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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침몰하는 배 (76/135)


76화. 침몰하는 배
2022.12.20.



 
바라는 것은 전부 얻었다.


“그간 네가 아주 잘해주었다.”

“감사합니다, 레니샤 님.”

레니샤가 시종장에게 보석이 든 주머니를 건넸다.

시종장이 하얗게 핀 얼굴로 그것을 건네받았다.

이게 아니라면 황제의 곁에서 두려움과 모욕을 동시에 참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시종장이 희희낙락해서는 그것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이쪽입니다.”

어두운 복도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레니샤의 코끝을 찔렀다.

이런 곳에 억울하게 죽은 그들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레니샤가 비죽이 웃었다.

렉서스가 레니샤에게 바라는 것을 전부 내어줄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렉서스는 지금 레니샤에게 미쳐 있었다.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고 싶지도 않지만.

레니샤는 그것을 이용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어느새 낡아빠진 나무 문 앞이었다.

레니샤가 물끄러미 그 문을 응시했다.


“참…….”

장담하건대 렉서스의 죽음은 아름답지 못하리라.

렉서스는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존중할 줄 모른다.

렉서스가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의 마지막 모습이 레니샤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비단 로테라 공작 부부만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 만나게 될 이들도, 그리고 캘리엇 백작도, 수많은 이들이 렉서스의 혓바닥에 목숨을 잃었지만 렉서스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예의조차 없었다.

방치되고 버려지고.

결국은 이제야…….

먼지가 휘날리는 곳에 목함이 보였다.

레니샤가 그것을 품에 안았다.

캘리엇 백작이 이것을 안지 못하고 떠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자식들의 죽음은 캘리엇 백작의 가슴에 대못이 되었을 텐데.

레니샤에게 박힌 로테라 공작 부부의 죽음처럼 말이다.

가슴이 시렸다.

목함이 세상 그 무엇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레니샤가 이러할진대 캘리엇 백작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결국에 아들을 품에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떠나야 했으니.

게일을 향한 분노가 함께 치솟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목함을 쥐고 있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빠드득하고 손톱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레니샤 님…….”

레니샤가 뿜어내는 악의에 시종장이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황제께서 자네를 찾으실 때가 됐군. 이만 돌아가 보게.”

레니샤가 축객령을 내렸다.

싸늘하게 시종장을 스쳐 지나온 레니샤가 느리게 걸었다.

아들을 반겨줄 캘리엇 백작은 이제 없다.

남은 이가 없었다.

레니샤를 반겨줄…… 로테라 공작이 없듯이.

텅 비어버린 가슴에 모래가 뒤섞인 바람만 휘몰아쳤다.

죽음은 이토록 허망하다.


‘아무도 죽게 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 레니샤가 지켜낼 것이다. 아무도 죽지 않도록.

***

카시우스가 마차 앞을 서성거렸다.

이족들의 일을 마무리 짓고 바로 레니샤를 뒤쫓아왔다.

레니샤가 렉서스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불안했다.

렉서스를 향한 레니샤의 감정을 모두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부부로 살았던 시간이 있었다.

카시우스는 알지 못하는 일들도 두 사람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카시우스의 질투를 불피우곤 했다.


“레니샤!”

무언가를 품에 안고 나오는 레니샤를 향해 카시우스가 달려갔다.


“카시우스? 손님들과는 대화를 잘 마무리했나요.”

레니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공허한 피로가 가득 쌓여 있었다.

기민하게 그것을 알아차린 카시우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레니샤. 어디가 안 좋은 겁니까?”

레니샤가 눈을 깜빡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지적을 받은 까닭이었다.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카시우스가 얼마나 고마운지.

레니샤가 품에 안은 목함을 카시우스에게 내보였다.


“……캘리엇 백작이 그토록 되찾고 싶어 했었던 아들과 며느리의 유해예요.”

“…….”

카시우스가 손을 뻗어 목함 위를 쓸었다.


“고작 이거였어요. 캘리엇 백작이 바랐었던 건. 고작 이거…… 황제는 공감 능력이 결여된 망종인가 봐.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해. 나는…….”

레니샤의 목소리가 떨렸다.


“캘리엇 백작이 죽었어. 캘리엇 백작은, 카시우스, 그분은…… 내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했고 나와 렉서스를 가르쳤었던 스승이기도 했어.”

레니샤가 눈을 깜빡임에 따라 눈물이 궤적을 그렸다.

꾹 눌러 참고 있었던 눈물이었다.

구석에서 거미줄에 쌓여 있던 목함을 발견했을 때부터.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캘리엇 백작에게서 전략과 전술을 배웠지. 렉서스, 그 개자식은…… 그 미친 새끼는…….”

레니샤가 고개를 숙였다.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참지 못한 욕설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캘리엇 백작의 죽음이 레니샤에게는 깊은 상처를 남겼는데, 그 일을 저지른 렉서스는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렉서스만 아니었다면 잃지 않아도 됐을 것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리고 그건 레니샤의 깊은 죄책감과 연결되었다.

짐승을 로테라로 들였던 과거와 말이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 손을 뻗었다.


“……레니샤.”

“당신이 와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사실 문을 열면서 빌고, 또 빌었지. 당신이 눈앞에 나타나 주기를.”

“…….”

“이상하게 나는 당신이 옆에 있으면 안심이 되거든. 내가 엉망진창이 되어도 당신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 같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앞으로 이끌어줄 것만 같아.”

“…….”

카시우스가 숨을 흘렸다.

레니샤의 가쁜 호흡이 잦아들기를 바라며.

레니샤를 토닥이는 손길은 한없이 다정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심장이 두근, 두근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카시우스…… 렉서스를 죽이고 싶었어.”

레니샤가 속삭였다.


“놈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나는 그 순간 정말로 살의를 참을 수가 없었어. 재빠르게 도망쳐야 했지.”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번쩍 안아 올렸다.


“카시우스!”

“레니샤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복수든, 혹은 그저 증오하는 것이든.”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마차 의자에 걸터앉게 하고는 손에 들고 있던 목함을 빼앗았다.

이상하게 차게 느껴지는 목함을 마차 바닥에 내려놓았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을 느리게 펼쳤다.

손톱이 파고든 손바닥이 움푹 파여 피가 고여 있었다.

카시우스가 손수건으로 그것을 감쌌다.

비릿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 기어이 상처를 달고 돌아왔다.

카시우스가 속상한 마음에 혀를 찼다.


“그러니 이런 짓은 하지 말아요.”

“……이런 짓?”

“레니샤를 상처 입히는 짓. 나는 그게 너무 아픕니다.”

“카시우스가 아프다고?”

레니샤가 물기 어린 얼굴을 기울였다.


“네.”

“내가 아주 많이 다치면?”

“그 곱절로 속상하고 고통스러울 겁니다. 레니샤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만약에 내가 죽어버리면?”

레니샤가 순수한 악의로 물었다.


“……레니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등에 입술을 댔다.

따뜻하고 말캉한 촉감이 닿았다가 멀어졌다.

애틋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에 깍지를 꼈다.


“레니샤…….”

레니샤가 죽는다.

불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격렬한 날갯짓을 이어가는 레니샤다.

사실 레니샤가 위험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일이다.

그 길에 피가 흐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레니샤의 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지 마십시오.”

카시우스가 어린애처럼 고개를 저었다.


“나를 두고 떠나지 마세요.”

“카시우스.”

레니샤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기쁨이었다. 순수한 악의로부터 비롯된 완전한 기쁨.

레니샤가 손을 뻗어 카시우스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녀를 휘몰아치게 만들던 온갖 감정들이 가라앉는 것만 같다.

그것이 카시우스에게로 전이된 듯했다.

레니샤는 지금 오롯하게 기뻤다.


“당신이 없다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힙니다. 상상도 할 수가 없어요. 나는…… 당신 없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겁니다.”

카시우스의 절절한 고백은 레니샤의 숨이 되고 살이 되었다.

넝마가 되어 나왔던 영혼이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를 위해서라도 살아주세요, 레니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에 반대로 깍지를 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짧게 키스했다.


“그래. 그러도록 하자.”

“……레니샤.”

“카시우스를 위해서라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 거야.”

레니샤의 봄빛 눈동자가 불을 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카시우스의 불꽃 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가락에도 키스했다.


 

***

한편.

카나리아가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바바라를 찾아냈다.

평소의 말쑥한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엉망이 된 모습이었다.

카나리아가 긴장한 얼굴로 바바라에게 다가갔다.


“바바라.”

카나리아의 가느다란 목소리에 바바라가 고개를 돌렸다.


“……황후?”

바바라가 창백해져서는 뒤로 물러섰다.


“바바라!”

카나리아가 목소리를 높여 바바라를 불렀다.


“……왜, 왜 돌아오지 않았지?”

“그것도 모르시는 겁니까?”

카나리아의 질문에 바바라가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도망가려는 의지조차 잃어버린 허탈한 표정이었다.

카나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나도 알아. 나를 배신했겠지. 레니샤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했을지도 몰라.”

“아시면서 물어보시는 이유는 뭡니까?”

“……모르는 척해주는 거잖아!”

카나리아가 날카롭게 외쳤다.


“나한테는 바바라밖에 없으니까…… 다 알아도 모르는 척해주려는 거잖아. 바바라야말로 그런 것도 몰라?”

“……모르는 척. 그러면 뭐가 달라집니까? 지금 상황이 나아지기라도 해요? 레니샤가 모든 걸 알았습니다. 그 독사 같은 여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황후는 무슨. 쫓겨날 수도 있다는 걸 몰라요?”

카나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해? 렉서스만 속이면 돼. 렉서스만 나를 믿어주면 이 아이는 황제가 될 수 있어.”

둥글게 부푼 배를 가리키며 카나리아가 눈을 표독스럽게 떴다.


“레니샤가 어쩔 건데? 어차피 렉서스는 자식이 없어. 뒤를 이어줄 후계자가 없다고! 렉서스에게도 나밖에 선택지가 없는데 내 자식을 죽이겠어?”

바바라가 카나리아를 멍하니 응시했다.

악에 받친 카나리아는 절박하게 배를 끌어안고 있었다.

카나리아에게는 저 아이만 남았다.

그렇다면 바바라에게는 무엇이 남았나.

지금도 갈 곳이 없어서 거리를 떠돌던 중이었다.

바바라는 그녀의 야망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녀의 인생도, 사랑도.

바바라에게도 카나리아밖에 남은 게 없었다.

아무리 카나리아가 침몰하는 배라고 해도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바바라가 실소를 흘렸다.


“좋아요. 내 주제에 뭘 가리겠어.”

바바라가 카나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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