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예고 (72/135)


72화. 예고
2022.12.06.



 
루나가 눈을 깜빡였다.

제도에는 발 들일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황제가 등극하기 전, 선대 황제 시절에 이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다.

그 이후로 이족들은 제도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두려워했었다.

루나 또한 여기에 발을 들이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던 것이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네.”

“그럼. 뭐가 다를 줄 알았나?”

이제는 한결 편해진 키엔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괴물이라도 사는 줄 알았지.”

선대 황제 시절에 이족 탄압이 있었던 것은 그 당시에 이족들과 제국민들 사이에 있었던 분쟁 때문이었다.

당시 이족들은 폐쇄적인 경향이 강했다.

그들 스스로를 가두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음은 물론, 제국민들이 그들이 그은 경계를 넘는 것 또한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러던 중에 길을 잃은 여행자들이 이족들의 땅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했었다.

이족의 전사들은 그들을 죽였다.

이족들의 율법에 따라 처리한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히엔트리를 여행하던 타국의 왕족이었다는 데 있었다.

히엔트리는 그로 인해서 곤욕을 치렀고 선대 황제는 더 이상 이족들의 횡포를 두고 볼 수 없다며 학살을 벌인 것이다.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히엔트리 황제는 이족들 덕분에 전쟁에 나간 아들을 잃었어야 했으니.

제국민들은 이족들을 야만인 내지는 살인자로 생각했다.

색안경을 끼고 보는 통에 이족들도 제국민들을 기피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키엔이 루나의 소매를 붙들고 이끌었다.


“그렇게 촌스러운 티를 내면 저 사람들도 우리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릴 거야. 이상한 걸 알아차리면 의심하겠지. 이족들에 대한 편견은 여전해. 저들에게 우리는 여전히 야만인이거든.”

“…….”

루나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태연하게 행동해. 사실 우리나 저들이나 생김새는 다를 게 없으니까. 눈이 3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키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키엔이 루나를 가로질러 앞장섰다.

카시우스가 제도로 왔다고 하면 갈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카시우스가 처음으로 하사받은 저택.

오랜만에 마시는 제도의 공기에 키엔의 가슴도 부풀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출발을 했다.

이족들도 이제 그들과 함께 새 출발을 할 때였다.

***



“……캘리엇 백작이?”

레니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런 소식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캘리엇 백작은 고목 같은 사람이었다.

언제고 그 자리를 지킬 것 같은 사람.

하지만, 대단한 영웅에게도 마지막은 있었던 모양이다.

죽음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와 캘리엇 백작을 집어삼켰다.

어두워진 눈동자가 훼손된 시신 위를 배회했다.


“레니샤…….”

“죽을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레니샤가 느리게 무릎을 굽혔다.

현실 감각이 없었다.

내일이 되면 캘리엇 백작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깟 걸로 죽을 것 같으냐고 말할 것 같았다.

레니샤의 떨리는 손이 캘리엇 백작의 문드러진 손을 붙들었다.


“그대가 이렇게 허망하게 갈 줄은 몰랐는데.”

푸르스름해진 시체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레니샤는 무엇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캘리엇 백작.”

불러도 대답이 없다.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이 깊은 공허는 사람들을 좀 먹는 것 중 하나였다.

레니샤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일어나게, 백작.”

레니샤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캘리엇 백작을 레니샤가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캘리엇 백작이 레니샤와 로테라를 위해서 힐로샤인으로 메테오를 데리고 오는 일을 떠맡지 않았더라면.

레니샤가 까끌한 침을 삼켰다.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반복해서 겪으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죽음이라는 건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을 듯했다.


“캘리엇 백작……. 나는 경을 이렇게 잃을 수 없네. 그러니 일어나.”

레니샤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위해서 싸워주겠다고 했었지. 나를 위해서 검을 들겠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뜻을 이루고 나면 나중에 내 부모님 앞에서 할 말이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레니샤가 흐느낌을 흘렸다.

참아내지 못한 감정이 흘러넘쳤다.

카시우스가 손짓으로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을 물렸다.

코를 훌쩍이던 이들이 물러섰다.

린데이로 하여금 이 일을 투리엘에게 알리도록 지시를 내렸다.

카시우스가 모든 일을 처리하고는 레니샤에게로 돌아왔다.

레니샤는 내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일어나게, 제발.”

레니샤가 끝없이 간청했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어깨를 짚었다.

강한 척하지만 그 속에는 여린 마음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카시우스는 알고 있었다.

레니샤는 누구보다 자신의 사람들을 아낀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시험할지언정 한번 준 정은 거둬들이지 못했다.

힐로샤인으로 가던 여정 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레니샤는 힘든 여정을 함께하는 자신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챙겼다.

그들이 밥은 제대로 먹는지, 잠자리가 과하게 불편하진 않은지, 아프진 않은지.


“레니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카시우스, 캘리엇 경을 일으켜줘요. 경을 깨워줘. 저 사람이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사람이……. 사람이 아닌데.”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붙들었다.

캘리엇 백작의 억울한 죽음은 이대로 묻힐 것이다.

렉서스는 캘리엇 백작을 찾지 않는다.

아마도 렉서스가 캘리엇 백작의 죽음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황제가 저지른 일이니 모두가 일을 덮을 것이고…….


“이대로 잊히게 둘 수는 없어요, 카시우스.”

레니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 해야 할 게 많은 사람이에요. 카시우스, 당신이 죽은 땅도 살려냈으니까……. 그러니.”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매달렸다.

카시우스는 항상 레니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준다.

그러니, 이번에도.


“당신은 내가 바라는 건 다 해주잖아요, 카시우스.”

레니샤가 어린애처럼 졸랐다.

레니샤가 이런 모습을 마음 편히 내보일 수 있는 것도 카시우스뿐이었다.

카시우스는 레니샤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품 안에서 마음껏 무너졌다.


“살려줘요, 카시우스.”

레니샤가 울분이 가득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 레니샤.”

카시우스가 안타까움을 가득 담아 말했다.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한계는 분명 있었다.

아무리 카시우스가 붉은 뱀의 힘을 가지고 있어도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었다.

그건 침범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었다.


“……미안해요.”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안았다.

여전히 레니샤는 작다.

카시우스의 반절도 안 될 것 같았다.

부서질 것 같은 레니샤를 끌어안고서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캘리엇 백작은 당신을 이해할 겁니다, 레니샤.”

“나를……? 나는 캘리엇 백작을 지키지 못했어요. 내가 만약 그에게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캘리엇 백작에게 사람을 붙였더라면……. 내가…….”

“레니샤, 당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어요. 당신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돼요. 응?”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떨림이 멎을 때까지 등을 쓸었다.

레니샤의 흐느낌이 잦아들 때까지.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러줄 거예요.”

“그렇게 해요.”

“세상 사람들이 전부 캘리엇 백작의 죽음을 알 수 있게…….”

그가 가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레니샤가 눈물을 삼켰다.

그녀가 가는 길이 절대로 깨끗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레니샤는 앞으로도 많은 죽음을 초래하고 겪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죽음을 마음에 담겠지.


“나는……. 절대로 잊지 않을 거예요.”

레니샤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의 서투른 위로가 레니샤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레니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렉서스로부터 구해냈었던 캘리엇 가문의 어린아이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레니샤는 그들을 구한 게 아니었다.

레니샤는 그들로부터 마지막 울타리를 빼앗은 약탈자였다.

레니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잊지 않는다.

절대로, 잊지 않는다.

레니샤가 몇 번이고 되새겼다.

***

카시우스가 캘리엇 백작의 시신을 수습했다.

훼손된 시신을 캘리엇 백작가의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감싸서 장례식을 준비한 것이다.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기 어려울 나이에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이젠 아이들을 돌봐주던 캘리엇 백작마저 잃은 것이다.

장례식은 레니샤가 직접 예우를 갖춰 준비했다.

레니샤가 창백한 얼굴로 캘리엇 백작의 가슴 위에 흰 국화를 올렸다.

어린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쭈뼛거리며 레니샤를 따라 국화를 올렸다.

뒤를 돌아 유모의 품으로 달아난 아이들이 칭얼거렸다.


“여기 이상해. 가면 안 돼?”

“아가씨…….”

“이상한 냄새도 난단 말이야. 할아버지는 언제 와?”

흐느끼는 유모들을 조르는 아이들은 천진했다.

레니샤가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장례식장에 배신자가 도착했다.


“게일 캘리엇.”

레니샤가 비소를 머금었다.

항상 캘리엇 백작의 옆에 있던 남자였다.

수족과도 같은 이라고 했었지. 어떤 면에서는 조카보다 낫다고.

캘리엇 백작은 게일을 가족보다 더 가깝게 여겼는데, 게일은 제 편의를 위해서 캘리엇 백작을 버렸다.

항상 주고받는 관계가 동등할 순 없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새삼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레니샤 부인.”

게일이 레니샤 앞에 고개를 숙였다.

게일이 레니샤의 비밀에 대해서 무엇을 고해바쳤는지는 모른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으니 레니샤도 그에 대비해야 할 때였다.

게일은 브릭스턴과 헤일린, 그리고 이사벨라에 대해서 전부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렉서스는 어디까지 알게 된 걸까?

새삼 심장을 죄이게 만드는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여태까지 안일했던 거지. 레니샤가 입귀를 비틀었다.

아무 일 없는 평화에 젖기라도 한 걸까.

의심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사람들을 받아들였었다.

레니샤의 경계심 가득한 눈빛에 게일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것 아나, 게일?”

“…….”

“자네는 모든 걸 돌려받게 될 걸세.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

레니샤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의 좌절은 잊은 듯 꼿꼿하게 위엄 넘치는 자태였다.

레니샤의 등 뒤는 카시우스가 단단하게 지키고 있었다.


“나는 내 사람을 해친 자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레니샤가 게일의 눈을 마주하고는 또박또박 말했다.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지.”

“레니샤 부인, 저는……. 저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닙니다.”

게일이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그래? 그럼 나도 미리 말해두지.”

레니샤가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분명 아름다운 미소인데 왜 이렇게 소름이 끼치는지.

게일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나도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닐 거야, 게일.”

그건 죽음의 예고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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