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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덴버스 후작 (77/135)


77화. 덴버스 후작
2022.12.23.



 
헨리의 손가락이 종이를 문질렀다.

시야가 흐릿하니 고작 이런 글자 하나 쓰는 것도 힘들다.

이곳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헨리를 대신해서 무엇도 써주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어.’

힐로샤인은 헨리의 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헨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곳에서 달아나는 것뿐이었다.

헨리가 펜으로 꾹꾹 눌러 단어를 적었다.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낸 헨리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필요한 건 전부 준비되었다.

소량의 수면제가 섞여 있는 향과 그에 대한 해독약, 그리고 돈까지.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작은 가방을 허리에 둘러맨 헨리가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두드렸다.


“헨리?”

그 신호를 알아들은 이사벨라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무슨 일 있어요?”

이사벨라의 뒤쪽으로 어른거리는 인영들이 있었다.

헬레나와 제인일 것이다.

헨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의원엘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했었잖습니까.”

“아!”

이사벨라가 손뼉을 쳤다.

헨리를 달래기 위해서 이사벨라가 한 말이었다.

다른 의원에게 진료를 받게 해줄 테니 재활 훈련을 하자고.


“가서 진료를 받아보고 싶습니다. 이 눈을 고쳐줄 의사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음. 이건 옆 마을로 가야 하는 건데…… 어른들의 허락이 필요해요.”

“기다리겠습니다.”

헨리의 침착한 말에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김에 다른 마을 구경도 하고 싶었다.

힐로샤인에 와서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이후로 이사벨라는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자유를 잃었다.

어른들은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은지 이사벨라가 밖으로 홀로 나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했다.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병력의 일부를 데리고 떠난 이후로 이사벨라에게 벌어진 일이었다.

기사들과 함께 옆 마을로 외출하는 것은 허락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사벨라가 한껏 들떠서는 복도를 내달렸다.

헤일린은 아마도 집무실에 있을 것이다.

헨리에게는 어떤 이야기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받았다.

헤일린이나 브릭스턴에 대해서는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다.

이사벨라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사벨라가 숨을 죽인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사벨라가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저예요.”

속닥이는 작은 목소리가 안에서도 들렸던 모양이다.

문이 열렸다.

헤일린의 보좌관으로 뽑힌 이가 이사벨라를 맞이했다.


“아가씨.”

“헤. 어머니 있어요?”

“네. 들어오세요.”

이사벨라가 배시시 웃었다.

어린아이 같은 미소에 모두의 마음이 환해질 정도였다.

헤일린이 보고 있던 서류를 정리했다.

이사벨라가 이렇게 낮에 찾아왔다는 건 용무가 있다는 거다.

헤일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의 작은 얼굴을 응시했다.


“뭐가 필요한 거지?”

“그런 거 아닌데!”

이사벨라가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러면? 지금쯤 헨리와 있거나 마을 밖으로 놀러갔을 줄 알았는데.”

“어머니, 제가 항상 노는 줄 아세요?”

이사벨라가 볼을 부풀리고는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쳤다.

그 모습이 헤일린의 웃음을 자아냈다.

작게 웃음을 터뜨린 헤일린이 이사벨라를 향해 팔을 벌렸다.


“이리 오렴, 이사벨라.”

이사벨라가 헤일린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그 품 안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사벨라가 한껏 어리광을 부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부탁이 있어요, 어머니.”

“그럴 줄 알았지. 요 녀석.”

헤일린이 이사벨라의 코끝을 붙들고 흔들었다.


“부탁이 뭔데?”

“그으게.”

이사벨라가 헤일린의 기색을 살폈다.


“헨리가 옆 마을의 의사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요. 같이 다녀오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이사벨라가 최대한 착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눈을 깜빡이며 헤일린의 손을 붙들었다.

헤일린이 어린 이사벨라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생각해보자꾸나.”

“어머니이…….”

“이사벨라. 헨리와 외출을 하는 건 아주 다른 문제야.”

“……어차피 앞을 보지 못하잖아요. 헨리는 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해요.”

헤일린이 아이의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헨리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헤일린이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이사벨라가 헨리를 돌보는 일을 통해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헨리에게 좀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이사벨라.”

그리고 헤일린은 그런 이사벨라에게 약했다.

아이의 회색빛 눈동자는 헤일린을 아프게 하는 것 중에 하나였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헤일린을 휘어 감곤 했으니 말이다.


“기사들을 데리고 가렴, 이사벨라.”

이사벨라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이사벨라가 환하게 웃었다.

그 구름 한 점 없는 밝은 표정에 헤일린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웃었다.


 

***

되찾아온 유해는 캘리엇 백작의 옆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덴버스 후작이 함께했다.

은밀하게 찾아온 덴버스 후작은 침통한 표정으로 내내 레니샤의 곁을 지켰다.

캘리엇 백작이 레니샤의 사람이란 사실은 이미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덴버스 후작이 그간 몸을 사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레니샤의 사람인 게 밝혀지면 렉서스의 견제를 받게 된다.

덴버스 후작의 활동에 제약이 생기는 것이다.

덕분에 캘리엇 백작이 마지막으로 떠나는 길도 보지 못했다.


“……그곳에서는 만났을 겁니다.”

“그랬겠지.”

평생 소원을 죽어서야 이루게 되다니.

레니샤가 흐릿하게 웃었다.

덴버스 후작이 전에 전하지 못했던 국화까지 한 번에 전했다.


“편히 쉬시길.”

무거운 목소리가 레니샤의 귀를 파고들었다.

덴버스 후작의 어깨가 유독 무거워 보인다.


“……제 친구였습니다, 레니샤 님.”

“친구?”

“네. 제일스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이렇게 억울하게 갈 사람은 아니었지요. 좋은 기사이기도 했었습니다. 제일스가 렉서스 황제의 칼날에 몸을 들이밀고 죽음을 자처한 것은 어린아이들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덴버스 후작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레니샤는 덴버스 후작이 말하는 제일스가 캘리엇 백작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덴버스 후작과 제일스 캘리엇이 또래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덴버스 후작이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런 제일스를 저도 참 좋아했었습니다.”

레니샤의 표정이 묘해졌다.


“덴버스 후작.”

“많이 좋아했었는데…… 이렇게 갈 줄은 몰랐지요.”

그 말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레니샤는 더 이상 묻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덴버스 후작은 한참을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레니샤는 묵묵히 그 뒤를 지켜주었다.

덴버스 후작이 이상하게 아주 외로워 보였던 까닭이다.

덴버스 후작도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덴버스 후작이 무거운 걸음을 뗀 것은 석양이 길게 늘어진 시간이었다.

레니샤의 뒤를 느릿하게 따르는 덴버스 후작의 얼굴에는 물기가 흥건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는 행동은 거칠었다.

덴버스 후작이 심호흡하고는 말했다.


“카나리아에게 사람을 붙여두었습니다.”

“자네가 카나리아의 후원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네.”

“얼마 전에 카나리아의 하녀를 데리고 가셨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거기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저도 알 수 있을까요?”

레니샤가 뒤를 힐끔 보았다.

덴버스 후작은 충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니샤는 모두를 믿는 만큼 의심한다.

가까운 이들에게 배신당하는 게 얼마나 뼈아픈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캘리엇 백작은 자신의 수하에게 신뢰를 내어주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게 레니샤의 미래가 되지 못하리란 법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계산을 하는 대신에 덴버스 후작에게 곁을 내어주고 싶었다.

레니샤가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카나리아의 배 속 아이가 렉서스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

덴버스 후작이 숨을 짧게 들이켰다.


“지금, 그 말씀은.”

“카나리아가 황실의 혈통을 더럽힐 짓을 했다는 뜻이야. 그 증인은 확보했네.”

바바라가 말한 여자의 신병을 확보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카나리아를 실각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겠군요.”

“아니. 고작 증언일 뿐이네.”

“증거는 없었습니까?”

“여자가 적어둔 기록은 찾았지.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추문만 더해줄 수 있을 뿐이야.”

“그러면…….”

“일단 이 패는 가지고 있으려 하네. 카나리아가 다시 한번 삐끗하기를 기다려야지. 이왕이면 어린아이를 표적으로 삼는 것보단 그 어미를 표적으로 삼는 게 더 낫지 않겠나.”

레니샤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의 역할이 중요하네.”

“……카나리아는 감정적인 인물입니다. 지금 황제가 맡긴 고아원 설립에 모든 걸 쏟아붓고 있지요. 제가 가진 돈을 전부 털어 넣을 기세입니다. 어떡해서든 성공해서 황제의 신뢰를 얻고 싶어 하지요.”

“그 고아원은 지어져서는 안 돼.”

“전달받았습니다. 카나리아는 그 돈을 써서 썩은 나무와 곰팡이가 핀 자재들을 사들이고 있지요.”

덴버스 후작이 서늘하게 덧붙였다.


“카나리아가 직접 고른 상단이 하필이면 사기꾼 집단일 줄이야.”

조금도 애석하지 않다는 말투였다.

레니샤가 웃음을 흘렸다.

덴버스 후작이라면 절대로 일을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지금 카나리아는 투리엘과 레니샤가 그녀의 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덴버스 후작에게 더 매달리려 하겠지.


“카나리아가 자네를 믿는 것 같나?”

“네, 레니샤 님. 지금 카나리아는 절벽 끝에 서 있으니까요.”

“그거면 되었네. 카나리아로부터 착취한 돈을 이용해서 새로운 고아원을 짓도록 하게.”

덴버스 후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레니샤를 따라 뒤에서 걷는 게 좋았다.

과거 덴버스 후작이 마음에 담았던 이처럼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등이었다.

레니샤라면 반드시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라는 강렬한 믿음이 있었다.

덴버스 후작이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일스.’

제일스는 죽기 전날 그를 찾아왔었다.


‘내 아버지를 부탁하네, 덴버스. 내 아이들도…….’

‘황제는 미쳤어! 차라리 도망을 가게. 식솔들을 챙겨서 도망갈 수 있도록 내가 돕겠네. 그러니…….’

제일스가 고개를 저었다.


‘붙잡히게 될 거야. 황제의 눈은 어디에든 있어. 분명히 붙들리게 될 거야. 황제가 바라는 건 캘리엇 백작가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거야. 캘리엇 백작가가 쥐고 있는 병권을 견제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니 내가 죽고 나면 한동안 백작가는 안전해질 걸세.’

그 덤덤하고 단단한 표정이라니.

제일스는 마지막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지금의 레니샤처럼.

레니샤는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는다.

덴버스 후작은 레니샤의 그 강인함을 믿고 있었다.

레니샤라면 반드시.


“황제의 목을 꺾고 그 자리에 오르소서.”

레니샤가 멈칫했다.

덴버스 후작이 다시 한번 말했다.

그건 덴버스의 바람이기도 했다.

불이 지펴진 분노가 가슴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반드시 그 뜻을 이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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