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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운명의 장난 (80/135)


80화. 운명의 장난
2023.01.03.



 
레니샤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당연히 기뻐야 마땅한데 왜 그 순간 대답을 망설였을까.

복수가 눈앞에 있었다.

렉서스는 그토록 지키려고 했었던 것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비참히 죽을 텐데.

그리고 레니샤는 그 자리에 오르게 될 거였다.


“기뻐야 하는데…….”

기습적인 질문은 레니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왜…….”

레니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카시우스는 항상 레니샤의 인간적인 부분을 자극하곤 했다.

잊고 있었던 연애 감정을 되살리게 만들기도 하고, 지금처럼…….

목표만 향해 달려가던 레니샤가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기쁘지만은 않은 일이구나.”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황제의 자리는 그냥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의 희생과 죽음 위에서 얻을 수 있는 피의 왕관이었다.

캘리엇 백작이 죽음으로 그것을 일깨웠고 카시우스가 인지하게 만들었다.

레니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내가 포기한다면?’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선택지가 떠올랐다.

황좌를 포기하고 복수를 포기하고.

누군가가 바랐던 대로 행복을 좇아서 살아간다면.


‘렉서스가 히엔트리를 잘 이끌어갈 수 있을까?’

렉서스는 레니샤보다 훨씬 더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성보다는 본능을 따르고 본인을 위한 정치를 하는 사람이었다.

렉서스는 제국을 유지시킬 뿐 발전시키지는 못한다.

렉서스는 결국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게 될 터였다.

기울어가고 있는 히엔트리의 명운대로.


“내가 옳아.”

레니샤가 황제가 되어 구할 수 있는 목숨이 그녀가 황제가 되면서 잃게 될 목숨보다 많을 것이다.

그것만은 자신할 수 있었다.

문제는 레니샤가 어깨에 얹게 될 그 죽음의 무게를…….

잊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렉서스처럼 무너져내리는 건 아닐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가운 끈을 묶으며 다가온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어깨에 키스했다.

레니샤가 고개를 돌려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레니샤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카시우스. 당신은 종종 나를 고민에 빠지게 만들어.”

레니샤가 볼을 약하게 부풀렸다.


“제가 그렇습니까?”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안아 올렸다.

목욕을 막 끝낸 레니샤의 몸에서는 짙은 향유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발코니를 통해 들어온 은은한 달빛이 레니샤의 피부를 빛나게 했다.


“당신은 나를 고민에 빠지게 만들진 않습니다.”

“그러면?”

레니샤가 자신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대답을 재촉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침대에 눕혔다.

레니샤는 사람을 홀리는 세이렌이나 다름없었다.

레니샤가 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다.

그녀의 손끝으로 부려지는 노예가 된다고 해도 좋았다.

레니샤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얕았던 감정이 점점 깊이를 더하게 되고 종내에 이렇게 번지게 될 때까지.

카시우스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 키스했다.

영혼이 얽혀드는 것 같다.

아니, 정확히는 카시우스의 영혼이 레니샤에게 종속되는 것 같았다.

카시우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은…… 나를 미치게 만듭니다.”

카시우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제가 제가 아니게 만들어요.”

불식간의 말에 레니샤가 눈을 깜빡였다.

카시우스는 아는지 모르겠다.

그가 꽤 로맨티시스트라는 사실을.

***

이사는 무사히 끝났다.

렉서스의 돈으로 지은 레니샤와 카시우스의 저택이었다.

카시우스는 좀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레니샤의 결정이니 순순히 따라주었다.

성공적인 이사 이후 레니샤를 찾아온 첫 손님은 덴버스 후작이었다.

은밀한 방문이었다.

레니샤가 바랐던 대로 저택에 있는 비밀 통로를 통해서 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덴버스가 레니샤를 지지한다는 사실은 아직 비밀로 두어야 한다.

레니샤는 지하에 은밀한 방을 하나 만들었다.

레니샤의 명령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는 문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덴버스 후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니샤 님.”

“덴버스 후작. 이렇게 만나니 반갑군.”

레니샤가 손짓하자 문이 닫혔다.

린데이가 굳은 얼굴로 레니샤의 등을 지키고 섰다.

만약 덴버스 후작이 레니샤에게 위해라도 끼치면 그를 물어뜯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레니샤와 적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는 덴버스 후작이 여유롭게 웃었다.

레니샤가 제일스의 죽음이 명예로울 수 있도록 캘리엇 백작을 구하고, 그의 아이들을 구했을 때부터.

그리고 그 이후로는 제일스의 유해를 밖으로 가지고 나와 장례를 치러주었을 때부터.

덴버스 후작은 레니샤의 종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가 레니샤를 배반한다면 그건 제일스가 살아 돌아올 때이리라.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그간 잘 지냈나? 카나리아와의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레니샤가 궁금한 건 그 부분이었다.


“카나리아가 곧 있을 축제의 여주인이 되고 싶은 모양입니다.”

레니샤가 멈칫했다. 여주인?


“카나리아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나?”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덴버스 후작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후의 자리는 고작 그런 걸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 나라의 사신단을 접대하기 위해서는 문화와 예술을 전부 알아야 한다.

그 무엇 하나 알지 못하면서 여주인 행세를 하고 싶다니.

레니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렉서스는 그것을 허락할 것 같은가?”

“글쎄요. 황제의 마음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 마음에 흙탕물을 탈 수는 있겠지.”

레니샤가 느릿하게 말했다.

카나리아가 바라는 건 모두 잃게 될 것이다.

그게 레니샤가 카나리아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귓가에 간언하며 그의 열등감을 부추겼다는 것을 안다.

렉서스가 기어이 로테라 공작 부부를 죽이는 데 카나리아가 한몫한 것이다.

레니샤는 그것을 갚아줄 생각이고.


“그 자리의 여주인은 내가 되어야 겠다.”

“……황후의 자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날의 여주인은 렉서스의 옆자리에 앉는 자야. 그 자리에 하루쯤 앉아볼까 해.”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카나리아가 아주 많이 슬퍼하겠군요.”

레니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건 레니샤가 알 바가 아니었다.

카나리아가 로테라의 몰락을 속삭이며 남은 자들의 슬픔은 생각하지 않았듯이.


“그리고 카나리아가 돈을 빼돌려 저택을 사려고 하는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외국이겠지?”

“그렇습니다. 카나리아가 도망칠 수 있게 두실 생각이십니까?”

“그 여자가 호의호식할 자격이 있나? 모든 걸 잊고 말이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그걸 허락하고 싶지 않은데. 손을 쓸 수 있겠나?”

“카나리아가 저를 믿는 한, 가능합니다.”

덴버스 후작의 자신감이 레니샤를 기쁘게 만들었다.

지금은 확실히 기뻤다.

카나리아는 레니샤가 바라는 대로 엉망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



“레니샤가 저택으로 들어갔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혼자?”

“아닙니다, 폐하. 카시우스 공작과 함께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렉서스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레니샤는 절대로 뜻대로 되지 않는다.

손안에 넣었다 싶으면 또 저 멀리 달아나 있었다.

렉서스가 이를 악물었다.

비가 오던 날, 레니샤와 함께 그 아래에 서 있던 카시우스가 떠오른다.

그 품에서 레니샤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렉서스는 보지 못했던 그 웃음을 카시우스는 주제도 모르고 누리고 있었다.

마음이 들끓었다.


“대체 왜!”

렉서스가 테이블을 걷어찼다.


“그놈이 뭐라고! 고작 노예 아니냐.”

렉서스가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레니샤가 쓰던 침실을 훑어보았다.

렉서스가 이를 악물었다.

침대를 보니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한데 엉켜 있는 게 연상되었다.

레니샤는 렉서스에게 했던 것과는 다르게 카시우스의 품에 안겨서…….

렉서스가 이번에는 침대를 걷어찼다.

생각할수록 고통스러운데 생각을 끊을 수가 없었다.

과거의 렉서스는 미쳤던 게 틀림 없다.

레니샤를 그토록 모르나.

그 여자는 떠나고 나면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여자인데.

렉서스가 울분을 터뜨렸다.

시종장은 침묵을 지켰다.


“레니샤를 데려와. 그 여자를 당장 내 눈앞에 데려와!”

시종장의 머리를 스치고 날아간 물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네, 폐하.”

시종장이 불만을 간신히 삼켰다.

레니샤가 부른다고 올 사람인가.

레니샤는 자신의 필요가 아니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새우처럼 터져나가는 것은 사용인들뿐이었다.

레니샤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빨리 그 뜻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레니샤가 무엇을 하든 렉서스는 그 자리에 없을 테니.

***

어둠 속에 잠긴 힐로샤인 인근의 베리엣 숲.

깨어 있는 생명체라고는 야생동물이 전부여야 할 곳에 인간이 스며들였다.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힐로샤인의 문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두 남자 사이에 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게 가능한 거야? 여기가 힐로샤인은 맞아?”

“아무것도 안 하고 죽는 것보다는 뭐라도 시도하는 게 낫지.”

남자들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렉서스 황제의 명으로 여기까지 왔다.

한계까지 몰아붙인 몸이 피로를 호소하고 식은땀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눈은 감기질 않는다.

긴장감에 온몸의 피가 곤두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이사벨라 로테라’를 납치할 것.

황제는 레니샤에게 그가 바라는 목줄을 채우려는 것이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그들의 다리를 스치는 수풀의 바스락거림과 부엉이 울음소리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불길한 것인지.

그들은 조심스럽게 힐로샤인의 문을 넘었다.

폐허나 다름없던 곳이…….


“힐로샤인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군.”

남자들이 혀를 내두르고는 숨을 죽였다.

힐로샤인에 들어오는 것도 힘들었지만 성을 넘는 건 더 힘든 일이었다.

무장한 기사들이 살벌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오늘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다.

여기에서 잡혀서 죽는가, 아니면 임무를 성공하고 렉서스로부터 상을 받는가.

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에 휘말려서는.

남자들이 조심스럽게 성을 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어 있었던 성에 불이 밝혀졌다.


“헤일린!!!!!”

고함과 비명, 모든 게 뒤섞인 가운데 복면을 쓴 남자들이 자루를 어깨에 메고 성을 빠져나왔다.

달리는 말 위에서 그들은 욕을 내뱉었다.


“애가 아니잖아!!!”

“일단, 가! 뭐라도 되겠지! 빈손보다는 낫지 않겠어?!”

그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추격전의 시작이었다.

이대로 황성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기를!


 

***

운명은 다시 한번 레니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녀에게 두 가지의 나쁜 소식이 전해졌다.

헨리가 탈출했다는 것.

헤일린이 납치되었다는 것!

항상 불행은 호시탐탐 레니샤를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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