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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내가 내린 저택으로 들어와 (75/135)


75화. 내가 내린 저택으로 들어와
2022.12.16.



 


“레니샤 님이야……!”

“세상에. 돌아오시는 건가?”

“그러실 만도 하지. 그 멍청한 여자가 하고 있는 짓을 봐!”

사람들이 숨을 죽이곤 수군거렸다.

그들의 시선은 오랜만에 황성에 나타난 레니샤에게 못 박혀 있었다.

레니샤 로테라.

그저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사람이었다.

황금로 엮어낸 것 같은 머리카락과 빛나는 봄과 같은 눈동자.

나른한 눈빛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걷는 곧은 자세.

우아함과 품위를 온몸으로 보이고 있었다.

레니샤 로테라가 황성에 없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레니샤는 황성이, 그리고 지배자의 자리가 지독히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사택까지 지어주셨으니 그러실 만도 하지.”

레니샤가 비죽이 웃었다.

저들은 여전히 레니샤가 꿈꾸는 자리가 황후의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작은 틀에 세상을 가둬두고 있는 거다.

여전히 렉서스가 다스리는 제국에 미래가 있다고 믿는 것도 우스웠다.


“레니샤 님이 돌아오시면 모든 게 다 정상이 될 거야.”

안일하기 짝이 없었다.

여전히 레니샤에게 기대려 하면서 렉서스를 놓지 못하다니.

이래서 사람들은 먹던 것만 먹으려 한다니까.

레니샤가 느릿하게 황성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변함없이 여전했다. 판에 박힌 것처럼.

그러니 사람들도 변하질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원의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이 레니샤의 눈가를 간지럽혔다.

변한 것이 하나 없는 세상에서 오로지 레니샤만 변한 것 같기도 했다.

레니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렉서스.”

레니샤의 앞으로 달려온 렉서스가 소년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이전보다 말랐고 이전보다 망가졌다.

한눈에도 그게 보일 정도였다.

약과 술을 아끼질 않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렉서스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레니샤는 전부 알고 있었다.

먼 곳에서도 황성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자처해서 레니샤의 눈과 귀가 되었다.

레니샤가 바라지 않아도 말이다.


“레니샤…….”

렉서스가 침음을 흘렸다.


“아.”

레니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황제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테라의 레니샤가 인사드립니다.”

레니샤가 단정하게 예를 갖췄다.

레니샤는 더 이상 황후가 아니었다.

렉서스의 이름을 불러선 안 되며 그와는 무엇도 남지 않은 사이였다.

렉서스는 레니샤에게 부정의 낙인을 찍어 내쫓았다.

레니샤는 공식적으로는 황제를 두고 부정을 저지른 여자였다.

레니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황제 폐하의 은덕으로 목숨을 보전해 이렇게 멀쩡히 인사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레니샤는 더 이상 황제를 보지 않았다.

땅에 시선을 두고 렉서스의 발끝을 응시했다.

그것이 조금도 굴욕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안달할 쪽은.


“고개를 들어, 레니샤.”

들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눌러 담은 감정이 느껴졌다.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들어 올린 레니샤의 표정은 무심했다.

렉서스가 레니샤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레니샤가 놀란 얼굴로 다시 물러섰다.

희극이 따로 없었다.


“레니샤! 감히 나를 피하는 거냐?”

렉서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레니샤를 찌를 것처럼 번뜩였다.


“너는 내 거야! 내가 바라면 언제든지 황성에 들어와서 너를 보여야 해. 나는 이 제국의 황제고 너는 내게 속한 여자에 지나지 않지. 그런데 감히…….”

레니샤가 다시금 피식 웃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작은 웃음을 흘리며 레니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를 내치신 것은 폐하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로테라를 내친 것 또한 황제 폐하의 선택이셨지요. 저는 이제 힐로샤인에 사는 공작 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제가 무슨 수로 황제 폐하의 여자라는 건가요?”

“레니샤. 그 노예 놈이 무엇이라고…… 너는 그놈에게 만족할 수 있나?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멍청한 놈이야. 노예라고! 영웅이라고 떠받드는 것에 취해서 자신이 대단한 줄 알지!”

그건 카시우스가 아니라 렉서스 본인의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황제라고 떠받들어주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거다.

레니샤가 입술을 비죽였다.


“카시우스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네가 뭘 안다고……!”

“부부이니. 한 침대를 같이 쓰는 부부이니 당연히 제가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레니샤가 부러 말을 늘였다.

그녀가 고른 단어들이 렉서스를 자극하리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렉서스는 비이상적일 정도로 레니샤에게 집착적으로 굴고 있었다.

그 사실은 과거에도 알았다.

레니샤를 쓰레기처럼 내다 버리면 될 것을 그러지 못해서 주위를 맴돌았다.

죽였으면 편했을 것을 그러지도 못하고 레니샤를 쥔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황후라고 제 옆에 두고는 한 번도 찾지 않으면서…….

그녀가 누리는 것들을 빼앗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까이서 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멀리서 보니 보였다.

렉서스는.


“솔직히 말해보세요.”

레니샤가 렉서스를 향해 다가섰다.

렉서스가 이를 악물었다.

악에 받친 창백한 얼굴이 애처로울 지경이다.

어린애도 렉서스보다는 똑똑하고 솔직할 것 같았다.


“나를 사랑하나요?”

역겹게도 레니샤를 사랑하고 있었다.

레니샤가 입술을 늘였다.


“나를, 사랑하나요. 렉서스?”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아넣었다.

레니샤보다 큰 몸이 휘청였다.

머리를 짚은 채로 뒤로 물러서는 렉서스를 레니샤가 싸늘히 응시했다.

제 감정도 모르는 멍청이가 카시우스를 모욕하기는.

레니샤가 보기엔 렉서스보다 카시우스가 훨씬 더 나았다.

카시우스는 최소한 솔직하기라도 하지.


“나, 나는…….”

레니샤가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언을 하였나 봅니다. 주제넘었다면 용서해주세요. 제가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은 사실 용건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레니샤가 말을 돌렸다.

렉서스와 이런 실랑이를 하는 것도 지겹다.

렉서스는 끝까지 저렇게 멍청하게 굴 것이다.

열등감과 망령에 사로잡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용건?”

렉서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

레니샤에게서 물러서고 나니 괜찮아졌다.

레니샤의 곁에만 있으면 이성을 잃고 15살 사춘기를 앓는 소년이 되는 기분이었다.

첫사랑의 열병에 죽을 것처럼 아픈 소년.

렉서스가 이를 악물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또 레니샤에게 휩쓸리게 될지도 모른다.

렉서스는…….

레니샤의 뒤편으로 로테라 공작의 망령이 스쳐 지나갔다.

로테라를 짓밟고 군주가 되어야 한다.

저 망할 유령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네, 폐하. 이번에 캘리엇 백작의 죽음에 대해서 들으셨습니까?”

“……낡은 것은 본디 가는 법이지. 캘리엇 백작이 그렇게 되었군.”

렉서스가 태연하게 말했다.

맞는 말이다.

순리에 맞게 세월이 흐르면 낡은 것은 마모되고 새로운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렉서스는 제가 바라는 것으로 자리를 대체했다.

게일 캘리엇은 꽤 입맛에 맞는 새것이었다.


“캘리엇 백작의 죽음은 안타깝게 되었군. 그자가 황성을 위해서 해준 일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네.”

렉서스가 애써 여유를 되찾았다.

레니샤가 이렇게 달려온 것을 보니 캘리엇 백작을 죽인 일은 잘한 일이다.

백번 잘하였다.

결국 그 멍청한 놈도 레니샤의 개를 자처한 게 이렇게 밝혀지지 않았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 슬픔도 가시는 듯합니다.”

“슬픔?”

“캘리엇 백작은 제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지라.”

레니샤가 미소 지었다.


“그분을 위해서 제가 폐하께 간청을 드리려 이렇게 왔습니다. 캘리엇 백작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신다면 그분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

“불충한 그분의 못난 자식들이 황성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렉서스가 눈썹을 움직였다.

캘리엇 백작을 손에 쥐기 위해서 유해를 보관하고 있기는 했다.

지하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을 것이다.

한 줌이 되어 항아리에 담겨 있으니.

모든 죽음은 그렇게 덧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돌려주시겠습니까? 캘리엇 백작이 가는 길을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습니다.”

레니샤가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외롭지 않게라. 참 다정도 하군. 내가 아는 그대는 그렇게 다정한 성정이 아니었던 듯한데.”

“저도 사람이 되어 가나 봅니다. 이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더군요. 이 모든 건 카시우스의 덕일지도 모릅니다, 폐하. 카시우스는 제가 모르는 것들을 알더군요.”

렉서스가 이를 악물었다.

레니샤가 놈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못마땅했다.

한 자리를 서성거렸다.

여기서 렉서스가 거절하면 레니샤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등을 돌려 나가버리겠지?

차라리 그 유해를 내어주고 레니샤에게…….


“캘리엇 백작의 죽음은 나도 안타깝게 여기고 있으니 그 간청을 못 들어줄 것도 없지. 대신에 나도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면?”

레니샤가 고개를 느리게 기울였다.


 


“내가 내린 저택으로 들어와라.”

“폐하께서 내리신 저택이라니.”

레니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내가 네게 내린 저택이 있지 않으냐. 거기로 들어와 살아. 그러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뭐?”

“시키시니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폐하.”

무엇이 이상한가요?

레니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카시우스의 마음이 상할지는 모르겠으나…… 저택을 넓혀갈 수 있는 기회였다.

카시우스의 명성에 지금의 저택은 알맞지 않다.

새로운 저택을 수배해보려 했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그, 그래……?”

“네, 폐하. 내리신 선물이니 달게 받아야지요.”

렉서스에게서 전투 의지가 사라졌다.

레니샤가 그가 내린 저택으로 온다.

그의 지척으로 온다.

렉서스가 바란다면 언제든지 그곳을 찾아가서 만날 수 있으리라.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레니샤는 제도에 살던 여자니 이게 당연했다.

불편함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질 않나.

누리던 것을 그리워하고 있었겠지.


“……필요한 것은 내가 다 챙겨두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과한 선물을 내려주시는군요. 그러면 허락하셨으니 유해를 찾아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더 이상 렉서스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레니샤가 한 발 뺐다.

렉서스는 저택에 ‘레니샤만’ 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점을 짚이기 전에 도망치려는 거였다.

레니샤가 생긋 웃고는 렉서스 뒤쪽에 서 있던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그가 렉서스의 눈치를 보고는 종종걸음으로 왔다.


“나를 안내해주겠나?”

“네, 레니샤 님!”

“그럼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폐하.”

레니샤가 깔끔하게 돌아섰다.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렉서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세이렌에게 홀린 기분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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