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돌아온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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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돌아온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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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돌아온 자들
2022.12.09.
레니샤가 게일을 스쳐 아래로 걸었다.
그러다가 멈춰 서서는 몸을 돌렸다.
레니샤의 분홍빛 눈동자가 분노로 반짝였다.
“아이들은 내가 데려가지.”
“레니샤 부인…….”
게일이 목이 메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캘리엇 백작이 되었으니 그가 배신자라고 온 세상에 천명하는 것과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게일을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일이 어깨를 떨었다.
어쩔 수 없다는 말로…….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캘리엇 백작을 죽였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로부터 보호자를 앗아갔다.
게일의 무릎이 휘청였다.
그가 저지른 짓의 무게를 이제야 알게 된 느낌이다.
게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저 아이들을 길바닥으로 내몬 건 자네야, 게일.”
레니샤가 여상한 얼굴로 하나, 하나 짚어주었다.
레니샤의 뒤로 카시우스가 보였다.
카시우스의 무표정한 얼굴이 게일을 두렵게 만들었다.
여기에 있는 모두가 게일을 비난하고 있었다.
게일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누군가 그의 뒤에 대고 검을 겨누고 있는 것 같은 서늘함이 느껴졌다.
게일이 눈을 깜빡였다.
“자네는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레니샤 부인, 저는……. 캘리엇 백작께서는 그것을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게일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두려움이 그를 잠식시키는 듯했다.
“그분께서는 저를 먼저 헤아려주셨을 겁니다. 제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레니샤가 고개를 느리게 기울였다.
“게일. 자네는 내 사람이 아니야. 내 사람은 캘리엇 백작이었지.”
레니샤가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내 사람을 위하려는 것뿐이야. 캘리엇 백작의 의지가 아닌 나의 의지로.”
게일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 그래도 저는……. 저는 레니샤 부인과 캘리엇 백작을 존중해서…… 지켜드렸습니다.”
게일이 입술을 달싹였다.
주변 눈치를 보는 꼴로 보아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법했다.
레니샤의 비밀을 전부 털어놓지는 않았다는 거겠지.
레니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키지 말지 그랬나.”
“네?”
“자네는 지금 자네 입으로 내게 증명했지.”
레니샤의 미소가 장미처럼 활짝 피었다.
고혹적인 아름다움이었지만 게일에게는 그 또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낯으로 웃을 수 있는 여자라니.
절대로 녹록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네가 언제든지 나를 배신할 수 있다는 걸 방금 증명한 것 아닌가? 나의 비밀을 지킨 것을 생색내려 하고 동시에 협박하려 했겠지.”
게일이 하얗게 질렸다.
“내게 자네를 죽여야 할 한 가지 이유가 더 늘어났군.”
게일의 떨림이 온몸으로 번졌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게일을 범람했다.
이 자리에서 당장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거 아나, 게일?”
레니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바보가 아니야. 렉서스가 내가 숨긴 비밀을 알아내는 건 시간 문제라는 걸 알아. 그런데 내가 아무 방비도 하지 않았을까?”
웃음기가 가득했다.
“설마.”
레니샤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로테라가 또 당할 만큼 나약해 보이던가? 나약한 건 우리가 아니라 자네겠지.”
게일은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레니샤가 생긋 웃었다.
더 이상 게일을 상대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레니샤가 떠나자 장례식장이 한산해졌다.
그 누구도 게일의 곁에 남지 않았다.
장례식은 투리엘이 마무리 지었다.
투리엘 또한 캘리엇 백작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다.
캘리엇 백작을 메테오와 함께 힐로샤인으로 보낸 건 그녀였으니.
투리엘이 경건한 마음으로 모든 의식에 임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일에게 투리엘이 손을 내밀었다.
“딱 한 번의 실수는 용서받을 수도 있는 법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투리엘이 레니샤를 닮은 미소를 지었다.
레니샤는 게일을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절박한 게일에게 투리엘이 손을 내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게일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뿐이었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제 가족만 살려주십시오.”
게일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투리엘이 웃음을 흘렸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내 주인께서는 관대하고 공정하시지. 자네가 내어주는 대가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걸세.”
게일은 그 순간 깨달았다.
황제가 아니라 캘리엇 백작을 선택할 수도 있었구나.
황제의 뜻에 굴복하지 않고 캘리엇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구나.
게일이 뜨거운 눈물을 터뜨렸다.
바닥에 엎드려 꺽꺽거리는 게일을 투리엘이 찬 시선으로 응시했다.
레니샤는 게일의 가족들의 목숨은 보장했지만 게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게일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다.
“황제의 후계자를 없애게, 게일.”
투리엘이 명령을 내렸다.
“배, 배 속의 아이를……?”
“그리 잔인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게일. 우리가 바라는 건 ‘박탈’이지. 그 애가 황제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만 밝혀주면 돼.”
“그 무슨……?”
“증인도 있고 증거도 있네. 그런데…….”
투리엘이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진단 말이지.”
아이의 아비가 살아 있었다면 더 쉬웠을 것을 그렇지 못했다.
“황제의 아이가 자네의 아이라고 주장하게.”
그렇다면 아이의 아비를 만들어내면 되는 것 아닌가.
진실 여부는 상관없었다.
한순간이라도 의심을 심어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한다면 자네의 가족들은 살 수 있을 걸세.”
게일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사지로 떠밀렸다.
눈앞에 펼쳐진 가시밭길이 보이는 듯했다.
게일이 눈을 깜빡였다.
앞은 절벽, 뒤는 적군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정해져 있기는 했었나.
게일이 고개를 떨궜다.
죽음이 맞았구나.
레니샤는 그에게 죽음을 예고한 거였다.
***
레니샤가 몸을 웅크리고 침대에 누웠다.
카시우스가 느리게 오르고 내리는 몸을 끌어안았다.
레니샤는 지난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죽은 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호소하는 통에 카시우스도 잠들지 못했었다.
카시우스가 입술을 내려 목덜미에 낙인을 찍었다.
“……쉬이. 좀 자도록 해요, 레니샤.”
레니샤가 뻑뻑한 눈을 깜빡였다.
캘리엇에서 데려온 아이들은 유모들이 데리고 갔다.
아이들을 알아서 씻기고 먹일 것이다.
머리가 멍멍했다.
잠을 자지 못해 그런 건지 아니면 마음이 무거워 그런 건지 모르겠다.
“……잠이 오질 않아요.”
“어제도 자지 못했잖아요.”
카시우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는 레니샤를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뜨거운 열기에 레니샤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따뜻했다.
곤두서 있었던 레니샤의 마음이 가라앉을 만큼.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눈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뻑뻑했던 눈이 감겼다.
레니샤가 나른한 숨을 흘렸다.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캘리엇 백작이 살아오진 않아요. 그리고 내 부모님도……. 죽어간 기사들도 그렇죠.”
“최소한 나는 죽지 않겠습니다.”
“…….”
“당신을 슬프게 하지 않겠습니다. 죽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고. 항상 이 자리에서.”
레니샤가 침을 삼켰다.
어쩌면 이게 레니샤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레니샤로 인해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도 충분하지 않았나.
렉서스는 레니샤의 인생을 파괴하기 위해서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부수고 또 부쉈다.
“당신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레니샤가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렉서스가 어떤 사실을 알게 됐건 간에 분명히 손을 쓸 것이다.
다행인 건 더 이상 로테라가 죄인의 가문이 아니라는 거다.
렉서스가 제 손으로 그들을 복권 시켰으니.
헤일린과 브릭스턴, 이사벨라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었다.
렉서스는 힐로샤인에 어떤 이유로도 기사들을 들일 수 없었다.
제도의 기사들이 렉서스의 손아귀에 넘어갔으니 불안하기는 했지만, 힐로샤인의 기사들도 뒤지진 않는다.
힐로샤인에서 렉서스의 사람들이 죽는다고 해도 그는 그것을 빌미 삼아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죄 없는 귀족을 핍박한 꼴이 될 테니.
아무리 렉서스가 멍청해도 그런 짓까지 벌일까.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들어 갔다.
그녀의 눈이 깜빡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카시우스의 손바닥에 걸렸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 위에 제 손을 덮었다.
카시우스가 진득하게 레니샤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그대로 자요, 레니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누군가 또 다치거나 죽으면…….”
“오늘 밤만은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그걸 카시우스가 어떻게 알아요?”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저 말도 안 되는 자만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믿고 싶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품에 스스로를 숨겼다.
카시우스가 있어 다행이었다.
이렇게 무력하고 스스로가 싫어질 때 숨을 수 있는 품이 있었다.
레니샤가 느린 속도로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 밤만큼은 평화롭기를 바라며.
***
카시우스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평화롭게 잠든 레니샤의 작은 얼굴이 카시우스의 시선 끝에 걸렸다.
짙은 피로감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레니샤…….”
왜 자꾸 레니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건지 모르겠다.
이 정도면 끝났겠지 싶을 때 세상은 그녀의 뒤통수를 치곤 했다.
이번처럼.
레니샤를 대신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카시우스가 조심스럽게 레니샤의 뺨을 쓸었다.
“레니샤…….”
레니샤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레니샤는 그들 모두를 아끼고 존중한다.
그렇다면 카시우스는 레니샤에게 어떤 사람일까?
카시우스의 눈동자에 욕심이 서렸다.
레니샤는 카시우스의 가족이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욕심은 끝이 없었다.
가지고 또 가지고 싶어진다.
레니샤의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고 특별함이 되고 싶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카시우스가 느리게 허리를 굽혔다.
레니샤의 뺨에 키스한 카시우스가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향해 느끼는 모든 욕심 위엔…….
“울지 말아요, 레니샤.”
애틋함이 있었다.
“나는 당신이 울면 너무 무기력해져. 아무것도 못 하는 멍청이가 된 것처럼.”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황성으로 들어가 렉서스의 목을 베어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목전에 도착하기도 전에 카시우스의 목이 잘리겠지.
죽지 않기로 약속했으니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카시우스의 번뇌가 깊어감에 따라 밤도 깊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카시우스의 고민을 해결해줄 새로운 카드들이 도착했다.
“키엔.”
“다녀왔습니다, 공작 각하!”
그 옆에는 큰 키에 머리를 높게 묶은 여자가 서 있었다.
“이쪽은 루나입니다.”
이족들이 그에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