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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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미친
2022.11.15.
레니샤는 여유롭게 커피하우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도의 모두에게 레니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린 것이다.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린 채로 잔에 든 액체를 원수처럼 노려보았다.
카시우스의 손바닥보다도 작은 잔에 든 검은 액체가 살랑 흔들렸다.
“커피를 안 좋아하나요?”
“내가 마셨던 커피 중에 이게 가장 씁니다. 독약이 따로 없군요. 레니샤는 이런 걸 어떻게 마십니까?”
커피 중에서도 가장 진한 에스프레소를 시켰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레니샤가 작은 웃음을 머금었다.
“익숙해지면 괜찮아요. 그리고 잠이 확 달아나지 않아요?”
카시우스가 괜한 헛기침을 하며 제 앞의 잔을 레니샤 앞으로 밀어주었다.
“카시우스?”
“저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카시우스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걸 마시는 게 귀족들의 기본 소양은 아니겠지요?”
레니샤가 입술 앞에 주먹을 대고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려고 해도 도저히 참아지지가 않는다.
카시우스는 단것을 좋아하고 쓴 것을 지양한다.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라 그런지 모든 감정이 얼굴로 드러나곤 했다.
레니샤는 그런 카시우스라 좋았다.
카시우스의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레니샤.”
카시우스가 귓불을 붉힌 채로 볼을 긁적였다.
“아니, 아니에요. 이런 건 개인의 취향 차이지요. 카시우스가 싫으면 마시지 않아도 돼요.”
카시우스가 그제야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레니샤는 정말로 카시우스 덕에 웃는다.
“큼.”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웃던 레니샤가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웃깁니까?”
카시우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레니샤는 나를 보면 대부분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카시우스는 레니샤에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만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카시우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카시우스가 재밌어요.”
“그것도 좋긴 하지만…….”
“그래서 좋아. 당신과 있으면 심심할 틈이 없을 것 같거든.”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말을 끊었다.
레니샤의 분홍색 눈동자가 빛을 머금고 있었다.
짙은 야생의 장미 향기가 카시우스를 휘어 감았다.
레니샤는 자신의 외모와 분위기를 시기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 레니샤에게서 카시우스가 무엇을 보고 느낄지 전부 알고 있는 듯했다.
레니샤는 본디 누군가의 아래에 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시시때때로 느낀다.
레니샤는 정점에 서서 누군가를 부리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레니샤의 곁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껴야 할 만큼.
“카시우스. 당신은 내가 웃는 게 싫은가요?”
카시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냥 레니샤가 내게 기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충분히 그러고 있어요, 카시우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쉬카로드를 카시우스에게 맡긴 것도 그런 의미죠. 나는 카시우스가 지켜주지 않는다면 언제 죽을지 몰라요.”
카시우스가 반사적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왜 그런 말을……!”
“내 목숨을 카시우스에게 맡긴 거예요. 그것으론 불충분한가요?”
레니샤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레니샤의 분홍빛 입술이 달콤하게 벌어졌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겠다면 또 무엇을 내어줘야 하나.”
카시우스가 침을 삼켰다.
마음, 마음을 내어달라고 조르고 싶었다.
마담 투리엘은 레니샤와 정말로 가까워지고 싶다면 가족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었다.
진정한 가족, 부부.
그런 간질간질한 것들을 바란다.
레니샤와 카시우스를 닮은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과 함께 미래를 그리고.
카시우스가 바라는 건 그런 거였다.
“바라는 게 있는 얼굴인데?”
레니샤가 말끝을 올렸다.
“무엇이든 말해봐요, 내 강아지. 당신이 바라는 건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을 잡았다.
용기가 없어서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레니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던 거였다.
레니샤는 지금 스스로의 바람으로도 벅찬 길을 걷고 있었다.
단단한 껍질 속에 숨은 거북이처럼 황성에 들어앉은 황제를 끄집어내 그 목을 자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게다가 레니샤는 그 어깨 위에 히엔트리를 짊어지려 하고 있었다.
황혼에 선 히엔트리를 말이다.
히엔트리가 이전의 전성기만큼은 아니라는 사실을 대륙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영원히 붉은 꽃은 없듯이 히엔트리 또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레니샤는 다시 한번 히엔트리를 꽃 피우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적어도 카시우스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 레니샤에게 카시우스의 바람이 힘겹지는 않을지 걱정이었다.
입술을 달싹일 뿐 말을 않는 카시우스를 레니샤가 재촉했다.
“카시우스. 하고 싶은 말을 해요. 나는 당신의 솔직함을 좋아하는 거야. 알잖아요.”
카시우스가 레니샤와 눈을 마주했다.
레니샤의 눈동자는 한 꺼풀 껍질을 벗은 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절망과 고통, 분노.
온갖 감정을 품고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훨씬 정제된 느낌이었다.
레니샤는 카시우스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레니샤는 카시우스가 솔직해서 좋다고 말한다.
레니샤는 카시우스에게 얼마만큼 솔직한 걸까.
카시우스의 입술이 떨렸다.
“나는…… 당신과 가족이 되고 싶어요, 레니샤.”
“가족?”
“당신의 남편으로서, 그리고 당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레니샤의 눈이 커졌다.
카시우스가 이런 이야기를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보통 사람들은 레니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누군가는 복수를, 누군가는 영화를, 또 다른 누군가는 권력을 바랐다.
카시우스처럼 소박하고 귀중한 것을 바란 이는 없었다.
레니샤 또한 부모님의 광활한 사랑 아래에서 자유롭게 자랐다.
레니샤의 세상은 저택 안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 레니샤는 공주였다가, 여왕이었다가, 새가 되기도 했었다.
레니샤는 가족의 귀중함을 알고 있었다.
카시우스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무겁고 귀한 것을 레니샤에게 바라고 있는 거였다.
“당신에게 부담이 되려고 한 말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레니샤의 뜻을 모두 이루고 난 이후라도 좋습니다.”
레니샤가 고요한 시선으로 카시우스를 응시했다.
언제부터일까? 그것만은 장담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카시우스는 레니샤를 가장 무서워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카시우스는 레니샤에게 부담도 되고 싶지 않아 했고, 상처도 주고 싶지 않아 한다.
스스로가 기대지 못하고 오히려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기대길 바란다.
그것에 붙이는 감정의 이름을 레니샤도 알고 있었다.
사랑.
카시우스는 레니샤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쩌면 카시우스보다 레니샤가 훨씬 먼저 눈치챈 것일지도 모른다.
카시우스는 레니샤가 메테오와 있는 것을 싫어하고 렉서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싫어한다.
카시우스는 레니샤에게 그 남자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레니샤, 무슨 대답이라도…….”
“그렇게 해요.”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말을 또다시 잘랐다.
“내가 편안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카시우스일 거예요. 내가 누군가와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건 모두 카시우스와 할게요.”
“레니샤…….”
카시우스가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할게요.”
레니샤는 카시우스의 고백을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 솔직한 남자는 그것을 알고나 있을까.
레니샤가 차게 식은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카시우스가 못 마시겠다고 밀어준 에스프레소가 봄바람을 머금기라도 한 것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레니샤의 눈꼬리가 휘었다.
***
“레니샤가 제도에 도착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시달릴 대로 시달린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레니샤가 언제쯤 도착하느냐고 시종들을 1시간마다 불러대는 통에 시종들은 불경하게도 황제의 음식에 수면제라도 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렉서스가 고대하던 레니샤가 도착한 것이다.
“지금 레니샤는 어디에 있지? 캘리엇 백작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착했군. 내가 보낸 선물은 받았을 거야. 지금 내가 내린 저택에서 지내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지금 레니샤 부인께서는 카시우스 공의 저택에서 머물고 계십니다.”
그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두 사람은 부부인데.
시종장은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켰다.
렉서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놈도 같이 온 건가?”
“예, 폐하.”
어차피 알려질 일을 숨길 필요가 있겠는가.
시종장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다.
레니샤가 제도에 도착해서 카시우스와 함께 데이트를 즐겼다는 이야기와 사람들이 그들을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본다는 이야기 같은 것을 말이다.
렉서스가 그 이야기들을 곱씹었다.
레니샤가 어린아이처럼 웃었다거나, 두 사람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거나.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함께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거나.
렉서스는 한 번도 레니샤와 누리지 못했었던 것들이었다.
레니샤를 떠올려 보았다.
렉서스를 항상 한계까지 몰아붙이던 그 여자를 말이다.
레니샤는 고분고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항상 반발했고 렉서스를 화나게 만들었다.
렉서스가 다른 여자들을 찾기 시작한 것도 레니샤 때문이었다.
“……레니샤에게 전해. 그 저택이 불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옮기라고 말이야.”
레니샤가 행복한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렉서스가 불행한 만큼은 불행해야 하지 않나.
레니샤를 잃은 이후로 렉서스는 잠조차 제대로 못 자고 있는데!
“예, 폐하.”
시종장이 한숨을 간신히 삼키고 있을 때, 카나리아가 등장했다.
카나리아는 이전과는 달리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드레스 자락을 살랑거리면서 들어온 카니라아가 시종장에게 손짓했다.
이만 뒤로 물러서도 된다는 뜻이다.
시종장이 얼른 도망쳤다.
“폐하, 무엇 때문에 그렇게 노여워하시나요?”
“카나리아.”
카나리아가 이전처럼 예쁜 미소를 지으며 렉서스의 품에 안겼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리지요. 이렇게 후계자도 품에 안겨드리는 카나리아가 있는데 뭐가 언짢으셔요.”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목소리에 렉서스가 눈을 감았다.
곤두서 있던 신경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카나리아는 자신의 분수와 주제를 인지한 듯했다.
렉서스가 주는 것에 만족했으며 그의 뜻에 순응했다.
황후가 되기 전처럼 말이다.
‘레니샤와는 한참 다르지.’
아무리 가르치려고 해도 알아먹질 못했었던 레니샤는 지금도 매한가지였다.
“레니샤가 감히 황제의 뜻을 거스르는군.”
“아하.”
카나리아가 피식 웃었다. 미친 새X.