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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새롭게 등장한 카드 (74/135)


74화. 새롭게 등장한 카드
2022.12.13.



 


“루나……?”

“오랜만이야, 카시우스.”

루나가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예의를 갖춰, 루나.”

키엔이 루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하고 쳤다.


“음. 공작 각하라고 불러야 하나?”

“그러든지.”

키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면 공작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나가 어느 정도 키엔을 흉내 내서 말했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루나의 태도가 어떻든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카시우스는 힘이 필요했다.

그가 단독적으로 다룰 수 있는 힘.

그리고 이족은 카시우스에게 해답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족들은 본디 기골이 장대하고 크고 신체적인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이족 전사 하나가 기사 열을 상대할 수 있었다.

탄압이 있었던 때에 이족들이 특히 검투사로 팔려나간 건 그런 이유였었다.


“오랜만이네, 루나. 그간 잘 지냈나?”

“그럭저럭. 공작 각하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웠다지요?”

루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힘을 이족들을 위해서 썼다면 참 좋았을 텐데. 초르파 평원에서 싸울 게 아니라 황제를 죽이고 우리의 땅을 되찾았다면…….”

“루나!”

키엔이 이번 여정을 거치며 지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루나는 히엔트리에 대한 반감을 가감 없이 드러내곤 했다.

루나는 과거의 사건에 이족들의 잘못도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족들이 타국의 왕족을 죽인 덕분에 히엔트리는 전쟁을 감내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사가 희생되었다.

그것으로 왕족의 목숨값을 치른 것이다.

황제의 보복이 옳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따져보면 이족도 잘한 건 아니었다.

루나가 키엔을 뿌리쳤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렇다고 여기서 멋대로 떠들어댈 말은 아니지.”

뒤쪽에서 가냘픈 음성이 들렸다.

뭔가 대꾸를 하려던 카시우스는 입을 다물었고 키엔과 루나가 몸을 돌렸다.

응접실 문으로 창백한 여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금발을 늘어뜨리고 분홍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인형처럼 생겼다.

루나가 느낀 감상이었다. 잘못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기도 했다.


“귀족 나리시구만.”

“루나.”

키엔이 경고를 담아 그녀를 불렀지만, 태도는 나아지지 않았다.


“후. 공작 각하. 저런 여자랑 결혼하신 겁니까? 왜? 제도의 귀족이라던데. 저 여자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데? 이족을 부활…….”

“그만.”

레니샤가 날카롭게 말을 잘라냈다.


“그렇게 경우 없이 굴다가는 소리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걸 모르니?”

레니샤가 사근사근히 물었다.

말투는 부드러워도 담긴 뜻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 간극을 따라잡지 못한 루나가 눈을 깜빡였다.


“지금 뭐라고……?”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옆에 앉았다.

카시우스가 자연스럽게 레니샤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챙겨주었다.

레니샤가 비스듬히 루나를 올려다보았다.


“못 알아들었다면 유감이네.”

“내가 죽긴 왜 죽어! 죽는 건 히엔트리여야지! 이족들은 죄 없이 핍박당하고……!”

“내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셨지.”

“뭐?”

“이족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말이야.”

이 이야기는 카시우스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듯이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을 잡았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슬쩍 긁었다.

그를 달래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내 증조할아버지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아들의 친구. 그리고 그 친구의 사촌. 모조리 죽었지. 이족들의 아집으로 죽은 왕족 때문에 말이야.”

“그, 그건……. 실수였어! 알았더라면 절대로…….”

“사람이 죽고 나서 실수라고 말하면 살아나니?”

레니샤가 피곤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알았다면 살려주었을 거라고? 아니면 죽이고?”

레니샤가 날카롭게 웃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편향적이야.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하네?”

루나가 발끈했다.


“말도 안 돼! 우린 기개와 긍지를 아는 이들이야! 절대로 그렇게 치사하지 않다고!”

“방금 치사한 발언을 한 거 같은데. 왕족이면 안 죽였을 거라며. 왕족이 아니면 목숨이 두어 개쯤 되나?”

무슨 말인지 이해한 루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키엔은 루나를 입 다물게 만든 레니샤를 경이로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루나는 고집스럽고 남의 말은 듣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레니샤는 그런 루나의 고집도 이긴 것이다.


“덕분에 내 가족들도 죽었지. 네 논리대로라면 나는 널 미워하고 이곳에서 내쫓아야겠네?”

루나의 눈이 떨렸다.


“힐로샤인은 나의 땅이기도 하지. 내가 로테라 부인인 이상 말이야. 네 논리대로라면 나도 이족들을 미워해야 하니 힐로샤인에 그들을 들여선 안 될 거야. 그렇지?”

루나가 입술을 물었다.

이족들이 힐로샤인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루나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아도 된다는 기대감이었다.

한곳에 정착해서 오래도록 살아가게 된다면…….

이족들이 그동안 얼마나 염원하던 일이던가.


“카시우스, 그렇다네요. 이족들을 힐로샤인에 들이는 건…….”

“아니야!”

루나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이족들만 잘못한 게 아니었네.”

루나가 비굴하게 말했다.

그 누구에게도 꺾일 것 같지 않던 루나가 꺾이자 키엔의 눈이 커졌다.

루나를 이겨먹는 레니샤라니.

키엔은 앞으로 레니샤를 평생 존경하기로 했다.

단번에 루나의 입을 다물게 만든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어깨에 기댔다.


“원하던 바를 이룬 모양이군요, 카시우스. 이족들을 찾아냈으니.”

“네.”

카시우스가 머뭇거리다가 레니샤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 다정한 모습에 루나가 투덜거렸다.


“나는 다녀올 곳이 있어요, 카시우스. 손님들하고 편한 시간 보내요.”

“……어딜…….”

“아. 황성엘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요.”

카시우스가 벌떡 일어섰다.

그런 곳에 레니샤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루나와 키엔의 일은 잠시 미뤄두고…….


“카시우스. 난 혼자 다녀와야 해요.”

“어째서……?”

“죽은 캘리엇 후계들의 유해를 수습해오고 싶어서요.”

레니샤가 한숨 섞인 미소를 지었다.

렉서스가 그걸 빌미로 캘리엇 백작을 압박하고 있었다는 건 레니샤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럴 캘리엇 백작도 없으니 렉서스가 유골을 내어주길 기대하는 중이었다.

억울하게 죽은 이를 위해서 그 정도는 반드시 해주고 싶었다.


“최대한 눈길을 끌지 않고 다녀오려고 해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기사들을 데리고 가요.”

“네.”

레니샤가 순순히 대답했다.

걱정만 계속 듣느니 귀찮긴 해도 그들을 데리고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레니샤가 루나가 있는 쪽을 힐끗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캘리엇 백작이 죽고 나서 더 많은 감정을 공유한 그들의 사이는 한 발자국쯤 더 가까워진 듯했다.

레니샤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



“……저런 여자를 좋아했었어?”

루나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 순간 입이 막힌 게 수치스럽다.


“말조심해, 루나.”

카시우스가 조용히 말했다.

레니샤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는 건 그 누구도 참아줄 수 없었다.


“공작 부인이라고 제대로 존칭 붙여.”

“……좋아, 공작 부인. 저런 온실 속 화초 같은 여자를 좋아했었어?”

카시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루나와의 대화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렸지? 이주를 결정한 건가?”

“뭐. 그게 나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지.”

“나는 이족 전사들의 도움을 받길 원한다. 너희 수장은 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지?”

“그들이야 몸이 근질근질할 테니까.”

루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그 작은 여자에게 겁을 먹었다는 게 스스로도 용납이 되질 않는다.

레니샤의 하얗고 작은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루나보다 한 뼘은 작은데 그런 기백은 어디서 뿜어내는 건지.


“그런데 공작 부인은 어떤 사람이야?”

카시우스가 미간을 꾹 눌렀다. 키엔이 질린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카시우스는 오랜 대화 끝에 이족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힐로샤인으로 이주할 생각이 만만하다는 것.

그리고 카시우스를 도와서 무언가를 할 생각이 있으며, 이족의 수장 또한 각오하고 있다는 것.


“……훈련된 전사들이 필요해. 그들이 나와 같이 싸울 수 있는지도 궁금하고.”

“뭘 하려는 건데?”

루나가 뒤늦게 요점을 짚었다.

카시우스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황위 찬탈.”

“뭐?”

루나가 입을 벌렸다. 생각도 못 해본 주제였다.


“왜. 바라던 바가 아니었나?”

“그, 그건…….”

루나가 침을 삼키고 물었다.


“네가 그 자리에 앉는 건가?”

“아니. 황제가 될 사람은 따로 있어.”

카시우스의 눈동자에 빛이 스며들었다.

레니샤만 떠올리면 절로 웃음이 난다.

그리고 레니샤와 함께하는 무언가를 상상하면 더욱 행복해졌다.


“레니샤. 레니샤 로테라가 황제가 될 거야.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지? 지금 대답한 것 같은데.”

루나가 다시 입을 벌렸다.

그것 또한 생각도 못 해본 이야기였다. 레니샤? 레니샤.

생각보다 더 대단한 여자였다.

남편이었던 황제를 죽이고 그 자리에 앉겠다고.

아까 여자가 내뿜었었던 위압감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거다.

루나가 묘한 눈으로 카시우스를 응시했다.

카시우스를 다시 만나는 것을 고대했었다.

무슨 말을 할지. 어떤 걸 해야 할지. 혹은……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던 이가 살아서 영웅이 되었다고 하니 궁금했었다.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귀를 기울여 들었다.

그리고 카시우스가 루나를 기억하고 그녀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주책맞게 설렜다.

가슴이 떨렸었다.

카시우스도 루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니 과거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카시우스의 곁에는 루나와는 완전히 다른 여자가 있었다.

도자기 인형처럼 작고 예쁜 여자였다.

루나가 아무리 꾸미고 치장을 한다고 해도 레니샤처럼은 되지 못 하리라.

괜한 심술에 레니샤를 쿡쿡 찔러 보았는데 오히려 눌려 버렸었다.

가슴이 괜히 아팠다.


“짜증 나.”

“뭐?”

“뭐 그런 여자가 다 있어.”

루나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제멋대로 방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루나를 보며 키엔이 한숨을 내쉬었다.


“키엔.”

“네, 공작 각하.”

“이족들을 힐로샤인으로 이주시켜. 그리고 루나는…….”

카시우스의 표정이 흐려졌다.


“루나를 잘 지켜봐.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게.”

“레니샤 님을 지키는 게 아니라요?”

카시우스는 레니샤를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레니샤가 절대로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안다.

루나가 계속 저렇게 무례하게 군다면 레니샤는 루나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할 터였다.

이족들을 데리고 오려는 지금 그런 충돌을 피해야 한다.


“루나를 지켜봐. 사고치지 못 하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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