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어쩌면 내가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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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어쩌면 내가 당신을
2023.01.06.
레니샤가 입술을 감쳐물었다.
인생은 방심하게 두지 않는다.
레니샤에게 안일하지 말라고 채찍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거대한 운명이 레니샤를 향해 굴러온다.
제도 근처를 살펴보고 돌아온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숲을 아무리 수색해도 그들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는 거다.
아직 이 인근에는 이르지 못했거나 이미 황제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레니샤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최악에 최악을 가정해 보았다.
렉서스가 헤일린과 브릭스턴의 생존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렉서스라도 반역의 증거 없이는 제국 내의 귀족을 공격하진 못한다.
대놓고 힐로샤인을 향해 검을 겨누지는 못할 것이다.
대신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겠지.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삐끗하길 기다리면서.
렉서스의 차가운 숨결이 목덜미에 느껴지는 듯했다.
그대로 입을 벌려 날카로운 송곳니를 레니샤의 목덜미에 꽂아 넣는 거다.
독을 주입하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레니샤를 보며 희열을 느끼겠지.
헤일린은 살아서 렉서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렉서스가 브릭스턴과 헤일린에 대해서 알게 되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다음을 생각해야겠지.
레니샤가 손가락을 맞잡았다.
“레니샤.”
카시우스가 묵직한 목소리로 레니샤를 불렀다.
“괜찮지 않아요. 잘 될 거라고 낙관하지도 못해요.”
레니샤가 느릿하게 말했다.
하루, 하루 그녀가 하려는 일의 무게가 그녀를 짓눌렀다.
이 무게를 견뎌야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헤일린을 구할 방법을 찾아야겠어요.”
렉서스와 직접적으로 담판을 짓는 건 어떨까.
렉서스가 레니샤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렉서스는 레니샤가 이 저택으로 오길 바랐다.
렉서스는 레니샤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레니샤의 눈가가 어두워졌다.
결론은 하나다.
렉서스는 레니샤를 다시 손에 쥐길 원할 것이다.
레니샤의 눈이 카시우스를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글쎄요.”
“불안한데.”
카시우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카시우스. 당신은 내가 뭘 하든 따라와 주겠다고 했었죠.”
“역시 불안합니다.”
“황제에게 가야겠어요.”
침묵이 흘렀다.
카시우스의 표정이 전에 없이 차게 굳었다.
카시우스의 눈동자가 점점 분노와 고통으로 얼룩졌다.
레니샤의 말을 뒤늦게야 받아들인 듯했다.
“레니샤, 그건 허락할 수 없습니다.”
“카시우스가 허락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해야 해요. 가서 헤일린도 구하고…… 오히려 그게 쉬울지도 몰라요. 안에서부터 렉서스를 무너뜨리면……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일 수도 있어요.”
“내가 닿지 못하는 곳으로 가는 건 허락할 수 없습니다.”
“카시우스, 이건…….”
레니샤가 한숨 섞인 미소를 지었다.
“나는 만약, 또 한 번 헤일린을 잃게 된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 거예요. 멍청하게 후회나 거듭하며 내가 하지 못한 일을 곱씹겠죠. 나는…….”
“레니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말을 가로막았다.
레니샤의 말을 듣다 보면 그녀가 바라는 대로 해주고 말 것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지금도 레니샤가 하는 말을 이해한다.
그녀의 방법이 답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나는 싫습니다.”
그럼에도 넘쳐흐르는 감정은 그 모든 것을 가로막았다.
“당신이 렉서스 황제에게 가는 것도 싫고 그 남자와 얽히는 것도 싫습니다. 레니샤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시간이 없어요, 카시우스.”
레니샤가 아프게 웃었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해요.”
카시우스가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레니샤를 막지 못할 것이다.
카시우스는 레니샤가 가는 길을 배웅하며 그녀의 뜻을 따르게 되겠지.
그리고 그다음은?
“카시우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이 검에 대고 당신은 내게 맹세했어요. 이 검으로 나를 지켜주겠다고.”
카시우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위험해지면 언제든지 달려와 줘요. 당신 손으로 나를 지켜줘. 우리가 했었던 약속을 지켜.”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검을 느리게 뽑았다.
스릉. 서늘한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울렸다.
레니샤가 두 손으로 검을 붙들었다.
여전히 버거운 무게였다.
이건 카시우스가 짊어진 짐의 무게일 것이다.
“이 검으로 렉서스의 목을 베는 거예요.”
레니샤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봄빛이 사나운 불꽃으로 일렁거렸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말했다.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날 거고 당신이 바랐던 대로 한 가족이 되어 아이도 낳고, 행복해지겠죠.”
“레니샤…….”
“레니샤 로테라.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요.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주겠다고.”
카시우스가 실소를 흘렸다.
희고 작은 레니샤의 손에 들려 있는 거대한 검이 카시우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카시우스가 저 검을 들 듯, 레니샤도 그녀만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레니샤의 무기는 그녀 자신이었다.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와 담력, 그리고 세상의 판도를 세세하게 짜 내려가는 지략.
레니샤의 전부가 하나의 무기였다.
레니샤가 소원을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그녀는 그렇게 해줄 것이다.
힐로샤인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었듯이.
“나는 우리를 믿어요, 카시우스. 당신은 어때요?”
레니샤는 알고 있을까.
저 말은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카시우스와 레니샤를 우리라는 단어로 귀속시켰다.
“나와 당신을, 우리를 믿나요?”
카시우스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카시우스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결국 그가 백기를 들었다.
처음부터 레니샤를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어떻게 이기겠는가.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목을 베어간다고 해도 들어주고 싶은데.
차라리 렉서스의 목을 베고 말지.
***
렉서스가 창백한 얼굴로 헤일린을 노려보았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헤일린이 멍이 든 얼굴을 치켜올렸다.
이사벨라 앞에 몸을 내던진 것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아이를 향해서 뻗어지던 괴한들의 손길을 보았을 땐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이사벨라를 지키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그 앞에 끼어들었다.
헤일린이 피가 섞인 침을 렉서스에게 뱉었다.
힘이 없어 렉서스에게는 닿지도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버렸지만 충분한 모욕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모르고. 흔적 하나 보이질 않길래 안일했나 봐.”
“전에도 실패했듯이 이번에도 실패할 겁니다.”
철썩.
렉서스가 헤일린의 뺨을 후려쳤다.
헤일린이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비스듬히 렉서스를 노려보며 헤일린이 입가를 문질렀다.
멍이 하나 더 더해졌다.
이런 건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이사벨라를 지켜냈다는 뿌듯함과 그녀의 존재를 들켰다는 두려움이 한데 엉켜서 고통을 잊게 했다.
헤일린이 침을 삼켰다.
비릿한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두려움을 삼키기 위해서 애를 쓰며 헤일린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차라리 죽고 말지.”
헤일린이 피식 웃었다.
“당신이 원하는 걸 내어줄 인질이 되느니 내가 죽고 말지!!”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을 거고 마음대로 살 수도 없을 거다.”
렉서스가 느리게 뇌까렸다.
“너는 레니샤를 붙들 인질로 쓰일 거야, 헤일린.”
헤일린이 날카롭게 렉서스를 응시했다.
“네 남편과 네 아이를 잡을 인질로도 쓰이겠지. 너의 가치는 그토록 높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널 죽이겠나.”
헤일린의 기개만큼은 높게 살 만했다.
로테라 것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았다.
대단한 자존심과 기개로 가득 차 있었다.
여러모로 사람을 환장하게 할 정도로.
“아. 레니샤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똑똑한 여자이니 제 스스로 걸어 들어올지도 몰라. 이 황성으로.”
렉서스가 두 팔을 벌렸다.
어둠을 덧입은 보랏빛 눈동자가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렉서스의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보이는 듯했다.
그를 지탱하고 있는 어둠이었다.
헤일린이 두 손을 맞잡았다.
‘레니샤…….’
단단한 고목 같아 보이던 레니샤가 떠올랐다.
절대로 꺾일 것 같지 않았던 레니샤가.
정말로 렉서스의 말대로 레니샤가 모든 걸 알고 헤일린을 구하러 와주기만 한다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았다.
헤일린도 살아 돌아가고 레니샤는 황제가 되고 렉서스는 벌을 받고.
레니샤는 희망의 등불이었다.
“이 여자를 잘 감시해라.”
“네.”
하녀들이 공포에 떨며 고개를 숙였다.
헤일린을 데리고 온 남자들은 렉서스의 검에 절명했다.
무슨 이유로 죽어야 했는지 그들은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눈도 감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으니.
그들이 그런 꼴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렉서스가 시키는 대로 순종적인 짐승으로 사는 게 황성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방 안에 날카로운 것을 없게 해라. 몸수색도 하고. 그리고 음식도 정해진 것만 들이고 먹을 때만 재갈을 풀어줘라.”
“네, 폐하!”
“저 여자가 내 허락도 없이 죽으면 너희도 죽는다. 명심해.”
하녀들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렉서스가 헤일린을 차게 노려보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하나같이 건방지고 못마땅하다. 짜증 나게.
그래도 헤일린을 손에 쥐고 나니 머릿속이 맑게 개이는 느낌이었다.
헤일린을 손에 쥐었듯이 레니샤가 다음 차례다.
참, 재밌지 않나.
그토록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던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테니.
“레니샤를 향해 문을 열어라.”
렉서스의 목소리가 황성에 깔렸다.
***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레니샤는 카나리아가 가진 것을 하나씩 빼앗으려 했다.
그녀가 바라는 것들은 하나도 내어주지 않기로.
아무것도 아닌 채로 들어가게 되겠지만 레니샤는 카나리아가 원하는 걸 전부 가지게 될 거였다.
레니샤의 쓰임은 렉서스도 잘 알고 있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황성 앞에서 카시우스에게 레니샤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절대로 무사할 테니까.”
“…….”
“내가 이야기한 거 잊지 않았죠?”
카시우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샤는 카시우스에게 몇 가지를 일러두었다.
투리엘을 통해서 사람들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는 방법 같은 것.
‘루나를 안으로 들여보내 줘요. 검을 쓸 수 있는 여자가 필요해요. 시녀로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사람. 예전에 시녀로 일하던 아이들이 다시 입궁할 거예요. 그사이에 섞어서 들어오면 돼요.’
카시우스가 목울대를 울렸다.
그 옆에 직접 있어 주지 못하고 다른 이에게 맡겨야 한다는 게 마음 아팠다.
왜 운명은 레니샤를 가만히 두지 않는 걸까.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레니샤가 느리게 속삭였다.
“어쩌면 내가 당신을…….”
그녀의 예쁜 미소가 카시우스의 가슴에 낙인처럼 박혔다.
참 잔인한 여자였다. 끝까지 카시우스를 쥐고 흔든다.
레니샤의 뒷모습을 카시우스는 오래도록 지켰다.
황성의 문이 닫히고 그 위로 석양이 내려앉을 때까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