 헤어졌었던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다정한 어투였다.
렉서스가 단을 내려와 레니샤 앞에 무릎을 굽혔다.
레니샤의 턱을 들어 올린 렉서스가 이어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될 거였던 거지. 레니샤. 우리는 운명 공동체나 다름없어. 한배에 탄 사이나 마찬가지지. 네가 나를 아무리 버리려고 해도 운명은 우리를 이렇게 묶어 놓고야 말아.”
렉서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레니샤에게 가까이 다가간 렉서스가 부드럽게 입술을 스쳤다.
레니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숨길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봄꽃이 얼어붙고 레니샤의 눈동자에 차가운 경멸이 서렸다.
얼음처럼 렉서스를 쏘아보는 눈빛 앞에서 렉서스 또한 얼어붙었다.
카시우스 앞에서는 꽃처럼 피어나던 레니샤가…….
“내가 뭐가 다르지?”
돌변한 렉서스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그 노예 놈이 나보다 나은 게 무엇이지, 레니샤? 고작 노예다. 네 발끝에도 못 미치는 신분이지. 그런 놈을…….”
레니샤가 렉서스로부터 물러섰다.
“저를 끌어내리신 분은 황제 폐하셨으니 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로테라는 한순간에 반역자의 가문이 되었고 레니샤 로테라는 더러운 탕부가 되어 쫓겨났지요. 그러니 제게는 노예가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레니샤!”
표독스러운 말에 렉서스가 하얗게 질렸다.
벌떡 일어난 렉서스가 그 앞을 서성거렸다.
“레니샤, 너는 황후다. 내가 인정한 황후고 대륙이 떠받드는 유일한 여자지. 그런 네가 어떻게 노예하고 같다는 거냐! 나를 놀리기 위함이지?”
“그럴 리가요, 폐하. 제가 어찌 감히 폐하를 우롱하겠습니까.”
렉서스가 하는 짓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점점 미쳐가는 게 눈에 보인다.
감당도 하지 못할 걸 삼켰으니 탈이 날 수밖에.
레니샤가 나긋하게 말했다.
“모든 건 황제 폐하께서 안배하신 대로입니다. 저는 미천해졌고 폐하께서는 여전히 고고하시지요. 그러니 이렇게 간청합니다.”
레니샤가 고개를 숙였다.
바닥을 향하고 있는 눈동자가 살의로 번뜩였다.
렉서스를 눈앞에 두니 가라앉아 있었던 감정들이 수면을 뚫고 튀어 올랐다.
생생한 생명력을 가득 품은 채로.
렉서스의 심장에 칼을 꽂아.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걸?
놈의 목을 따는 거야.
지금이 기회 아니겠어?
레니샤의 악의들이 속살거렸다.
충동적으로 행동했다가는 그녀를 노리는 짐승들에게 빌미를 줄 뿐이다.
렉서스의 정통성을 지지하는 세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황실의 군대 또한 황실의 인장을 따르지 명분을 따르지 않는다.
변절하고 레니샤의 손을 잡은 이들도 많았지만, 아직도 많은 세력이 잔존해 있었다.
렉서스가 아닌, 히엔트리 황실이 쌓아온 것들이었다.
그러니 레니샤는 완전한 찬탈에 성공해야 한다.
렉서스의 지지자들을 꺾은 채로.
그들을 발밑에 두고 나서야 레니샤는 황제가 될 수 있으리라.
레니샤는 렉서스와 그녀가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모두에게!
“헤일린을 돌려주십시오. 로테라가 복권되어 이미 죄인의 굴레는 벗었습니다. 그 또한 황제 폐하의 덕 아니겠습니까.”
렉서스가 멈춰 섰다.
“헤일린 로테라?”
“데리고 있다는 거 압니다. 바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황성에 머무르라 하신다면 머무르고 떠나라 하신다면 떠나겠습니다.”
레니샤가 순종하는 것처럼 말했다.
모든 것을 손에 넣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으면서.
레니샤가 스스로의 모순에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모든 게 기만이었다.
“……네게 궁을 내어 줄 거다, 레니샤. 너는 나와 함께 가는 거야. 내가 죽으면 죽고, 내가 살면 너도 산다.”
렉서스가 보좌관에게 손짓했다.
그의 분노가 새파랗게 빛났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레니샤를 가지지 못한 자의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내 말대로 기록해 둬. 내가 죽으면 레니샤도 함께 무덤에 묻히는 거다. 알겠느냐?”
“……예, 폐하.”
레니샤가 비릿하게 웃었다.
추잡한 자식.
***
시종장이 직접 레니샤를 안내했다.
“레니샤 님. 이곳입니다.”
시종장이 레니샤를 흘깃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게.”
“……헨리 시종장이 제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황제 폐하께서 헨리 시종장을 다시 데리고 오시면 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헨리는 줄을 잘못 잡은 죄로 다시는 황성으로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었거든. 황제는 자네가 아니라 헨리의 처우를 고민하게 될 거야.”
레니샤가 시종장을 스쳐 궁 안으로 들어갔다.
미친놈이 아닌가.
렉서스가 레니샤에게 내어 준 건 황후의 궁이었다.
카나리아가 그토록 탐냈었던 곳.
한동안은 카나리아의 것이 되었던 곳.
“여기를 카니라아가 순순히 내놓았나?”
시종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으로부터 많은 것을 읽어 낸 레니샤가 혀를 내둘렀다.
렉서스의 미친 짓은 정말 못 따라잡겠다.
침실 안에는 헤일린이 레니샤를 기다리고 있었다.
멍으로 얼룩진 얼굴이었다. 레니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레니샤.”
“……헤일린.”
레니샤의 눈동자에 빗금이 갔다.
꾹 눌러 참고 있었던 감정들이 목 끝까지 넘실거렸다.
레니샤는 그녀가 잘 참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여태 렉서스를 참아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인내심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나 보다.
렉서스는 자꾸만 레니샤의 사람들을 해친다.
그 악만 뿌리를 뽑아 버리면 모든 것이 해결될 텐데 손에 잡힐 듯 잡히질 않는다.
레니샤가 입술을 욱여 물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레니샤. 나는 괜찮으니까.”
“이게 대체 어떻게…….”
“영광의 상처지. 이번에는 이사벨라를 구해 냈으니 말이에요.”
헤일린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만약 헤일린이 자처하지 않았다면 이사벨라가 대신해서 이 꼴을 당했을 것이다.
“정보가 새어 나갔어요, 헤일린. 배반자가 있었어요.”
레니샤가 들끓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제가 영 멍청한 건 아니었어요. 캘리엇 백작 곁에 간첩을 심어 두었고 게일이 캘리엇 백작의 자리를 차지했고……. 캘리엇 백작은 죽었고 게일은 이사벨라를 팔았지.”
“…….”
헤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은 길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레니샤. 나는 내가 이사벨라를 구해 냈다는 걸로 만족해요.”
“……렉서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예요.”
레니샤를 옭아매기 위해서 황제는 무엇이든 할 것이다.
헤일린 뿐일까.
놈은 이사벨라와 브릭스턴도 그 손으로 쥐려고 들 것이 뻔했다.
레니샤를 향한 렉서스의 비이상적인 집착은 날이 갈수록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레니샤가 테이블을 짚었다.
레니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많은 것을 걸었다.
레니샤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이 일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레니샤는 그녀의 목숨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목숨도 어깨에 이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오래 걸리지 않을게요.”
렉서스가 힐로샤인에 닿기 전에.
놈이 기어이 선을 넘기 전에.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헤일린이 레니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
카나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빗었다.
간신히 손에 넣었던 것을 다시 빼앗겼다.
카나리아는 허울뿐인 황후였다.
모든 정황이 레니샤를 황후로 지목하고 있었다.
황후의 궁 또한 레니샤의 몫으로 돌아갔고 사신단 또한 레니샤가 맞이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카나리아에게 남은 것은 바바라와 이 낡아빠진 궁, 마지막으로 아이뿐이었다.
“내가 이러려고……. 이러려고…….”
카나리아가 배를 쥐어뜯었다.
“카나리아 님!”
“이 배 속에 든 게 정말로 나를 지켜 주긴 하는 거야? 내 꼴을 봐, 바바라. 기어이 다시 쫓겨난 꼴을 보라고!”
“……아직 그래도 황후시잖아요. 할 수 있는 걸 하셔야지요. 이대로 포기하실 거예요?”
“어차피 도망칠 거 아니었어? 아이는 낳아서 뭐 해!”
카나리아가 제 배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헉헉거리며 눈물을 터뜨리는 카나리아를 바바라가 차갑게 응시했다.
카나리아의 마음은 너무 여리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바뀌고 있었다.
아이를 낳을 때가 다가오니 두려움도 함께 카나리아를 좀 먹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럼 제게 주세요.”
“뭐?”
“제가 황자 전하를 황제로 만들어 볼게요.”
바바라가 악독하게 말했다.
“황후 폐하는 우리가 준비한 대로 도망치시는 겁니다. 저는 황자 전하를 데리고…….”
바바라가 한 자리를 맴돌았다.
황제를 지지하는 이들이 쫓는 건 허울뿐인 핏줄이었다.
그들이 렉서스를 지지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히엔트리의 고유한 정통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 아이는 렉서스의 아이로 태어날 예정이다.
의원은 이미 조산기가 보인다고 말했다.
예정일보다 훨씬 일찍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그리고 아이의 몸에도 정통성이 흐른다.
사람들은 아이를 렉서스의 아이로 믿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렉서스를 지지하는 가장 큰 세력은…….
“제가 황자 전하를 데리고 클라우드로 갈게요.”
“네가?”
“네.”
바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무엇을 못 하겠는가!
클라우드 공작가라면 아이를 황제로 만들어줄 수 있었다.
“레니샤하고 손을 잡는 건? 그쪽이 더 빠르지 않겠어? 레니샤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되잖아.”
“황후 폐하. 황제가 힐로샤인을 공격했어요. 공식적인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황성으로 끌려와서 고문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그런데?”
“레니샤가 황제의 핏줄을 황제로 만들려고 할까요?”
“아…….”
카나리아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수척해진 카나리아의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화하는 이 정글 같은 곳에 카나리아는 적응하기가 너무 힘겨웠다.
카나리아의 노래도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손에 쥐려고 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흐릿해진다.
“그러니 클라우드 공작에게 갈게요. 공작은 꼬장꼬장한 늙은이에요.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고 믿죠. 렉서스 황제께서 어떻게 되시더라도 클라우드 공작이 황자 전하를 황제로 만들어 줄 거예요.”
바바라가 카나리아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덴버스 후작은?”
“덴버스 후작도 클라우드 공작의 아래잖아요, 폐하. 우리는 가장 큰 힘과 손을 잡아야 해요.”
카나리아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배를 감싼 카나리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