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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드러나는 거짓 (71/135)


71화. 드러나는 거짓
2022.12.02.



 
카나리아는 카나리아가 지켜야 한다.

바바라를 돌려받고 싶다면 그 또한 그녀가 해야만 했다.

물론, 카나리아는 가장 쉬운 길을 알고 있었다.

레니샤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기는 것이다.

굴욕적인 자세로, 모든 걸 내려놓고, 무엇도 가진 적 없는 것처럼.

카나리아가 입술을 물었다.

바바라를 그렇게 구한다고 치자.

바바라는 카나리아의 비밀을 지켰을까?

아니면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서 털어놓았을까.


“어떡해…… 어떡하냐고!!”

카나리아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레니샤는 돌아오자마자 카나리아의 우환이 되었다.

카나리아의 편이 되었다고 생각했었던 투리엘은 바로 레니샤에게로 돌아섰다.

카나리아는 결국 이룬 게 아무것도 없었다.

***

바바라가 머리를 헤집었다.

굶주림이란 게 이토록 독한 거였나?

고작 이틀이다, 이틀.

바짝 마른 입술은 덜덜 떨렸고 바닥에 고인 물마저 핥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바바라는 그녀의 상황을 차근히 짚어 보았다.

그 자리에 있었던 귀부인들이 모두 동조했다.

바바라를 멍청이로 만드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녀를 보던 싸늘한 눈빛과 그들의 정점에 서 있었던 레니샤가 차례로 떠올랐다.

무심한 듯이, 태연하게 서 있었지만 상황을 조작한 건 레니샤이리라.

카나리아와 바바라는 보기 좋게 놀아난 것이다.

모든 정황상 근거가 맞아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바바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카나리아는?

가진 거라고는 렉서스가 내어주는 알량한 애정뿐이다.

황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낼 때는 현실감각이 바닥치기라도 한 것인지 모든 일이 다 괜찮을 거라는 안일함에 빠져 있었다.

카나리아가 바바라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납작 엎드려서 레니샤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

고압적으로 굴면서 황후인 체할 게 아니라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것!

바바라의 이성이 빠르게 식었다.

꿈을 좇을 때가 아니다. 일단 살고 봐야지.


“카나리아…….”

바바라의 목소리가 한껏 갈라졌다.

카나리아는 바바라를 위해서 자신을 내던질 이는 아니었다.

바바라가 간절한 손을 뻗었다.

벽에 달려 있었던 헤진 장식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뭐든 말할게! 뭐든!!”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게 뭐라도 좋아…… 내가 아는 건 다 말해줄 테니까…… 제발.”

바바라가 무너졌다.

***

레니샤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바바라는 제 삶이 다하기 전에 입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바바라는 역시 무엇보다 자신의 안위가 중요한 사람이었던 거다.

바바라는 투리엘의 의상실 지하에 갇혀 있었다.


“오셨어요?”

투리엘이 뿌듯하게 웃었다.

스스로가 맡은 바를 완벽하게 해냈다는 자부심이 가득 서려 있었다.


“고작 3일을 못 버티는군.”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뭐, 애 먹이지 않아서 좋다만.


“애초에 신뢰와 애정을 기반으로 형성된 관계가 아니었는걸요. 저희랑은 달라요, 레니샤 님.”

투리엘이 고양이처럼 미소 짓고는 레니샤의 옆에 붙어섰다.

레니샤가 투리엘의 팔을 부드럽게 쥐었다가 놓았는데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상을 받은 것처럼 투리엘의 만면에 미소가 흘렀다.

바바라가 갇혀 있던 문이 열렸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지하실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투리엘이 손짓하자 그녀의 수족과 같은 직원들이 고소한 냄새가 나는 음식을 들고 뒤쪽에 섰다.

바바라의 눈이 돌아가는 게 보였다.

또각.

레니샤의 구두 소리가 유독 크게 지하실을 울렸다.


“할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하, 할 말이 있지!”

바바라의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

강렬한 열망으로 빛나는 눈동자였다.

오랜만에 맡는 음식 냄새에 코는 벌름거리고 위장에는 신물이 흐르는 듯했다.

바바라가 몸을 뒤틀었다.


“다 이야기해줄게. 바라는 건 다 말할 수 있어! 카나리아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건 없…….”

“누구의 씨지?”

레니샤가 느릿하게 질문을 던졌다.


“뭐?”

바바라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누구의 씨냐고 물었잖니. 설마 들리지도 않는 거야?”

레니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홍색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광기가 맴돌고 있었다.

바바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누, 누구의, 씨, 씨냐니!”

“카나리아 배 속에 있는 아이 말이야. 그 아이가 렉서스의 씨일 리는 없고.”

“그, 그게 말도 안 되는……! 이건 황족 모독이야! 황제께서 절대로 용서하지……!”

“렉서스는 여기 못 와, 바바라. 네가 렉서스 앞에 가서 내 죄를 고해야 한다는 건데 그럴 기회가 있을까?”

“나를…… 죽일 거야?”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는 걸 모르는구나.”

레니샤가 눈가를 접어 흐드러지게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꼭 이렇게 멍청한 이들이 있지. 레니샤가 혀로 입 안을 굴렸다.


“너는 지금 굶어 죽어가고 있는 거야, 바바라. 배고파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니?”

바바라가 덜덜 떨었다.

지난 3일간 바바라가 반복적으로 했었던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죽이겠나 싶어 버티다가도 한계에 달해 줄을 잡아당겼다.


“네가 죽는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까. 네가 뭐라고.”

“너, 너…….”

“바바라. 내 눈을 봐.”

레니샤가 허리를 굽혔다.


“내가 제정신으로 보이니? 이 두 눈으로 잘려서 소금 상자에 실려온 부모의 머리를 봤지. 이 두 눈으로 내 남편이 내 발이나 닦던 하녀와 놀아나는 것을 보았고. 이 두 눈으로 내 남편이 내 가족들을 박살 내는 것을 지켜보았단다.”

레니샤가 제 손가락으로 눈가를 가리켰다.

언젠가는 봄날처럼 따뜻하기만 했을 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눈 안에는 증오심과 악으로 똘똘 뭉친 여자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내가 정말 제정신일 거라고 생각하니? 얻어야 할 게 있는데 내가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

바바라가 저도 모르게 레니샤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몸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그러니 사실을 털어놓는 게 좋아, 바바라. 네가 여기서 어떤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고 해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세상이 너를 찾아줄 것 같니? 카나리아조차도 찾지 않고 있는 너를?”

“카, 카나리아가……?”

“그 애가 뭘 할 수 있겠니. 나를 찾아와 비는 것 말고는. 오긴 왔었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너를 찾더구나. 입술을 달싹거리며 너의 안부를 물었단다.”

카나리아가 온 건 어제였다.

카시우스의 저택으로 찾아와 주눅 든 상태였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피폐해져서는 눈가가 그늘져 있었다.


“네 주인은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더구나. 아무도 자신을 돕지 않을 걸 알고 있었지. 답은 나뿐이라고.”

“그, 그래서……?”

“그것뿐이야, 바바라. 카나리아는 고작 그것을 했단다. 나를 찾아와 네 안부를 묻는 것. 네가 살아 있느냐고 물었지.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서 내 앞에 무릎조차 꿇을 수 없었던 거야. 그러면 너는 누가 구해주는 거지?”

바바라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기대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기대하고 있었는지 배신감으로 속이 뒤집혔다.

카나리아가 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바바라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가 알량한 의리로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카나리아는 무릎을 꿇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황제의 아이?! 누군지도 모르는 씨를 밴 주제에!”

바바라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 아이는…… 내 연인의 아이지. 황제에게만 허락해야 할 몸을 누구인지도 모를 사내에게 허락한 거야! 아이를 가져 황후가 되겠다는 이유로 말이야!!”

바바라가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내가 다 아는데! 내가 다 알고 있는데!!”

“그래서 그 아비는 어디에 있지?”

“죽었어. 어설픈 계집이 어디서 그런 건 배운 건지. 아이를 가지고 나서는 남자를 죽여야 한다고 하더군.”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바바라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애썼는가.

연인에게 독약까지 건네 가며 말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나는 것은 시원한 물 한 잔과 따뜻한 수프뿐이었다.

그녀의 위장을 채울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너는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거야, 바바라. 증거가 있니?”

“증, 증인이 있어!”

바바라가 간절하게 외쳤다.

그렇지.

카나리아에게 버림받을 것을 대비해서 무언가를 남겨놓았을 줄 알았다.


“카, 카나리아가 그 남자하고 시간을 보낸 별장 관리인. 그 여자가 모든 걸 알아. 돈을 받고 입을 다물어주기로 약속했어!”

레니샤의 미소가 깊어졌다.

투리엘이 그런 레니샤를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투리엘.”

“네.”

“그 여자를 우리가 가져야겠다.”

“조치하겠습니다.”

바바라의 앞에 음식이 던져졌다.

바바라가 게걸스럽게 그것을 먹어 치웠다.

그녀를 가두고 있던 문이 열렸으나, 바바라는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알았다.

더 이상 바바라가 갈 곳은 없다는 것을.

***

한편, 카시우스는 알 수 없는 사체가 제도 밖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을 향했다.

캘리엇 백작의 기사들은 돌아왔는데 그는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조사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힐로샤인에서 카시우스와 잘만 어울리던 기사들은 그를 피하기 급급했다.

캘리엇 백작의 행방에 대해 물어도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말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계셨습니까.”

카시우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떠나기 전 그를 향해 미소 짓던 캘리엇 백작이 떠오른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걸 알았다면 좀 더 길게 그를 붙들어 두었을 텐데.

카시우스가 참담한 심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카시우스가 배움을 청했을 때 제도에서 만나자던 캘리엇 백작은 지금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캘리엇 백작처럼 노련한 기사가 이런 꼴로 홀로 버려졌다면 필시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던 것일 테다.

비정한 이들의 술수에 마음이 턱 하고 막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백작님.”

카시우스가 손에 쥐고 있던 담요를 캘리엇 백작의 사체 위로 덮었다.

여러 가지 후회가 그를 뒤덮었다.

힐로샤인의 기사를 붙여줄 것을 그랬다.

아니, 카시우스가 직접 그를…….


“공작 각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이 수하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카시우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각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알아보게. 타의에 의한 죽음일세.”

“네, 각하.”

기사들이 캘리엇 백작의 사체를 들것에 실었다.

야생짐승들에게 물어뜯긴 사체가 더할 나위 없이 가볍다.

한 시대를 풍미했었던 기사의 억울한 죽음이었다.

카시우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드시 이 죽음의 전말을 밝혀내리라.

그리고 머지않아 카시우스는 그 범인을 알 수 있었다.

게일 캘리엇.

새로운 캘리엇 백작이 등극한 것이다. 렉서스의 지목으로!

범인은 바로 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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