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각자 다른 길
(7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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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각자 다른 길
2022.11.29.
“헨리, 잘하고 있어요!”
이사벨라가 앙증맞은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 조심!”
헨리가 이사벨라의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계단을 내려가는 느릿한 발에는 보이지 않는 공포와 망설임이 잔뜩 묻어 있었다.
헨리는 이사벨라를 믿는다.
이사벨라는 누군가에게 악의를 가지고 기만을 일삼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이 저택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해도 이사벨라만큼은…….
흐릿하게 보이는 어린아이의 형체를 보며 헨리가 이를 악물었다.
황제에게 편지를 쓰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다.
눈이 보이질 않으니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제에게 버림받기 전에, 혹은 그가 배신했다고 오해하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데…….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건.
이사벨라.
헬레나.
제인.
헨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이를 어쩐다.’
돌파구가 꽉 틀어막혀 있었다.
어디로 가도 어두운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는 것만 같다.
보이지 않는 공포보다 렉서스가 선사하는 공포가 더 컸다.
렉서스가 금방이라도 힐로샤인으로 사람을 보내 헨리의 목숨을 완전히 끊어놓을 것 같았다.
헨리가 렉서스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항상 단정하고 깔끔하게 하고 다니던 노신사의 모습이 헝클어졌다.
엉망이 되어가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헨리가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느리게 쓸어 넘겼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건지 몸에서는 냄새가 나는 것 같고 옷차림은 추레했다.
길에서나 보던 비렁뱅이들처럼 변해가는 것이다.
무엇을 놓아야 할까.
렉서스의 손일까, 아니면…….
헨리의 뿌연 시선이 이사벨라를 향했다.
“아주 잘했어요, 헨리! 그렇게만 하면 계단을 내려올 수 있어요!”
누구보다 맑게 웃는 저 여자아이일까.
***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로 차 있었다.
기둥 뒤에 모여서 이사벨라만 지켜보고 있는 기사들이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칫. 저 노인네가 우리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 아냐?”
“이사벨라한테? 사지가 찢겨 죽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눈빛이 영 싸하단 말이야. 자네, 저런 작자들이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게 가장 무서운 거라고.”
이사벨라는 절대로 혼자가 아니었다.
아이가 헨리를 돕고 싶어 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걸 저택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덕분에 헬레나와 제인을 제외하고도 모두가 헨리와 이사벨라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네.”
“소공작님……!”
“이제는 그리 부르면 안 되지. 그냥 브릭스턴이면 족해.”
“브릭스턴 님.”
가장 멀찍한 곳에 서 있던 브릭스턴이 사람들 사이로 걸어왔다.
브릭스턴이 팔짱을 낀 채로 이사벨라를 주시했다.
“저 아이가 다쳤을 때 도움을 준 노인이 있다지? 그 의사는 어떻게 되었나?”
“……사망했습니다. 본디 죽음을 앞두고 전쟁터 의사로 지원한 자였던 터라.”
“아하. 헨리를 보면 그 의사 생각이 나는 것 같더군. 돕고 싶어 해.”
분명 세상을 원망할 만도 한데 이사벨라는 맑고 밝기만 했다.
아이 자체의 천성인지, 그도 아니면 아이가 힘들 때 돌봐주고 손을 내밀어준 이들이 많기 때문인지.
“저 아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게. 만약, 헨리가 허튼짓하려 한다면…….”
“그렇다면요?”
“헨리를 죽여도 좋네. 내가 허락하지.”
“네!”
기사들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명령은 떨어졌다.
이제 헨리가 삐끗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헨리를 보는 기사들의 낯빛이 음험하게 번뜩였다.
***
한편, 황성.
게일이 캘리엇 백작의 전사 소식을 가장 먼저 황제에게 전했다.
캘리엇 백작은 마지막에 게일에게 전해야 할 소식과 전해선 안 되는 소식을 가려서 이야기하라고 했었다.
아무것도 전하지 않으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다고.
그 말이 오히려 게일을 부추겼다.
캘리엇의 죽음은 게일에게도 짙은 상처로 남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잊을 수는 없으니까.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서 그의 손을 잡고, 그를 부르고, 두 다리로 달려와 안기고.
아이가 안겨준 행복을 게일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렉서스가 게일을 가까이 불렀다.
“좀 더 가까이.”
솜털까지 전부 보일 거리가 되어서야 렉서스가 게일을 멈추게 했다.
게일이 렉서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어떤 이야기를 숨겨야 할까.
그곳에는 황제가 보낸 눈이 아직 남아 있었다.
게일이 뜨거운 침을 삼켰다.
그자와 하는 이야기가 아주 달라서는 안 된다.
‘아직 소공작에 관한 이야기는 모를 거야.’
듣기로는 황제가 보낸 헨리 집사장이 두 눈을 잃었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헨리가 팔아먹을 수 있는 건 단 하나.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들었지?”
“카시우스 공작이 뜻밖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힐로샤인은 황무지가 아닙니다. 풀이 돋아나고 나무가 자라지요.”
“호오…….”
렉서스가 비뚜름히 웃었다.
카시우스의 능력이나 그의 잘난 점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건 아니었다.
카시우스가 못났으면 좋겠다.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경멸 어린 눈동자로 볼 수 있도록.
렉서스를 보았듯이!
“공작과 레니샤 사이는 어때 보이던가? 레니샤가 그 노예 놈을 꺼렸겠지? 고귀한 피를 타고난 여자니, 분명히 놈을 천대했을 거야. 그렇지?”
렉서스가 정해진 대답은 하나뿐이라는 듯이 굴었다.
게일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제가 레니샤 님을 뵐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서요.”
이게 가장 적당한 대답이리라.
“그래서 두 분 사이가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건 또 그렇지. 죽은 캘리엇이 아니고서야 그 답을 어떻게 알 수 있겠어.”
렉서스가 킬킬대며 웃었다.
“노인네, 잘 죽었지. 그 뻔뻔한 낯짝으로 배신이나 일삼다니. 제 손주를 구해준 게 내 은혜라는 것을 잊은 게지. 캘리엇 백작가의 대는 그대가 잇도록.”
“예?”
게일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페, 폐하. 그것만은……. 그 명만은 거둬주십시오!”
게일이 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황제가 내린 명령이 무거운 추처럼 게일의 마음에 매달렸다.
존경하는 캘리엇을 게일의 손으로 살해했다.
제 가족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그 덕분에 캘리엇 백작가는 다시 한번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게일이 캘리엇 백작이 된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게일이 백작위를 노리고 백작을 살해하기 위해서 일을 꾸민 거라고 떠들어대겠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게일이 고개를 저었다.
“제, 제게 너무 과분한 자리입니다. 폐하, 거둬주세요.”
“아니지, 아니야. 캘리엇처럼 꼬장꼬장한 작자도 내 명령을 거역했는데 고작 너 따위가 나와의 의리를 지켜주지 않았느냐. 그에 대한 대가는 챙겨 받아야지.”
배신의 대가였다.
황제가 두 번이나 같은 말을 했으니 이것을 무를 리는 없었다.
더 이상의 의미 없는 반항은 오히려 게일을 위험하게 만들 뿐이다.
“명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좋아, 게일 캘리엇.”
렉서스가 빙긋 웃었다.
“또 무엇을 보았는지 이야기해봐.”
게일이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 그곳에서 어린아이를 보았습니다.”
소공작은 피해 가자.
게일의 머릿속에 경보가 울렸다.
소공작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가는 죽은 백작이 살아나서 그를 죽일 것 같았다.
“어린아이?”
“네. 외양은 다르지만, 확실합니다. 그 아이는 이사벨라 로테라였습니다.”
“하?”
렉서스가 차가운 탄성을 터뜨렸다.
이사벨라 로테라?
죽었거나 실종되었거나.
그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아니라, 멀쩡히 살아서 힐로샤인에 있다고?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레니샤가 제도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이유 말이다.
렉서스는 이런 상황에 그가 승기를 쥘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수백 가지는 말할 수 있었다.
아이의 목숨을 걸어두면 되는 것 아닌가!
희열이 치솟았다.
레니샤를 다시금 렉서스의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런 귀한 게 있었으면 응당 내가 가져야지! 그렇지 않나? 헨리는 왜 여태 말하지 않은 거지?”
“만나지 못해서 저도 상황을 전해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폐하. 힐로샤인 측에서 오가는 편지를 제한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게일, 자네가 가야겠어. 가서 헨리와 함께 그 아이를 데리고 와.”
“아이를…… 말씀이십니까?”
게일의 억지 미소가 깨어졌다.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아이를 판 것이다.
이게 정말로 옳은 일일까?
“헨리도 확인하게. 만약, 놈이 우리를 배신한 것 같으면……. 백작에게 쓴 독약을 똑같이 써도 괜찮겠지.”
렉서스가 느릿하게 선언했다.
절대로 무엇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요함이 돋보이는 말이기도 했다.
게일이 삐걱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예, 예. 폐하…….”
그가 캘리엇 백작을 팔아 얻은 게 고작 이것이었다.
제 아이의 목숨 대신에 다른 아이의 목숨을 파는 것!
짙은 자괴감이 게일을 휘어 감았다.
***
“바바라.”
투리엘이 부채 끝으로 바바라의 뺨을 콕 하고 찔렀다.
그러자 바바라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댔다.
바바라가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반항의 표현이었다.
카나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바라를 포기했다.
얄팍한 관계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바바라가 악독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나에게서 무엇도 들을 수 없을 거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투리엘이 유감이라는 듯이 말했다.
“나는 네가 곧 있으면 뭐든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거든. 무엇도 주지 말게. 물도, 밥도. 사람이 자기 자신보다 귀한 게 뭐가 있겠어.”
“퉤!”
바바라가 투리엘에게 침을 내뱉었다.
그게 투리엘에게는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바바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치사하고 비열한 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그런 거에 흔들릴 것 같아?”
바바라가 오기로 말했다.
“황후께서 나를 찾아오실 거야! 그 잠깐만 참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묶인 채로도 바바라가 다리를 구르며 악을 질렀다.
“카나리아가 널 찾아온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그, 그럼! 카나리아 님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 나밖에 없다는 걸 아신다고!”
“좋아, 그럼. 누구 말대로 되나 해보지, 뭐.”
투리엘이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반드시 바바라가 패배할 거라는 확신으로 가득한 낯빛이었다.
***
카나리아가 손톱을 톡톡 물어뜯었다.
바바라를 빼앗긴 건 악몽이나 환각이 아니었다. 실제였다.
카나리아는 정말로 혼자 남게 된 것이다.
“이, 이제 어떡해?”
카나리아는 혼란스러웠다.
아이를 지키는 방법도, 카나리아를 지키는 방법도 전부 바바라가 알려주지 않았던가.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서…….’
아니지, 아니야. 레니샤의 편을 들어줄 것이 자명했다.
카니라아가 습관적으로 배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